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왜 청계천 조성에 진심이었나? 다시보는 청계천 역사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0.22. 17:56

수정일 2025.10.22. 15:06

조회 2,298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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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화   청계천 조성 역사와 청계천 다리 이야기

지난 10월 1일 서울시는 청계광장과 청계천 일대에서 ‘청계천 복원 2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청계광장에서 ‘청계천 복원 20주년 행사’ 기념식을 열고 지난 20년간 청계천이 가져온 도시 변화와 생태 회복 성과를 시민과 함께 기념하고 청계천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였다. 청계천의 역사는 620년 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 때인 1405년(태종 5) 서울의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해,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인 개천(開川)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된다.

태종, 처음으로 인공 하천을 뚫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인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무엇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동쪽으로는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북쪽 북악산에 둘러싸인 형태로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전기 태종 때 처음으로 도성의 중심을 관통하는 개천(開川) 조성 작업에 착수했다.

충청도와 강원도의 정부(丁夫) 600명을 한성부에 소속시켜 개천을 파는 일을 맡겼다. 1412년(태종 12) 2월에는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개천 조성 작업에 나섰다. 삼남 지방의 역군(役軍)을 동원하였고, 한 달여 만에 개천 공사를 완공하였다. 1412년 2월 15일의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천(河川)을 파는 역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어수로부터 종묘동(宗廟洞) 어구까지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구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고, 대소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 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

이 기록을 통해 장의동 어구에서 종묘동 어구, 수구문까지에 이르는 준천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대에 처음으로 실시한 청계천 공사의 완성은 청계천이 한양을 관통하는 하천으로 자리를 잡는 데 있어 초석이 되었다.
어전준천제명첩_수문상친림관역도, 영조 36년 청계천 준설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
영조 36년 청계천 준설을 기념하여 그린 기록화첩

영조 때 청계천 공사의 시작

조선후기에 이르러 청계천에 흙이 쌓여 도심의 하수 처리와 홍수 피해에 적절히 대응을 못하자, 영조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천 공사를 명하였다. 영조 때 공사의 첫 삽을 뜬 날은 1760년(영조 36) 2월 18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에는, “임금이 명광문(明光門)에 나아가 허급(許汲)과 원중회(元重會)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때 도성의 시내와 도랑이 여러 해째 막혀 있었으므로, 한성부 판윤(서울시장) 홍계희(洪啓禧),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준천할 논의를 극력 주장하여 2월 18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도청(都廳) 허급과 원중회가 서로 자리다툼을 하기 때문에 곤장을 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기록인 『승정원일기』의 2월 8일 기록에는 영조가 자원한 방민(坊民:서울의 각 방에 소속된 백성)의 수를 물었고, 홍봉한은 3만 9천여호 라고 답하였다. 2월 18일 기록에는 준천소(濬川所)에서 공사를 시작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진 장소인 영도교. 현재는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새롭게 조성됐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진 장소인 영도교. 현재는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새롭게 조성됐다.
준천공사는 흥인문 밖의 영도교(永渡橋) 아래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였다. ‘영도교’는 단종이 영월에 유배를 가면서 왕비인 정순왕후와 영원히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수문 밖까지 모두 5개의 구간으로 나누어서 시행했는데, 제1구간은 영도교에서 시작되었고, 마지막 제5구간인 수문에서 마무리되었다. 준천에서 사업의 효율을 높이는 것은 토사(土沙)의 운반이었다. 개천에서 나오는 모래를 말이 끌어내고 수레와 삼태기 같은 기구를 사용하여 운반하였는데, 먼저 태평교와 수표교 구간에서 시험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영조의 관심과 참여자 격려

1760년 2월 19일 영조는 선왕들의 어진을 봉안한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쌀 20석(石)과 감곽(甘藿:미역) 600근(斤)을 준천소에 내려 공사에 참여하는 인부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2월 20일에는 직접 수문에 와서 역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자 역부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추었다. 오늘날 국가의 최고책임자가 공사 현장을 찾는 모습과 유사하다.

영조는 청계천 공사나 능행과 같은 현장에서 만나는 백성들이 언제나 정성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 특히 청계천 공사에 자원한 역군들과 멀리 제주도에서 온 공인(貢人)들까지 참여한 데 대해 큰 의미를 두었다. 영조는 ‘오늘 자원해서 부역하는 역군 중에 제주도 사람 6명을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원래 지급하는 것 이외에 더 후하게 회량미(回糧米:고향에 돌아갈 때 필요한 양식)로 지급하라’고 하명하였다. 준천소에서는 갑주미(甲冑米:군량미)와 쌀 600여 석을 더 내어 부역하는 한성부 백성들에게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영조는 자신이 추진한 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에게 왕이 베풀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사하려고 하였다. 도청과 낭청에게는 활과 화살을, 제주도 공인들에게는 회량미를, 일반 백성들에게는 군량미를 내릴 정도였다.

