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으로 관광객 몰리는 이곳! 남산의 역사 속으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9.17. 16:58

수정일 2025.09.22. 15:47

조회 5,829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105화   서울 남산의 역사와 문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서울의 전체 모습이 조망되기 때문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중심에 산이 자리 잡은 모습은 외국인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강을 끼고 있는 대도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도심 한복판에 큰 산이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최근 서울시는 남산을 보다 쉽게 오르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N서울타워에서 명동 일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데크계단길 ‘북측숲길’을 조성했다. 새로 조성된 길을 이용하면 기존 1시간 걸리던 보행 시간이 20분으로 대폭 단축된다.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남산 N서울타워가 등장하면서, 남산은 더욱 외국인들이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수도가 된 후 지금까지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남산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북측순환로에서 남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숲길
북측순환로에서 남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숲길

조선시대 남산의 역사

1394년 10월 한양 천도를 단행한 태조 이성계는, 같은 해 12월에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알리는 고유문을 발표하였다.

고유문에서는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대천으로 경내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고 하여 목멱산의 신령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남산은 목멱산이라고도 하였는데, 통일신라 때의 풍수지리가인 승려 도선(道詵)의 『도선기』가 고려 문종 때 주목받았다. “개국 후 160여 년 뒤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구절 때문으로, 목멱양이란 목멱산 아래 땅이란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산보다는 목멱이라는 기록이 자주 보이며, 비가 오지 않을 때 지내는 기우제를 백악과 목멱에서 거행했다는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중국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의 남쪽 산이 종남산임)’으로도 불렸으며, ‘경사를 이끌거나 베푼다’는 뜻으로, ‘인경산(引慶山)’ 또는 ‘열경산(列慶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의 기록에는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한성부, 산천 항목에는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 설마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과 동현(東峴)에 이른다.”고 전한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또한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남은(南誾)과 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 정(釘)은 정(鄭) 음이 같으니 도전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여 세간에 전해오던 말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는 남산이다.

남산을 예찬한 기록과 그림들

서울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던 만큼 남산은 조선시대 왕에게도 깊은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 세종이 1432년(세종 19) 9월 19일 공조참판 신장(申檣)에게 명하여 ‘헌남산(獻南山)’의 곡(曲)을 지어서 관습도감(慣習都監)에 내리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장은 신숙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곡은『세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화악(華嶽:중국 오악의 하나로 북악산을 가리킴)이 높이 하늘과 가지런하고 해동을 지키게 하셔서, 상운(祥雲)과 서기(瑞氣)가 왕성하여 양궁(兩宮)에 접해 있습니다. 높은 성덕은 광대하여 명칭하기 어려우며, 만백성에게 아버지처럼 대하여 태평을 이루었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공손히 남산수(南山壽)를 드리니, 양궁께서 만년까지 계시어 백성의 부모가 되소서. 하늘은 밝고 땅은 편안하여 운수가 형통합니다. … 원컨대 양궁께서 수(壽)가 기한이 없어 천추만세에 승평(昇平)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여, 남산의 정기를 받아 왕과 왕비가 장수와 태평을 누리게 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남산은 ‘목멱상화(木覓賞花:남산의 꽃구경)’가 한성십영(漢城十詠)에 들어갈 정도로 꽃구경의 명소였으며, 뛰어난 풍광만큼 시인이나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 때의 학자 강희맹(姜希孟)과 성임(成任) 등은 시로써 남산을 찬미하였다.
종남산 푸른 기운 구름 위에 높아서
24개의 다리를 다 내려 볼 수가 있네
앵두꽃이 한창 좋고 궁궐은 깊은데
옥술잔에 포두주 붓는 모임 생각이 나네
강희맹
남산 겹겹 구름 속에 높고
꼭대기에 올라가니 긴 무지개다리 걸려있네
올라가 놀며 바라보니 흥이 끝이 없구나
푸른 술이 잘 발효되어 포두주가 농익었네
성임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은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을 남겼다.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기로 약속한 벗 이병연(李秉淵)이 보내온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남산의 봉우리 중턱에 해가 반쯤 솟아오르면서 붉은빛이 동쪽 하늘에 가득하고, 노을빛이 한강에 반사가 되는 모습이다. 남산의 봉우리가 두 개인 것도 선명하게 나타나며, 우측 하단에는 어부들이 고깃배를 몰고 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정선을 후원한 학자 18세기의 김창흡(金昌翕)은 잠실에서 남산을 보면서 시를 남겼는데, 그의 문집인 『삼연집(三淵集)』 「반계십육경(盤溪十六景)」 중 ‘목멱송림(木覓松林)’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짙푸르게 눈에 들어오네, 저 먼 소나무 숲
소 등을 탄 누에머리가 만산에 그늘을 덮었네
어찌하면 저 푸른 기운 잘 키워서
천년토록 베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김창흡 
이 시는 남산의 푸른 소나무 숲이 훼손되는 일 없이 오래도록 지켜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바람서리 불변함을 우리 기상일세”/라는 애국가 2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남산 봉수대
남산 봉수대

