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북촌은 없었다! 건축왕 정세권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1.19. 17:20

수정일 2025.11.21. 15:06

조회 2,940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이야기
일제강점기에 북촌, 익선동, 창신동 등지에 한옥이 대거 조성됐다.
일제강점기에 북촌, 익선동, 창신동 등지에 한옥이 대거 조성됐다.
  109화   일제강점기 한옥을 지킨 인물, 정세권

부동산에 대한 소유와 욕망은 전근대 시기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이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일제강점기 북촌을 비롯하여 익선동, 창신동 등지에 한옥들이 대거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근대 최초의 디벨로퍼(Developer)로 평가받는 정세권(鄭世權:1888~1965)이다.

정세권은 일제강점시기 한옥이 거의 소멸할 뻔했던 시기 대규모 한옥을 조성하여, 현재의 서울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한옥 단지 조성과정에서 생긴 이익을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나 조선어학회 후원으로 사용했고, 1920년대에 추진된 조선물산장려운동도 이끌어 나갔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근에 와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인물, 정세권의 삶과 활동을 살펴본다.
정세권은 일제강점시기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 조성 작업에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일제강점시기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 조성 작업에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누구인가?

정세권의 본관은 진주(晉州)로, 1888년 4월 10일 경상도 고성현 이운면 덕명리(현재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2세에는 진주 백일장에서는 장원을 하였다.

진주낙육고등사범학교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칠 만큼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고, 졸업 직후인 1905년 기자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1910년에 하이면 면장이 되었지만, 일제의 녹을 먹는 것에 회의를 느껴서인지 1912년에 사임하였다.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된 것은 1919년 22세가 되던 해에 고향 고성을 떠나 1919년 서울로 와서 계동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정세권은 당시 일본인들이 서울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남촌이나 충무로 지역의 거주 지역을 확대하여 종로나 북촌으로 진출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대책으로 조선인들을 위한 한옥 조성 작업에 뛰어들었다.

정세권의 모습은 근대의 문인 이광수(李光洙:1892~1950)가 정세권이 지어 준 주택 완성을 기념하여 쓴 ‘성조기’라는 글에 일부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은 정세권에 대한 인상과 외모, 그리고 그의 인격에 대한 존경 등을 드러내고 있다.

“나(이광수)는 그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려 3~4개월을 살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하며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다. … 조선식 가옥 개량을 위하여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 나는 더욱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2017, 위즈덤하우스)

정세권은 조선인들의 가옥을 지키는 작업에 착수했고, 1920년을 전후한 시기 ‘건양사(建陽社)’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하였다. 국내 최초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로 자청했지만, 조선인이 살 수 있는 거주지 조성이 가장 큰 목표였다.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 자본의 조선 유입이 용이해졌고, 이 과정에서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명동, 용산 일대 남촌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종로 일대까지 옮겨와 상업 활동을 확장했고 조선인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남촌으로부터 북촌으로 옮겨온 것도, 이곳에 일본인들이 진출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정세권은 삼청동, 북촌, 익선동 등지에 한옥 단지를 조성해 나갔다.
정세권은 삼청동, 북촌, 익선동 등지에 한옥 단지를 조성해 나갔다.
일제는 정책적 차원에서도 북촌 주변에 관사를 세우는 등 북촌 진출을 계획했고, 정세권은 이를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북촌, 익선동 등지에 한옥 단지를 조성해 나갔다. 정세권의 딸 정정식 님의 생전 증언에도 이렇게 남아 있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2017, 위즈덤하우스)

정세권은 가회동, 삼청동 등의 북촌 지역을 비롯하여 종로의 익선동과 동대문 밖의 혜화동, 창신동, 행당동, 휘경동 및 서대문과 왕십리 일대에도 대규모 한옥과 택지를 매입하고, 이를 분할하여 ‘조선집’이라 불린 근대 한옥을 대량 공급해 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경관과 자존심을 지킨 한옥 단지 조성

정세권은 당시 일본인들이 짓던 일본식 가옥이나 편리성으로 선호되던 서구식 문화주택 대신 이른바 조선집이라 불린 한옥을 집중적으로 조성했다. 그가 구상한 한옥은 과거 왕족과 사대부가가 쓰던 대규모 한옥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규모가 작은 서민형 한옥이었다.

한옥의 규모는 줄었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설을 갖추었다. 수도, 전기가 들어오고, 환기, 일조권까지 갖춘 근대식 개량 한옥으로 발전시켜 입주민들의 호감을 크게 얻었다.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한옥 단지에 반영하였다.
정세권은 화장실을 내부로 들여놓는 등 근대적 방식의 한옥을 조성했다.
정세권은 화장실을 내부로 들여놓는 등 근대적 방식의 한옥을 조성했다.
6인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을 배치하고, 내부 공간을 남향으로 두었다. 위생적인 화장실을 주택 내부로 들여놓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근대적 방식의 한옥 조성은 북촌, 익선동 등 정세권이 조성한 대규모 한옥 단지의 표준 모델이 되었다.

