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으로 다시 주목! 한양도성의 600년 역사 속으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1.05. 16:33

가을 정취가 완연한 요즘 서울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으로 한양도성을 추천한다.
108화 한양도성 축조의 역사
가을 정취가 완연한 요즘, 서울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으로 필자는 한양도성을 추천하고 싶다. 도성 구간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향기를 느끼면서 이곳을 걷는 것은 최고의 힐링이 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최근 서울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 받을 가치가 있는 유산이다.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10월 28일,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은 500년 가까이 고려 왕조의 수도였고,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양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된 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동서남북으로 네 곳의 산, 낙산(125m), 인왕산(338m), 목멱산(265m), 백악산(북악산, 342m)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정취가 완연한 요즘, 서울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으로 필자는 한양도성을 추천하고 싶다. 도성 구간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향기를 느끼면서 이곳을 걷는 것은 최고의 힐링이 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최근 서울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 받을 가치가 있는 유산이다.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10월 28일,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은 500년 가까이 고려 왕조의 수도였고,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양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된 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동서남북으로 네 곳의 산, 낙산(125m), 인왕산(338m), 목멱산(265m), 백악산(북악산, 342m)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태조, 처음으로 한양도성을 축조하다
한양 천도 후 11개월이 지난 1395년 9월에는 왕이 거처하는 궁궐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경복궁이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설립한 것은 ‘왕은 남쪽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도와 경복궁 완성 후에는 한양에 본격적으로 도성을 쌓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1395년(태조 4) 9월 26일, 태조는 좌우 정승에게 “명년 정월에 여러 도의 백성을 징발해서 도성(都城)을 쌓고자 하니, 나의 뜻을 알아서 빨리 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윤9월 10일 도성의 터를 순시(巡視)한 후, 13일에는 정도전에게 성터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1395년(태조 4) 9월 26일, 태조는 좌우 정승에게 “명년 정월에 여러 도의 백성을 징발해서 도성(都城)을 쌓고자 하니, 나의 뜻을 알아서 빨리 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윤9월 10일 도성의 터를 순시(巡視)한 후, 13일에는 정도전에게 성터를 정할 것을 명하였다.

1396년부터 본격적인 도성 축성 작업이 진행되었다.
1396년부터 본격적인 도성 축성 작업이 진행되었다. 1월에 경상도·전라도·강원도와 서북면의 안주 이남, 동북면의 함주 이남의 민정(民丁) 11만 8,070여 명을 징발하여 처음으로 도성을 쌓게 했다.
이때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쌓을 구역을 정하였는데, 천자문의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백악의 동쪽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번호를 매겨 서쪽 끝은 조자(弔字)로 끝나고 있다. 총 97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축성 공사를 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각도 주군(州郡)의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자, 태조가 날씨가 심히 추울 때는 밤에 공사를 하지 못하게 한 기록도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는 이 산들을 이은 도성의 둘레는 9,975보(步)로 약 18.627km임이 나타난다.
이때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쌓을 구역을 정하였는데, 천자문의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다. 백악의 동쪽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번호를 매겨 서쪽 끝은 조자(弔字)로 끝나고 있다. 총 97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축성 공사를 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각도 주군(州郡)의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천자(天字)로부터 일자(日字)까지는 동북면이, 월자(月字)에서 한자(寒字)까지는 강원도가, 내자(來字)에서 진자(珍字)까지는 경상도가, 이자(李字)에서 용자(龍字)까지는 전라도가, 사자(師字)에서 조자(弔字)까지는 서북면이 맡게 하였다.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이 낮이나 밤을 가리지 않고 시키자, 태조가 날씨가 심히 추울 때는 밤에 공사를 하지 못하게 한 기록도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는 이 산들을 이은 도성의 둘레는 9,975보(步)로 약 18.627km임이 나타난다.
세조·숙종·순조 때의 수축 작업
태조 때 그 원형을 갖춘 한양도성은 1398년 정종의 즉위 후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한동안 방치되었다. 태조 이후 도성 수축을 지휘한 인물은 세종이었다.
1421년(세종 3) 12월 10일 세종은 우의정 정탁(鄭擢)을 도성 수축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32만 2,460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 2만 8,487척을 수축하였다. 태조 때는 참여하지 않았던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포함하여 전국에서 장정을 징발하였다. 총 32만여 명의 장정과 함께 기술자에 해당하는 공장(工匠)은 2천여 명이 참여하였음이 나타난다.
