사냥터, 보루…해맞이 명소 '아차산'에 이런 역사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2.31. 15:12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의 본격적인 발굴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졌다.
112화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일출 명소를 찾아 해맞이에 나선다. 아차산(峨嵯山)은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295.7m의 산으로, 서울 해맞이 명소로 유명하다. 삼국시대에 아차산은 삼국이 서로 경쟁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보루(堡壘) 유적은 이러한 역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차산이 사냥터, 목장, 봉화(烽火)의 설치, 잠실(蠶室) 등으로 활용되었음이 실록이나 문집 등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일출 명소를 찾아 해맞이에 나선다. 아차산(峨嵯山)은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295.7m의 산으로, 서울 해맞이 명소로 유명하다. 삼국시대에 아차산은 삼국이 서로 경쟁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보루(堡壘) 유적은 이러한 역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차산이 사냥터, 목장, 봉화(烽火)의 설치, 잠실(蠶室) 등으로 활용되었음이 실록이나 문집 등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아차산성과 고구려 보루 유적
아차산은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등으로 『고려사』에 전하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자 표기가 변형되어 ‘아차(峨嵯)’로 기록되어 있다. 아차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가 영토 다툼을 한 격전지로, 이 일대에 조성돼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이러한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아차산성은 아차산의 가장 남쪽 끝단, 한강과 접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1,125m 정도이다. 축성 연대는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남쪽 진출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견해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발굴된 발견된 ‘아차산 고구려 보루(堡壘) 유적’은 5세기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던 시기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보루’란 돌이나 목책 등을 이용하여 튼튼하게 구축한 방어시설물을 뜻하는 말로, 지금도 꼭 지켜야 할 대상을 ‘보루’라 표현하고 있다. 5세기 고구려가 장수왕 때 남하 정책을 펼쳐 백제 개로왕을 전사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한 후, 군사 방어 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한강 일대는 삼국이 격돌한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초반 이곳은 백제의 영토였지만, 4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한다. 이후 백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는 5세기 후반까지 한강 지역을 차지했지만, 6세기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연합 작전을 펼치면서 이곳을 상실하였다. 고구려 보루 유적에서는 건물 시설과 온돌, 간이 대장간과 아궁이, 쇠솥 등이 발굴되어 당시 대치 현장에 있었던 고구려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의 본격적인 발굴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홍련봉 1·2보루와 아차산 3·4보루, 용마산 1·2보루, 시루봉 보루가 발굴되었다. 고구려 유적지 대부분이 북한이나 중국에 있는 상황에서 우리 땅, 그것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군사 시설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차산성은 아차산의 가장 남쪽 끝단, 한강과 접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1,125m 정도이다. 축성 연대는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남쪽 진출에 대비하여 쌓았다는 견해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발굴된 발견된 ‘아차산 고구려 보루(堡壘) 유적’은 5세기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던 시기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보루’란 돌이나 목책 등을 이용하여 튼튼하게 구축한 방어시설물을 뜻하는 말로, 지금도 꼭 지켜야 할 대상을 ‘보루’라 표현하고 있다. 5세기 고구려가 장수왕 때 남하 정책을 펼쳐 백제 개로왕을 전사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한 후, 군사 방어 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현재의 서울을 포함한 한강 일대는 삼국이 격돌한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초반 이곳은 백제의 영토였지만, 4세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한다. 이후 백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는 5세기 후반까지 한강 지역을 차지했지만, 6세기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연합 작전을 펼치면서 이곳을 상실하였다. 고구려 보루 유적에서는 건물 시설과 온돌, 간이 대장간과 아궁이, 쇠솥 등이 발굴되어 당시 대치 현장에 있었던 고구려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의 본격적인 발굴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홍련봉 1·2보루와 아차산 3·4보루, 용마산 1·2보루, 시루봉 보루가 발굴되었다. 고구려 유적지 대부분이 북한이나 중국에 있는 상황에서 우리 땅, 그것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군사 시설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조선시대 왕실 사냥터, 아차산
아차산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첫 기록은 1404년(태종 4) 12월 5일 정당 문학을 지낸 조운흘(趙云仡)의 졸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1418년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양녕대군은 여러 지역을 전전하였는데, 아차산 쪽에 머문 기록이 확인된다. 1419년(세종 1) 2월 1일자의 “양녕이 도망하여 즉시 아차산에 올라가 하루를 보내고 밤에 평구역에 사는 본궁(本宮)의 종 이견(李堅)의 집에 들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왕 태종은 효령대군 등을 보내어 의복과 신발 및 술을 가지고 가서 양녕대군을 데려오게 하였다.