남산과 봉수대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되는 데에는 도시의 외곽을 둘러싼 네 산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서울을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은 전통시대에는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 서울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조선시대 남산은 군사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흔적은 현재 N서울타워 앞에 복원되어 있는 봉수대(烽燧臺)에서 찾을 수 있다. 봉수대는 ‘봉화를 피우는 대’라는 뜻으로 군사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전국 곳곳에 배치가 되어 있는 봉수대를 통해 왕이 있는 서울까지 신호가 전달됐다. 봉수 제도는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다섯 개의 대를 설치하였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 근처에 나타나면 3개,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화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전국에 설치된 봉수 시스템은 크게 5곳으로 전해졌다. 1봉수는 함경도에서 강원도를 거쳐 아차산으로, 2봉수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 천림산으로, 3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황해도를 거쳐, 서울의 무악(毋岳) 동봉으로, 4봉수는 평안도 의주에서 황해도 해안을 거쳐 서울의 무악 서봉, 5봉수는 전라도에서 충청도와 양천 개화산 거쳐 남산에 도착하였다. 조선 전역의 국경 지역에서 봉화가 올라오면 최종적으로 서울의 무악과 남산에서 받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현재의 남산 봉수대는 원래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정조 시대에 건설된 수원 화성에도 봉수시설을 설치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봉돈(烽墩)이 바로 그것이다.

남산에 살았던 인물들

조선시대 남산 기슭에는 명문가들의 집도 다수 자리를 잡았음은 『동국여지비고』 ‘제택(第宅)’ 항목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병조판서 등을 지냈던 조말생(趙末生:1370~1447)의 집은 명례방(현재의 회현동 부근)에 있었는데, 무학대사가 자리를 잡은 명당이었다. 남산의 바른 줄기가 바로 낙동(駱洞)에 닿았기 때문에 복귀형(伏龜形)이라 칭해졌으며, 낙양명원(洛陽名園)으로 불렸다.

세조 때의 공신으로, 한명회(韓明澮)를 수양대군에게 추천하기도 했던 권람(權擥)은 남산 동쪽에 살았다. “권람의 집이 목멱산 비서감(秘書監) 동쪽에 있는데 곧 무학대사가 정해준 암석 위의 집터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으며, 그 서쪽 언덕에 석천(石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어정(御井)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집은 낙선방(樂善坊) 생민동(生民洞;충무로 4가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 있던 반송(盤松)은 그의 충절을 기억하기 위하여 ‘육신송(六臣松)’이라고 불렸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의 집은 숭례문 안에 있었는데, ‘상정승동(尙政丞洞)’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동래 정씨들은 회현동(우리은행 본점 근처)에서 대대로 살아오면서 여러 명의 정승을 배출하였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정유길(鄭惟吉), 정창연(鄭昌衍), 정태화(鄭太和)와 정치화(鄭致和) 형제, 정재숭(鄭載嵩), 정원용(鄭元容) 등 12명의 정승과 함께 다수의 판서를 배출했다. 회현동은 호현동(好賢洞)이라고도 하였는데, 동래 정씨 현자들이 배출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현동의 동래 정씨들은 ‘회동(會洞) 정씨’라고도 했다.
조선후기의 학자 고산 윤선도의 집은 명례방 종현에 있었다.
조선후기의 학자 고산 윤선도의 집은 명례방 종현에 있었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정광필의 집은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은행나무가 있는데, 신인(神人)이 서대(犀帶:정1품, 종1품관이 착용한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동리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회현동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산한옥마을 입구 충무로역 1번 출구 앞 인도에는 ‘류성룡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어서, 류성룡(柳成龍)이 남산 인근에서 거처했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천거하였는데, 이순신과 이웃하여 살아 그 능력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남산과 가까운 건천동(현재의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조선후기의 학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집은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었다. 윤선도는 8세 때 명례방 종현에 살았던 숙부의 양자가 된 이후로는 계속 이곳에서 살았다. 현재 명동성당 바로 맞은 편에는 ‘윤선도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숙종 대 정치인 김석주(金錫冑)는 회현동 남산 기슭에 직접 집을 지었다. “(김석주의) 얼굴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 (중략)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있는데,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 김석주의 초상화를 보면 우락부락한 모습이다.

남산에는 N서울타워, 남산팔각정, 남산봉수대, 남산한옥마을, 남산 둘레길, 남산공원 예장지구, 호현지구, 한남지구 등이 조성되어 있다.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소파 방정환, 유관순 열사의 동상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길의 개통과 케데헌의 흥행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남산을 찾아 이곳의 역사와 인물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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