1421년(세종 3) 12월 10일 세종은 우의정 정탁(鄭擢)을 도성 수축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32만 2,460명의 역군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 2만 8,487척을 수축하였다. 태조 때는 참여하지 않았던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포함하여 전국에서 장정을 징발하였다. 총 32만여 명의 장정과 함께 기술자에 해당하는 공장(工匠)은 2천여 명이 참여하였음이 나타난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 각자성석 모습
세종 때 쌓은 도성 구간 중에는 현재 돌에 각자(刻字)가 선명히 확인되기도 한다. 신당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구간에는,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등 경상도 지역의 지명이 보이며, 낙산 구간에는 무안시(務安始), 김제(金堤) 등 전라도 지역의 지명이 보인다. 지역별로 할당하여 도성을 쌓았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세종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도성 수축 작업을 지휘한 왕은 숙종이었다. 1702년(숙종 28) 8월 11일 우의정 신완(申琓)은 8조의 계책을 올리면서 “우리나라 산천이 험한 것이 천하에 으뜸인데, 병자년에 청나라가 승리를 거둔 것은 모두 서쪽 변방을 지키지 못하고, 도성을 포기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위급한 변란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만한 곳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아니라 한양도성임을 강조했다.
숙종은 신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고, 1704년(숙종 30)부터 1709년까지 훈련도감·어영청· 금위영의 각 군영이 방어하고 있던 구역의 도성을 수축했다. 3월 25일에는 도성 수축에 앞서 북한산에 고유제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將校)를 보내어 노원(蘆原)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으며, 밥을 짓고 기계(機械)에 소용되는 나무는 사산(四山)의 벌레 먹은 나무를 베어다 쓰게 하였다. 도성은 석성을 위주로 한 기존의 돌이 작아서 잘 무너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방 2척 정도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였다.
각 군영의 감독관과 석공의 이름 및 날짜를 돌에 새겨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게 했다. 1712년 무렵 수축 작업을 마친 한양도성은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에 달하는 규모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도성 수축 작업을 지휘한 왕은 숙종이었다. 1702년(숙종 28) 8월 11일 우의정 신완(申琓)은 8조의 계책을 올리면서 “우리나라 산천이 험한 것이 천하에 으뜸인데, 병자년에 청나라가 승리를 거둔 것은 모두 서쪽 변방을 지키지 못하고, 도성을 포기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위급한 변란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만한 곳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아니라 한양도성임을 강조했다.
숙종은 신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고, 1704년(숙종 30)부터 1709년까지 훈련도감·어영청· 금위영의 각 군영이 방어하고 있던 구역의 도성을 수축했다. 3월 25일에는 도성 수축에 앞서 북한산에 고유제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將校)를 보내어 노원(蘆原)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으며, 밥을 짓고 기계(機械)에 소용되는 나무는 사산(四山)의 벌레 먹은 나무를 베어다 쓰게 하였다. 도성은 석성을 위주로 한 기존의 돌이 작아서 잘 무너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방 2척 정도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였다.
각 군영의 감독관과 석공의 이름 및 날짜를 돌에 새겨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게 했다. 1712년 무렵 수축 작업을 마친 한양도성은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에 달하는 규모였다.

숙종은 탕춘대성의 정문을 1719년에 건립하고, 홍지문이라 하였다.
숙종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조성하기도 하였는데, 탕춘대성의 ‘탕춘(蕩春)’은 ‘봄(春)을 호탕하게 즐긴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이곳에 탕춘정(蕩春亭)을 지어 연회를 즐겼던 데에서 유래한다. 숙종은 탕춘대성의 정문을 1719년(숙종 44)에 건립하고, 홍지문(弘智門)이라 하였다. 1754년(영조 30)에 영조는 탕춘대 이름을 군사를 훈련시킨다는 뜻으로,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었다. 조선 후기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摠戎廳) 본영이 탕춘대로 이전한 것도, ‘연융대’라는 이름 변경에 영향을 주었다.