아차산은 서울 교외 왕실 사냥터로 널리 활용되었다. 태종은 특히 사냥을 좋아하여 동쪽 교외에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아차산 일대도 그중 한 곳이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있을 때는 세종과 함께 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상왕과 임금이 아차산에 거둥하여 사냥을 구경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이 아차산에 거둥하여 타위(打圍:사냥)를 구경한 후, 중량포(中良浦)에 주정(晝停:휴식을 취함)하는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아차산 일대에서 사냥을 한 후에는 자신이 직접 조성했던 정자인 낙천정(樂天亭)을 자주 찾았다. 낙천정은 태종 때 한강변에 조성한 정자로 현재의 잠실대교 부근에 표지석이 남아 있다. 변계량(卞季良)이 쓴 기문(記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세종)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시고, 이에 농한기에 동교(東郊)에 거둥하시어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고 둥그스레한 모양이 가마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름이 대산(臺山)이다. ...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이는 낙천정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상왕(태종)과 임금(세종)이 낙천정에서 아차산에 거둥하여 사냥을 구경하고, 상왕은 낙천정으로 돌아가고, 임금은 궁궐로 돌아왔다.”는 기록에서는, 아차산 일대 사냥 때 낙천정이 베이스캠프 기능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아차산과 살곶이벌에 이르는 지역은 동교라 하여, 왕의 사냥터로 자주 활용되었고, 넓은 들판에서는 강무(講武)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임금이 동교에서 농사의 작황을 구경하고 아차산에서 사냥하였다.”는 『단종실록』의 기록이나, “(세조가) 세자와 건원릉과 현릉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차산에서 습진(習陣)을 하였다.”는 『세조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왕은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한 후에는 낙천정에서 사열 의식을 행하였고, 아차산 아래에 조성한 이궁(離宮)에서 숙박하기도 하였다. 1458년(세조 4) 9월 세조는 왕비, 세자와 함께 동교에 거둥하고, 낙천정에 이르러 대규모 사열 의식을 한 후 저녁에는 아차산 아래 이궁에서 숙박하였다.
1418년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양녕대군은 여러 지역을 전전하였는데, 아차산 쪽에 머문 기록이 확인된다. 1419년(세종 1) 2월 1일자의 “양녕이 도망하여 즉시 아차산에 올라가 하루를 보내고 밤에 평구역에 사는 본궁(本宮)의 종 이견(李堅)의 집에 들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왕 태종은 효령대군 등을 보내어 의복과 신발 및 술을 가지고 가서 양녕대군을 데려오게 하였다.
아차산은 서울 교외 왕실 사냥터로 널리 활용되었다. 태종은 특히 사냥을 좋아하여 동쪽 교외에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아차산 일대도 그중 한 곳이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있을 때는 세종과 함께 사냥에 나서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상왕과 임금이 아차산에 거둥하여 사냥을 구경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이 아차산에 거둥하여 타위(打圍:사냥)를 구경한 후, 중량포(中良浦)에 주정(晝停:휴식을 취함)하는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아차산 일대에서 사냥을 한 후에는 자신이 직접 조성했던 정자인 낙천정(樂天亭)을 자주 찾았다. 낙천정은 태종 때 한강변에 조성한 정자로 현재의 잠실대교 부근에 표지석이 남아 있다. 변계량(卞季良)이 쓴 기문(記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세종)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시고, 이에 농한기에 동교(東郊)에 거둥하시어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고 둥그스레한 모양이 가마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름이 대산(臺山)이다. ...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이는 낙천정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상왕(태종)과 임금(세종)이 낙천정에서 아차산에 거둥하여 사냥을 구경하고, 상왕은 낙천정으로 돌아가고, 임금은 궁궐로 돌아왔다.”는 기록에서는, 아차산 일대 사냥 때 낙천정이 베이스캠프 기능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아차산과 살곶이벌에 이르는 지역은 동교라 하여, 왕의 사냥터로 자주 활용되었고, 넓은 들판에서는 강무(講武)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임금이 동교에서 농사의 작황을 구경하고 아차산에서 사냥하였다.”는 『단종실록』의 기록이나, “(세조가) 세자와 건원릉과 현릉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차산에서 습진(習陣)을 하였다.”는 『세조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왕은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한 후에는 낙천정에서 사열 의식을 행하였고, 아차산 아래에 조성한 이궁(離宮)에서 숙박하기도 하였다. 1458년(세조 4) 9월 세조는 왕비, 세자와 함께 동교에 거둥하고, 낙천정에 이르러 대규모 사열 의식을 한 후 저녁에는 아차산 아래 이궁에서 숙박하였다.