또 ‘준천의 공사는 몇 백년 후에도 있게 될 것인데, 지금 그 일을 비로소 시작하고자 수문에 나와서 백성의 노고를 위로하니 어찌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이 청계천 준천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보였다. 이와 함께 ‘청계천 공사를 마친 후에야 나는 편안히 침소에 들 것이다.’고 할 정도로 준천 사업에 애정과 집념을 보였다.
청계천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
청계천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

청계천 다리의 기능 강화

공사 구간은 처음 다섯 개의 소(所)로 나누어 진행하다가 세 개의 소를 더 설치하여 진행하는 방식이 되었다. 청계천의 본류에 해당하는 대천(大川) 공사를 중심으로, 다시 개천의 상류지역과 지류(支流), 세류(細流), 분류(分流)를 나누어서 준설작업을 하였다.

일부 백성들이 개천가에 집을 지어 다리를 막고 개천을 막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을 모두 철거하여 물이 잘 흐르게 하였다. 경복궁 내에 밭을 많이 개간하여 개천 길이 막히자 왕이 궁을 지키는 관리들을 벌을 주라고 하명 하였고, 밭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또한 서쪽으로부터 오는 물이 금교와 서쪽 수구에 와서 모두 막히자, 막힌 다리를 파내어 물이 흐르게 하고 민가를 철거하여 물이 잘 흐르도록 했다.

궁궐 안을 흐르는 개천의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등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궁궐을 경유하여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만큼, 청계천 공사와 궁궐 개천의 흐름 조절이 함께 진행되었다.

먼저 경희궁과 경복궁 금천의 물이 잘 흐르도록 개축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준설하였다. 당시 궁궐에서 청계천으로 들어가는 물길에는 많은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병조참지 홍낙성이 이를 관리·감독하였다. 청계천 공사 완성 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한 책 『준천사실(濬川事實)』에는. “백 개의 시냇물과 천 개의 개천물이 시원하게 흘러 모두 영도교로 흐르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준천 사업에서는 막힌 다리를 공사하는 일도 주요한 업무였다. “사토(沙土)가 개천을 막아 개천의 중심이나 연안이 모두 평평하여 크고 작은 다리도 10개 중 8~9개가 막혀, 1~2개의 작은 도랑으로 겨우 물길이 통하였다.”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영도교의 경우, 모두 18칸인데 남쪽 10여 칸은 흙이 쌓여 평평한 육지와 같이 되었고, 북쪽의 몇 칸만이 작은 구멍이 있어 겨우 물이 흘렀다. 태평교는 14칸인데, 그 중 겨우 2칸만이 물이 통하게 되었다.

“수로가 막혔으므로 비가 조금만 와도 개천의 양쪽으로 물이 범람하였지만 준천 사업의 결과 개천의 깊이와 넓이가 예전과 같이 회복되어 다리 아래로 모든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이나, “수표교는 단지 수 척의 높이만 드러나 있었지만 지금은 한 장(丈:한 척의 10배)이 완연하게 석축과 함께 드러나 있다.”는 기록은 준천 사업의 성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간수문은 흥인지문 남쪽 성벽 아래에 만든 수문이다.
오간수문은 흥인지문 남쪽 성벽 아래에 만든 수문이다.
오간수문(五間水門)에 대한 공사도 추진되었다. 오간수문은 개천에서 모인 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흥인지문 남쪽 성벽 아래에 만든 수문이다. 다섯 개의 홍예, 곧 아치 모양의 구멍을 연결한 수구(水口)로 된 다리였다. 1907년 개천물을 잘 빠져나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과 오간수교는 허물어졌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 청계천 복원과 맞물려 오간수교가 복원되었지만, 오간수문은 오간수교 북측의 동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 형태로 설치됐다.

1760년 영조 때의 준천 사업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청계천의 본류에 놓여있던 다리는 송기교,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영풍교, 태평교, 영도교 등 아홉 개이며, 여기에 오간수문을 합하면 열 개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이 다리들은 1958년부터 1978년까지 광교에서 마장동 사이의 청계천이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덮이면서 모두 사라졌다. 청계천 복원 사업과 더불어 많은 다리들이 원래 위치에 복원되면서, 청계천의 옛 모습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시선을 사로잡은 오브라 아키텍츠 건축사무소의 ‘커넥천 파빌리온’
시선을 사로잡은 오브라 아키텍츠 건축사무소의 ‘커넥천 파빌리온’
청계천 복원 20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는 청계천 일대를 현대적 감각의 공공미술들로 새롭게 단장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와 건축가, 신진 작가들이 참여해 청계광장부터 광교구간까지 청계천 자연과 예술의 조화를 주제로 한 공공미술 작품을 볼 수가 있다. 청계광장에는 다슬기 모양의 조형물 ‘스프링’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건축팀 오브라 아키텍츠(OBRA Architects)의 목조 작품 ‘커넥천 파빌리온’이 설치되었다. 청계천 일대를 찾아, 그 역사를 음미하고, 복원 2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들을 만나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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