숙종 때 이후에는 순조 때에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에는 더욱 넓고 반듯한 돌로 한양도성을 수축하였다. 형태가 서로 다른 돌의 모습을 통하여 시대별 도성 수축의 현황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도 한양도성 탐방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정조 때의 화가 김홍도가 그린 「부상도(負商圖)」에는 시기별로 쌓은 돌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필자가 학생들과 한양도성 답사에 나서면, 낙산공원에서 혜화문 쪽으로 가는 구간에 그림과 유사한 성벽이 나타나는데, 부자가 등짐을 메고 도성을 지나는 모습에 착안하여 배낭을 멘 학생들이 그림의 부자처럼 사진을 찍기도 한다.
숙종 때 이후에는 순조 때에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에는 더욱 넓고 반듯한 돌로 한양도성을 수축하였다. 형태가 서로 다른 돌의 모습을 통하여 시대별 도성 수축의 현황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도 한양도성 탐방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정조 때의 화가 김홍도가 그린 「부상도(負商圖)」에는 시기별로 쌓은 돌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필자가 학생들과 한양도성 답사에 나서면, 낙산공원에서 혜화문 쪽으로 가는 구간에 그림과 유사한 성벽이 나타나는데, 부자가 등짐을 메고 도성을 지나는 모습에 착안하여 배낭을 멘 학생들이 그림의 부자처럼 사진을 찍기도 한다.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도성을 통과할 수 있는 4대문과 4소문도 만들었다. 4대문은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 돈의문(敦義門), 남쪽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정문(肅靖門) 이었다.

흥인지문은 보물 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옹성을 갖추고 있다.
흥인지문은 보물 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甕城)이 있다. 동쪽의 지세가 낮아 방어상의 약점을 줄인 것이다. 다른 문과 달리 ‘之(지)’ 자를 쓴 것 역시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돈의문은 1915년 전차 노선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었으며, 현재에도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숭례문은 국보 1호로, 2008년 방화로 문루가 훼손되었다가 2013년 복원되었다.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의 동쪽 마루턱에 설치되었으며, 처음 숙청문(肅淸門)이었다가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소문은 동쪽 혜화문(惠化門), 서쪽 소의문(昭義門), 남쪽 광희문(光熙門), 북쪽 창의문(彰義門)이다. 4소문 중 현재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소의문은 현재 서울 중구 중앙일보사 인근에 위치하였다. 처음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영조 때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이라 하였다.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복원되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곳을 통해 도성을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이곳에 걸었다. 광희문과 혜화문은 현대에 와서 원래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4대문과 4소문에는 통행 금지를 알리는 종을 달았다. 밤 10시에 종을 28번 울리면 통행을 금지하였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하였다.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울리면 통금을 해제하고, 이를 파루(罷漏)라 하였다. 인정에 28번의 종을 치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의 별자리에 안녕을 기원한 것이며, 33번의 종을 치는 파루에는 통금 해제와 더불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도 매년 새해맞이로 보신각 종을 33번 타종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다.
돈의문은 1915년 전차 노선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었으며, 현재에도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숭례문은 국보 1호로, 2008년 방화로 문루가 훼손되었다가 2013년 복원되었다. 숙정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의 동쪽 마루턱에 설치되었으며, 처음 숙청문(肅淸門)이었다가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소문은 동쪽 혜화문(惠化門), 서쪽 소의문(昭義門), 남쪽 광희문(光熙門), 북쪽 창의문(彰義門)이다. 4소문 중 현재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소의문은 현재 서울 중구 중앙일보사 인근에 위치하였다. 처음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영조 때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이라 하였다.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복원되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곳을 통해 도성을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이곳에 걸었다. 광희문과 혜화문은 현대에 와서 원래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4대문과 4소문에는 통행 금지를 알리는 종을 달았다. 밤 10시에 종을 28번 울리면 통행을 금지하였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하였다.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울리면 통금을 해제하고, 이를 파루(罷漏)라 하였다. 인정에 28번의 종을 치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의 별자리에 안녕을 기원한 것이며, 33번의 종을 치는 파루에는 통금 해제와 더불어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도 매년 새해맞이로 보신각 종을 33번 타종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으로 낙산공원도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으로, 서울에서도 그 촬영 장소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낙산공원도 그중의 한 곳이다. 낙산공원 ‘한양도성길’은 주인공 루미와 진우가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은 곳으로, 많은 내외국인들이 이곳을 찾아 그 장면을 재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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