아차산은 봉화대를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봉화대가 설치된 곳
아차산은 봉화대(烽火臺)를 설치한 곳이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서울 남산의 봉화 다섯 곳을, 본조가 진무소(鎭撫所)와 더불어 산에 올라 바라보고 불을 들어 서로 조준(照準)한 뒤에 땅을 측량하여 설치하였는데, 그 지명과 내력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록해 올립니다. 동쪽의 제1봉화는 명철방(明哲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양주(楊州) 아차산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함길도와 강원도로부터 오게 된다.”고 하여 아차산이 동쪽 방면 서울 국방의 대표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아차산의 봉화에 대한 점검 기록도 실록에 자주 보인다. 선조 때 승정원에서는 “아차산의 봉수(烽燧)는 실로 북도(北道)의 변보(邊報)를 통보하는 것으로 관계됨이 몹시 중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름이 끼어 받을 수 없다.’고 날마다 보고하는데도 병조에서는 전혀 모르는 체하고 있으니 매우 그릅니다. 담당자를 문책하시고, 병조에게 다시 자세히 조사해서 일일이 거화(擧火)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하자, 선조는 이를 수용하였다.
아차산의 봉화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실록』에는 “아차산의 봉화가 매양 구름에 가려 남산과 응하지 못했었는데 이날은 천기(天氣)가 청명하여 남산의 다섯 봉화를 다 들게 되었다. … 아차산의 봉화는 매양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당자를 문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실록』에도 날씨에 따라서 아차산에서는 봉화를 볼 수 없고, 북쪽에서 내려오던 봉화가 아차산에는 닿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중랑구 봉화산 정상에는 아차산 봉수대 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봉수 거화(炬火) 재현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아차산의 봉화에 대한 점검 기록도 실록에 자주 보인다. 선조 때 승정원에서는 “아차산의 봉수(烽燧)는 실로 북도(北道)의 변보(邊報)를 통보하는 것으로 관계됨이 몹시 중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름이 끼어 받을 수 없다.’고 날마다 보고하는데도 병조에서는 전혀 모르는 체하고 있으니 매우 그릅니다. 담당자를 문책하시고, 병조에게 다시 자세히 조사해서 일일이 거화(擧火)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하자, 선조는 이를 수용하였다.
아차산의 봉화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실록』에는 “아차산의 봉화가 매양 구름에 가려 남산과 응하지 못했었는데 이날은 천기(天氣)가 청명하여 남산의 다섯 봉화를 다 들게 되었다. … 아차산의 봉화는 매양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당자를 문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실록』에도 날씨에 따라서 아차산에서는 봉화를 볼 수 없고, 북쪽에서 내려오던 봉화가 아차산에는 닿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중랑구 봉화산 정상에는 아차산 봉수대 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봉수 거화(炬火) 재현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아차산에서 서울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
아차산의 목장과 잠실
아차산 산마루와 전관(箭串:살곶이벌)을 목장과 경작지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전관 목장의 동남쪽은 아차산(峨嵯山) 산마루의 옛 목장 기지까지를 한도로 하여 쌓게 하고, 목장 안에 있는 각 가구의 수전(水田)은 각 가구로 하여금 각자가 장포(場圃)를 쌓고는 전대로 경작하게 하고, 한전은 각 가구가 집을 지은 곳을 제외하고는 도로 묵히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아차산 일대가 목장과 경작지로 활용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목장으로 조성된 지역이었던 만큼 말과 소를 도둑질하는 일도 잦았고, 이에 대비하여 경비를 강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병조에서 살곶이 목장의 본궁의 소 3마리와 사삿말 1필을 도둑질해다가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하여, 두모포, 마전포, 광나루 강변과 아차산, 중량포, 답심(踏深) 지역을 수색할 것을 청한 내용이 보인다.
세조 대에도 아차산 아래에 목장을 설치하였음이 나타난다. 『세조실록』에는 사복시(司僕寺:조선시대 말과 목장 등을 담당하는 관청) 책임자가 “아차산 아래 망올리(芒兀里)에 옛 목장터가 있는데, 평구역 서쪽 대천(大川)에서부터 남쪽으로 큰 강에 이르기까지 13리이고, 호굴사(虎崛寺) 북령(北嶺)에서부터 남쪽으로 광진에 이르기까지 3리이니, 그 주위에 담장을 쌓으면 말 4, 5백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고 보고하면서, 주위에 성을 쌓고, 그 목자(牧子)는 양민(良民)과 공천(公賤)을 뽑아서 정할 것을 건의한 모습이 보인다.
