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핫플이 있었다! '한경지략'이 알려준 명소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2.03. 15:59

수정일 2025.12.03. 17:09

조회 1,275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에는 서울의 관청, 궁궐 등이 소개돼 있다.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에는 서울의 관청, 궁궐 등이 소개돼 있다.
  110화   서울의 관청·궁궐·명승지를 담은 책 ‘한경지략’

200년 전 서울의 관청·궁궐·명승지 등을 기록한 책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 유본예(柳本藝:1777~1842)가 1830년 무렵에 저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이다. 유본예는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유득공(柳得恭:1748~1807) 아들로, 유득공은 발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발해고』를 남겼다. 유본예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서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경지략』은 어떤 책인가?

유득공과 유본예 부자는 대를 이어 정조가 왕실 도서관으로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서적의 정리, 교정, 출판을 담당한 직책)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은 유본예가 『한경지략』의 저술에 주요한 바탕이 되었다. 

유본예는 서문에서 조선전기에 완성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 이후에, 한양을 다룬 문헌이 없음을 아쉬워하여,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남기고자 했다면서 그 편찬 의도를 밝히고 있다. 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1권에는 천문, 연혁, 형승(形勝), 성곽, 궁궐, 사묘(祠廟), 궐내각사(闕內各司), 2권에는 궐외각사(闕外各司), 역원(驛院), 교량, 고적, 산천, 각동(各洞), 시전(市廛) 등을 수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학자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
조선 후기 학자 유본예가 저술한 ‘한경지략’

궁궐의 역사와 전각 모습들

『한경지략』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궁궐과 전각, 각 관청에 관한 내용이다.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순으로 궁궐의 건립과 전각별 이름, 주요 기능, 현판 글씨를 쓴 사연 등을 밝히고 있다.

경복궁의 전각 이름과 배치의 설계자가 정도전(鄭道傳)이었다면 창덕궁과 창경궁은 성종의 명을 받은 서거정(徐居正)이 전각 이름 짓는 작업을 주도했음이 나타난다.

경복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부 관광방(觀光坊) 백악(白岳) 남쪽에 있다. 태조 3년(1394년) 궁성을 건설하고 네 문을 세웠는데, 동쪽은 건춘(建春), 남쪽은 광화(光化), 서쪽은 연추(延秋), 북쪽은 신무(神武)라 하였다.”

근정전에 대해서는 “조하(朝賀)를 받기 위한 정전”이라고 하면서, 성종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를 인용하여, “궁실이 제도는 중국과 같아 모두 단청을 칠하고 기와로 덮었다. 문은 삼중으로 되어 있다. … 궁전의 층계는 7단으로 차이가 엄격하고 고운 비단을 바른 여덞개의 창은 영롱하다.”고 경복궁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창덕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북부 광화방(廣化坊) 응봉(應鳳) 아래에 있다. 개국 초에 창건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병화로 불탄 것을 광해군 기유년(1609년)에 중건하였다. 일곱 개의 문을 세웠는데, 남문은 돈화문이라 하고, 이층 누각에 큰 북을 설치하였다. 매일 조정 및 인정(人定:밤 10시)에는 종을 쳤으며, 파루(罷漏:새벽 4시)에는 북을 쳤다.”
창덕궁 전각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창덕궁 전각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선정전(宣政殿)에 대해서는 “작은 규모의 편전(便殿:왕의 업무 공간)으로, 푸른색 유리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현재의 창덕궁 전각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창경궁(昌慶宮)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창덕궁의 동쪽이다. 수강궁(壽康宮: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거처한 궁)의 옛터이다. 계묘년(1483년)에 성종이 정희왕후, 인수왕대비(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의 왕비) 세 궁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창경궁이 성종 때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세운 궁궐임을 알 수 있다.

경희궁(慶熙宮)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다. 광해군 병진년(1608년)에 창건하였다. 영조 경진년(1760년)에 장릉(章陵:인조의 아버지 원종을 뜻함)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았으므로, 경희(慶熙)로 고쳤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과 병원, 대학교의 모습은?

각 관청에 관한 내용은 ‘궐내각사(闕內各司)’라는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왕이 거처했던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궐내각사를 기록하였는데, 창덕궁과 경희궁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앞을 차지하는 관청은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承政院)이다.

창덕궁의 승정원은 정전인 인정전 동쪽 연영문(延英門) 앞에 있었다. 왕명의 출납을 맡았으며, 이, 호, 예, 병, 형, 공 육방(六房)의 승지를 두었다. 누각은 육선루(六仙樓)라 하였다. 승정원에는 비서실장인 도승지를 비롯한 6명의 승지를 두었는데, 각각 정무, 경제, 국방, 법률 분야를 담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문인 금호문(金虎門) 밖에는 대루원(待漏院)이 있었는데, 승지들은 새벽에 이곳에 와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렸다. 왕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던 만큼 승정원의 관리들은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였다.

왕실의 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은 약방(藥房) 또는 내국(內局)이라고도 하였는데, 창덕궁에서는 예문관 서쪽에 있었다. 왕이 쓰는 의약을 맡았는데, 내의원의 책임자인 도제조와 제조는 5일마다 의관을 인솔하여 문안을 아뢰고, 옥체의 진료를 청하였다.

