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부담을 줄여라! 조선시대 '세금 개혁'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2.17. 16:04

수정일 2025.12.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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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경희궁 태령전 안에 전시되어 있는 영조의 어진
경희궁 태령전 안에 전시되어 있는 영조의 어진
  111화   조선 대표 세금 정책, 대동법과 균역법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이 연말정산으로 분주하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 왔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의 세금을 합리적으로 부과하려는 국가적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다. 조선을 대표하는 세금 정책인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한 배경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공물 납부의 폐단을 개혁한 대동법

대동법의 핵심은 지방의 특산물인 공물(貢物)을 현물 대신에 쌀로 통일해 세금으로 받는 것이었다. 세법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光海君:1575~1641, 재위 1608~1623) 때 처음 시행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세금의 부과 단위를 가호별(家戶別)로 하는 방식에서 토지 결수(結數)에 따라 부담하도록 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왕릉 공사, 중국 사행 비용이나, 왕실에 올리는 특산물의 진상(進上) 등을 감면해주는 방안들을 추진해 나갔고, 대표적인 성과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인 공물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백성들이 실제 체감할 수 있는 세금 정책이었다.

대동법 실시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었다. 『광해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 관청의 방납인(防納人:중간에서 대납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심해졌는데, 기전(畿甸:경기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고 하였다.”

대동법을 전담할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토지 1결당 쌀 16두를 봄과 가을로 나누어 8두씩 징수하여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 이원익 주장의 핵심이었다. 최종적으로 대동법은 1결당 12두씩을 받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원익은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오늘날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이다. 이원익은 공직자의 모범을 보여준 관료이기도 하였다.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지만 늘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 “금천(衿川:현재의 광명시)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의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잘 증언해 주고 있다. 현재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소재한 관감당(觀感堂)은 인조가 2칸 초가인 이원익의 집에 비가 새자 그에게 하사한 집이다.
조선후기 조세 수납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자료 ‘선혜청응봉’
조선후기 조세 수납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자료 ‘선혜청응봉’

선혜청의 설치와 운영

대동법을 주관한 관청은 선혜청(宣惠廳)이었다. 광해군의 전교 중에서 ‘선혜(宣惠:은혜를 선포함)’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관청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었다. 선혜청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숭례문과 소공동 일대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선혜청은 서부 양생방(養生坊)에 있다. 대동미, 대동포, 대동전의 출입을 관장한다. 광해군 무신년(1608년)에 처음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서울시 중구 북창동(北倉洞)과 남창동(南倉洞)은 선혜청의 북쪽 창고, 남쪽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선혜청에서는 당시 물가를 참작하여 방납인(防納人:공물을 대신 납부하는 사람)에게 가격을 지급하고, 방납인은 지정된 물품을 각 관청에 납품토록 하며, 산릉(山陵) 조성이나 외국 사신 영접에 필요한 역을 제외하고는 쌀 12두 이외에 일체의 징수를 허용치 않도록 하였다.

대동법 실시로 국가의 수입이 증대되었고, 공물을 가호별이 아닌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하였기 때문에 농민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또한 전에는 물품을 직접 부담하던 것을 관에서 허가를 받은 공인(貢人)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대동미를 사용하여 구매하는 과정에서 수공업과 상업이 활발해지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대동법의 실시 후, 대동미 뿐만 아니라 대동전과 같은 화폐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현재에 세금을 카드로 납부하게 하는 것과도 유사한 모습으로, 대동법의 실시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세금 부담이 커진 양반 지주들의 저항이 커지면서, 대동법은 경기도 지역에만 한정하여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정기적으로 부담하는 상공(常貢) 이외의 별공(別貢)과 진상(進上)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한계도 있었다.

대동법은 효종 때의 경제 관료 김육(金堉:1580~1658) 등의 노력으로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확대되었고, 숙종 대에 함경도와 평안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게 되었다.

김육은 한양 서부 마포면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후(公勵), 호는 잠곡(潛谷),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잠곡이라는 호는 김육이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가평 잠곡에서 10년 간 은거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김육은 잠곡에서 농사를 지으며 나무와 숯을 서울로 져 날라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숙종 때 대동법의 전국 실시는 광해군 때 처음 시작한 시간으로 보면 100여 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었다. 이원익 등이 물꼬를 틔웠고, 김육과 같은 관료의 헌신이 컸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영조, 균역법을 실시하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는 조선시대 왕 중에서 83세로 최장수 했고, 왕으로 재위한 기간도 52년으로 최장기간 재위 왕이었다. 최근에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기록 등을 토대로 영조의 장수 비결에 관한 분석도 자주 시도되고 있다.