아차산은 왕실의 사냥터이자 목장으로 활용하였기에, 조선초기부터 나무하고 벌채하는 것을 금하였다. 세종 때 의정부에서는 도성 외면의 네 곳 산에서 아차산까지는 모두 나무하고 벌채하는 것을 금하였다. 1472년(성종 3) 3월 10일 병조에서 “아차산은 곧 국도(國都)를 비보(裨補;풍수지리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완함)하는 땅이고, 강무장(講武場)이 되니, 경작과 벌채를 금할 것”을 청하였고 성종은 이를 따랐다. 아차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임과 함께 군사훈련 장소라는 이유로 경작과 벌채를 금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성종 때인 1478년(성종 9) 경연에서 사헌부 지평 안선(安璿)은 아차산에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사냥터로 삼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성종은 “작은 강무는 하룻밤을 묵을 수가 없는데, 만약 조금 멀면 할 수 없이 범야(犯夜)하여서 왕래해야 할 터이니, 어찌 옳겠는가? 이 산은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하루 안에 왕래하기가 매우 편리하니, 이곳을 버려두고는 강무할 곳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아차산이 궁궐과의 접근성이 좋아서 당일로 강무가 가능한 곳임을 들어, 성종은 안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차산에는 누에고치를 키우는 잠실(蠶室)도 있었다. 1462년(세조 8) 4월 18일의 『세조실록』에는, “내잠실, 외잠실과 아차산 잠실에서 각각 새로운 견(繭:누에고치)을 바쳤는데, 외잠실이 가장 많았다. 당시에 외잠실은 상의원(尙衣院)에서 주관하고, 내잠실과 아차산 잠실은 환관이 주관하였다. 누에고치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주관하는 자에게 상벌을 주었으므로, 먼저 뽕 따려는 자들이 혹은 여향(閭巷)의 상전(桑田)에 다투어 출입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차산은 한강을 끼고 우뚝 솟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1950년대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으며, ‘워커힐’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형 호텔이 지어진 것도 아차산에서 보는 한강뷰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목장으로 조성된 지역이었던 만큼 말과 소를 도둑질하는 일도 잦았고, 이에 대비하여 경비를 강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병조에서 살곶이 목장의 본궁의 소 3마리와 사삿말 1필을 도둑질해다가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하여, 두모포, 마전포, 광나루 강변과 아차산, 중량포, 답심(踏深) 지역을 수색할 것을 청한 내용이 보인다.
세조 대에도 아차산 아래에 목장을 설치하였음이 나타난다. 『세조실록』에는 사복시(司僕寺:조선시대 말과 목장 등을 담당하는 관청) 책임자가 “아차산 아래 망올리(芒兀里)에 옛 목장터가 있는데, 평구역 서쪽 대천(大川)에서부터 남쪽으로 큰 강에 이르기까지 13리이고, 호굴사(虎崛寺) 북령(北嶺)에서부터 남쪽으로 광진에 이르기까지 3리이니, 그 주위에 담장을 쌓으면 말 4, 5백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고 보고하면서, 주위에 성을 쌓고, 그 목자(牧子)는 양민(良民)과 공천(公賤)을 뽑아서 정할 것을 건의한 모습이 보인다.
아차산은 왕실의 사냥터이자 목장으로 활용하였기에, 조선초기부터 나무하고 벌채하는 것을 금하였다. 세종 때 의정부에서는 도성 외면의 네 곳 산에서 아차산까지는 모두 나무하고 벌채하는 것을 금하였다. 1472년(성종 3) 3월 10일 병조에서 “아차산은 곧 국도(國都)를 비보(裨補;풍수지리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완함)하는 땅이고, 강무장(講武場)이 되니, 경작과 벌채를 금할 것”을 청하였고 성종은 이를 따랐다. 아차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임과 함께 군사훈련 장소라는 이유로 경작과 벌채를 금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성종 때인 1478년(성종 9) 경연에서 사헌부 지평 안선(安璿)은 아차산에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사냥터로 삼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성종은 “작은 강무는 하룻밤을 묵을 수가 없는데, 만약 조금 멀면 할 수 없이 범야(犯夜)하여서 왕래해야 할 터이니, 어찌 옳겠는가? 이 산은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하루 안에 왕래하기가 매우 편리하니, 이곳을 버려두고는 강무할 곳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아차산이 궁궐과의 접근성이 좋아서 당일로 강무가 가능한 곳임을 들어, 성종은 안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차산에는 누에고치를 키우는 잠실(蠶室)도 있었다. 1462년(세조 8) 4월 18일의 『세조실록』에는, “내잠실, 외잠실과 아차산 잠실에서 각각 새로운 견(繭:누에고치)을 바쳤는데, 외잠실이 가장 많았다. 당시에 외잠실은 상의원(尙衣院)에서 주관하고, 내잠실과 아차산 잠실은 환관이 주관하였다. 누에고치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주관하는 자에게 상벌을 주었으므로, 먼저 뽕 따려는 자들이 혹은 여향(閭巷)의 상전(桑田)에 다투어 출입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차산은 한강을 끼고 우뚝 솟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1950년대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으며, ‘워커힐’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형 호텔이 지어진 것도 아차산에서 보는 한강뷰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아차산 숲속도서관
최근에 들어와 아차산길은 서울의 대표적인 등산로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아차산 숲을 활용한 아차산 숲속도서관을 2022년 8월 조성하였다. 해돋이 명소이자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아차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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