1761년(영조 37) 영조는 친히 내의원에 ‘입심억석(入審憶昔:들어가 자세히 살피며 옛날을 추억한다)’는 편액을 걸도록 하였으며, 정청 현판에는 인조 때 원진해(원진해(元振海, 1594~1651))가 쓴 ‘화제어약(和劑御藥:왕의 약을 조제함) 보호성궁(保護聖躬:왕이 몸을 보호함)’(*) 여덟자를 걸었다. 영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내의원에서 가장 진료를 많이 받은 사실이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나오는데, 철저한 건강 점검이 소식, 채식과 더불어 영조의 83세의 장수 비결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의 창덕궁 내의원에는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 여덟자의 편액이 걸려 있다.

궁궐 밖 관청을 소개한 ‘궐외각사(闕外各司)’ 항목 중에는 현재의 국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성균관에 관한 내용도 있다. 『한경지략』에는 “동부 숭교방(崇敎坊)에 있다. 태종 임오년(1402년)에 세웠다. 유생들을 교육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 소속으로 정록청(正錄廳)이 부속되어 있으며, 중·동·남·서 학당이 예속되어 있다.”고 하고 있다.

중·동·남·서 학당은 중부·동부·남부·서부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공립 중·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립중등학교는 서원(書院)이었다.

성균관에 관한 부분 중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유생들은 식사 때 도기(到記)라 하여, 아침과 저녁 식사 때 원점(圓點)을 찍었고 원점이 일정 숫자 이상이 되어야 과거 응시가 가능했다. 그만큼 당시에도 출석 점수를 중요시한 것이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어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고, 학생회장에 해당하는 장의(掌議) 2명을 두어 성균관 내의 여러 논의를 맡았다. 유생들은 의리(義理)에 관련한 사안이라면, 모두 식당에 가지 않았는데, 이것을 권당(捲堂)이라 하였다. 요즈음 학내 현안이나 정치적 사안 등으로 수업을 거부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인왕산 기슭의 수성동 계곡
인왕산 기슭의 수성동 계곡

200년 전 서울의 명승지

200년 전 서울의 대표 명승지는 어느 곳이었을까? 『한경지략』에서는 ‘명승(名勝)’ 항목에서 당시의 명승지를 소개하고 있다. 권율의 사위인 이항복이 거처했던 인왕산 아래의 필운대(弼雲臺), 북악 아래의 복사꽃이 만발했던 도화동(桃花洞), 송시열이 살았던 성균관 동쪽 기슭의 송동(松洞), 창의문 밖에 위치한 정자인 세검정, 인왕산 기슭의 수성동(水聲洞) 계곡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필운대에 대해서는 “도성 안 인왕산 아래에 있다. 오성 이항복이 젊은 시절 필운대 아래 도원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스스로 서운(西雲)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암벽에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성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 인가에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서 도성 사람들이 봄에 꽃구경을 하면 반드시 이곳을 찾았다.”고 하여 필운대가 꽃구경의 명소임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에도 배화여고 교사(校舍) 건물 뒤편 바위에 새겨진 ‘필운대’ 세 글자를 볼 수가 있다.

송동에 대해서는, “성균관 동쪽 기슭에 있다. 우암 송시열이 예전에 살았다. 암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증자와 주자처럼 절벽에 우뚝서다)’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선생의 글씨이다. 마을의 골이 깊고 그윽하며 또한 꽃나무가 많아 봄놀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기린교가 발견되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기린교가 발견되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라는 뜻의 수성동에 대해서는 “계곡이 깊고 그윽하며 자연경관이 뛰어나 여름에 유람하며 즐기기에 아주 좋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비해당(匪懈堂:안평대군의 별장)의 옛 집터라고 한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고 한다.” 수성동은 정선의 그림에도 표현되어 있는데,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된 후 계곡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기린교가 발견되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서촌을 찾는 사람들의 대표적 명소가 되었다.

서울의 동네명에 얽힌 사연들

서울의 동네 이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고려 때 이곳에 향교가 있어서 이름이 붙은 향교동, 왕실의 채소를 재배한 밭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내농포(內農圃), 성균관이 있어서 부르는 관동(官洞), 선혜청에서 유래한 창동(倉洞), 정승 상진(尙震)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 상동(尙同), 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저택이 있는 ‘소공주댁’에서 유래한 소공동(小公洞), 중국 사신을 맞이한 태평관에서 유래한 태평동, 원각사에서 유래한 대사동(大寺洞), 장흥고가 있어서 장흥동(長興洞), 주자소(鑄字所)에서 유래한 주자동(鑄字洞)도 있다.

도교(道敎)의 삼청동(三淸: 산·물·사람이 맑음)에서 유래한 삼청동(三淸洞), 동대문 밖 10리에 있었던 것에서 나온 왕십리 등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동네 이름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한경지략』은 기존의 인문지리서 저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후기의 궁궐과 관청, 명승지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당대의 기록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양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경지략』의 기록을 따라 200년 전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현장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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