영조의 장수가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짜고, 일생토록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한 것과 관련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영조는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철저히 서민적 삶을 지향하면서, 서민을 위한 정책을 폈다. 그 대표적 성과는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크게 토지에 대한 세금인 전세(田稅)와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 그리고 군포(軍布)였다.

공납의 문제는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해결이 되었으나, 군역의 의무 대신에 세금으로 1년에 2필씩 군포(軍布)를 납부하는 부담은 17세기 이후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선시대에는 16세에서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양인들은 관직을 사거나 족보와 호적의 위조로 군역의 법망에서 벗어났다.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군역이 없는 노비로 전락하는 백성도 늘어났다.
군역을 피하려는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힘없는 백성들의 군역 부담은 늘어났다.
군역을 피하려는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힘없는 백성들의 군역 부담은 늘어났다.
군역을 피하려는 양반과 노비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힘없는 백성들의 군역 부담은 늘어났다. 당시 군역이 50만 호에 해당한다고 추정되는데 실질적으로 군역의 부담을 지는 숫자는 10만 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부족분은 나머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떨어지게 되었다. 죽은 사람이나(백골징포)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아이까지 군역이 부과되고(황구첨정), 군역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도망간 경우에는 이웃(인징)이나 친척(족징)에게 군역을 부담시키는 실태가 이어졌다.

영조는 이러한 현실을 간파하고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으면서 군역 부담 해결의 근본 대책을 마련해 나갔다. 1750년(영조 26) 5월 영조는 창경궁 홍화문 앞에 나갔다. 군역의 부담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영조는 “고질적인 폐단은 양역보다 더함이 없기 때문에 궐문에 임하여 묻게 된 것이다. 유포(遊布)와 구포(口布)는 당초에 논하고도 싶지 않으니, 호포(戶布:가호별로 부담시키는 군포)와 결포(結布:토지 결수로 부과하는 군포)로써 너희들의 소원 여부를 듣고자 한다. … ‘각자 소견을 말하라’ 하고, 윤음을 받아 적으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아! 이번에 궐문에 임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한 연유에서이다.’” 라면서 군포에 대해 백성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피력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군역에 관한 각종 규정들을 검토하고, 군역에 관해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적극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나갔다. 경제에 해박한 박문수, 조현명, 홍계희, 신만 등 관료들의 역할도 컸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는 호조판서로서 균역법의 기본인 감필(減匹)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영조는 여론 조사와 관료들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1751년 9월 균역청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의 핵심 내용은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2개월에 1필로 납부하는 것이었다.

군포 1필의 값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20냥 정도가 되었는데, 당시 1냥으로는 쌀 20kg(현재 6~8만 원) 정도를 구매할 수 있었다. 현재로 환산하면 20냥은 120~160만 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한 가구에 장정이 5명일 경우, 1년에 내는 세금은 현재의 600~800만 원에 달하는 큰 액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균역법 실시로 세금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백성들은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조선 후기 학자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
조선 후기 학자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

균역청의 실시와 재원 확보

균역법을 주관하는 관청은 균역청(均役廳)이었다. 균역청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남산 아래로 『한경지략』에는 “남부 주자동(鑄字洞)에 있다(즉 옛 수어청(守禦廳)이다). 영조 경오년(1750년)에 설치하였으며, 선혜청에 병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자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활자를 주조하는 관청인 주자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현재는 남산 아래 충무로 일대에 소재하고 있다. 영조는 균역법 실시로 인해 줄어든 세금을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 나갔다.

우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있는 재력가들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게 하였다. 이들은 호적에 유학(幼學)이라고 칭하던 자들로서 종래에는 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계층이었다. 선무군관이라는 명칭을 주는 대신에 군포를 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이외에 결작(結作)이라는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여 지주들에게 1결당 쌀 2말이나 5전의 돈을 부담하는 토지세를 만들어 양반 지주들의 부담을 크게 하였고, 왕실의 재원으로 활용하였던 어세(漁稅), 염세(鹽稅), 선세(船稅)를 균역법 실시로 부족해진 국가 재정으로 전환시켰다.

세금 징수에 대한 합리적인 방안에 대한 모색은 현재는 물론이고 역사에서도 꾸준히 전개되어왔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과제이다. 현재의 세금 정책 수립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세제 개혁 대동법과 균역법의 성공 사례를 참고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신병주 #세금 #균역법 #대동법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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