주택 분양 과정에서 또한 주목되는 것은 서민들을 위해 한옥 구매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대금을 나누어 받은 것이었다. 한옥을 분양한 후 대금을 일시불이 아닌 입주 후 월 단위 또는 연 단위로 나누어 받는 정책을 적용해 주택 구입 부담을 낮추었고, 이것은 서민들 내 집 마련의 진입 장벽을 확실하게 낮춘 조치였다.

현재 서울의 가장 전형적인 한옥이 많이 남아 있는 가회동, 계동, 안국동, 삼청동 등 북촌 지역 이외에, 종로3가역 주변의 익선동 지역도 최근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옥 단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여러 한옥을 카페와 맛집, 기념품숍 등으로 활용한 덕분에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익선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 이곳에 살았던 집 ‘누동궁(樓洞宮)’에서 유래했다. 철종은 왕이 된 후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에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짓고, 형인 영평군 이경응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누동궁의 시작이다.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였기에 ‘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동궁은 특히 대문 좌우에 있는 행랑인 익랑(翼廊)이 발달하여, 이 지역은 ‘익랑골’이나, ‘익랑동’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동명을 정할 때, 익랑동의 ‘익’과 이곳이 소속된 ‘정선방(貞善坊)’의 ‘선’자를 합하여 ‘익선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익선동은 날개 ‘익(翼)’ 자 대신에 더할 ‘익(益)’ 자를 쓴다.

정세권은 1920년대 후반 거의 방치가 되었던 누동궁 주변 익선동 일대의 대지를 사들였고, 1935년 이곳에 수십 채의 한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도시재생 사업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1929년 신문에 실린 한옥 지역들은 관철동, 낙원동, 관훈동, 소격동, 봉익동, 재동, 창신동, 사간동, 수송동, 체부동, 안국동, 익선동, 계동 일대였다. 이 중에는 한두 채 지은 곳도 있으나, 10채부터 45채에 이르는 대단위 개발지들이 존재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1929년 한 해 동안 170여 채의 한옥을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2017, 위즈덤하우스)
북촌한옥마을에 자리한 조선어학회 터
북촌한옥마을에 자리한 조선어학회 터

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를 지원한 독립운동가

정세권은 한옥 단지 조성과정에서 형성된 재산들을 1920년대에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이나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 지원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 정세권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 자립운동이었다. 1923년 1월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 강당에서 50여 명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 사람 조선 것’,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을 구호로 내세웠으며 일본 등 타국의 물건 대신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었다.

정세권은 자신의 건물에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과 전시관(상점)을 개설하면서 이 운동의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매일신보』 1931년 4월 22일의 기사에서는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20일 오후 4시 반에 낙원동 30번지에서 회관 신축기공식을 개최하였는데 동회 이사장 이종린 씨의 식사와 정세권 씨의 설계 보고가 있었다.”라고 하여, 물산장려회관의 기공식을 보도하고 있다.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와 조선어학회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7년 이상재, 안재홍 등 민족주의 계열과 홍명희, 허헌 등 사회주의 계열이 당파를 초월하여 조직한 단체로, ‘기회주의를 일제 부인한다.’라는 강령으로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을 목표로 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의 말과 글의 연구 정리 및 통일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민간 학술단체로, 주시경을 계승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어연구회가 재편된 단체였다.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활동에 다양한 재정 지원을 하였다.

종로구 화동 129번지에 학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조선기념도서출판관 5인 이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며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선어학회 건물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정세권은 화동 129번지 대지를 매입해, 2층의 양옥 건물을 완성해 1935년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현재 종로구 북촌 정독도서관 아래쪽,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 인근에 조선어학회 건물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한글을 모아 큰사전을 편찬하려 한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일제가 탄압한 사건을 다룬 영화였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꾀했다는 이유로 33명의 조선어학회원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를 해산시켰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왕성한 개발 활동을 한 건양사의 주택 개발은 1940년 이후 소강상태에 빠진다. 막내딸 정남식의 기억에 의하면, 총독부가 지속해서 일식 주택을 지을 것을 압박했으나, 정세권은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고 하고 주택 사업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북촌을 비롯한 서울의 주요 한옥 단지가 조선시대부터 조성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1920년대에 정세권의 선구적인 노력으로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한옥 단지 덕분에 서울의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울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서울의 자존심을 지켜 준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기억하면서 이곳을 찾는 것도 의미가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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