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의 서울살이는 어땠을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9.03. 15:55

수정일 2025.09.03. 17:31

조회 3,794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엽서
파고다공원 원각사지10층석탑 엽서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4) 연암 박지원의 서울살이

지난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4박 5일간 서울의 5대 궁궐과 종묘에서 해설 활동을 하는 궁궐길라잡이 선생님들과 산해관, 북경, 열하, 심양 지역을 답사하였다. 지금부터 245년 전인 1780년 여름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쓴 기행문인 『열하일기』의 여정을 따라가 본 답사였다. 박지원서울에서 태어났고 정조 시대 북촌과 파고다공원 일대를 무대로 북학(北學)의 수용을 적극 주장한 학자였다.

『열하일기』를 쓰기까지

『열하일기』는 조선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이 1780년(정조 4) 청나라를 다녀온 후 쓴 기행문으로 1783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고희연을 맞아 사신단의 일원인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신분으로 청나라에 들어갔다가 견문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박지원 일행은 연경에 들어갔는데, 당시 건륭제가 승덕(承德:청더)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머물고 있어서 열하까지 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목이 『열하일기』가 되었다.

박지원은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넘었다. 8월 1일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열하로 향해 8월 9일 도착하였다. 8월 14일 박지원 일행은 다시 연경으로 향했고, 10월 27일 마침내 5개월이나 걸린 긴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박지원이 열하까지 간 여정을 대략 살펴보면 압록강에서 연경까지 약 2천3백여 리, 연경에서 열하까지 7백 리로, 육로 3천 리의 긴 여행이었다. 주요 여정은 한양 → 박천 → 의주 → 요양 → 성경(심양) → 거류하 → 소흑산 → 북진 → 고령역 → 산해관 → 풍윤 → 옥전 → 계주 → 연경(북경) → 밀운성 → 고북구 → 열하 등이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여행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 모험을 즐기며 가는 곳마다 세심하게 여행을 기록했다. 꼼꼼하고 치밀한 기록 정신은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완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열하는 강희제 이후 중국 역대 황제들의 별궁으로 활용되었으며, 여름철 최고 기온이 24도를 넘지 않는 시원한 곳이었다. 그러나 열하로 가는 길은 험준한 지세에다 청나라의 행사 참석 재촉이 이어지면서 사신 일행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하였다. 상황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度河記)」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열하는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박지원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서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라고 한 후에, “강희제 시대부터는 언제나 여름철이 되면 황제는 이곳에 머물며 피서지로 삼았다. 거처하는 궁전은 화려하지 않고 이름도 ‘피서산장’이라 하여 황제는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을 삼고 산수를 흥취로 여겨 세상 밖에서 한낱 평민의 생활에 취미를 둔 듯했지만 그 실상인즉,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골의 인후(咽喉)를 누르고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천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열하는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연경보다 더 했는데, 박지원은 이곳에서 청나라의 대표 학자들을 만난 것은 물론이고, 몽고, 위구르, 티베트, 서양 등 이국문명을 접하면서 상당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기행문을 넘어 세계 문명과의 접촉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큰 책이다.
원각사지10층석탑(국보 제2호)
원각사지10층석탑(국보 제2호)

서울사람 박지원과 활동 공간

박지원의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 열상외사(洌上外史),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부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필균(弼均)이며 부친은 사유(師愈)이다. 한양의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 한양은 동·서·남·북·중부의 5부와 오늘날의 구에 해당하는 47방(坊) 체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지원이 태어난 서부에는 인달방, 적선방, 여경방, 황화방, 양생방, 반석방, 신화방, 반송방, 용산방, 서강방 등 10개의 방이 있었다. 반송방이라는 이름은 모화관 근처에 그늘이 수십 보에 이르는 반송(盤松)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으며, 현재의 서대문 밖과 독립문 일대를 포함한다. 조선시대 반송방에는 경기도를 관할하는 경기감영과 말을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 등이 있었다. 야동은 풀무간(대장간)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현재 서소문 바깥 중구 순화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박지원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조부에게서 양육되었다. 1770년 과거에 응시하여 1차 시험에서는 장원을 했으나, 2차 시험에서는 백지를 제출하여 낙방하였다.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 따르면, 박지원은 “큰 키에 살이 쪄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다. 안색은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불거져 나오고 눈은 쌍꺼풀이 져 있는” 모습이었다. 박지원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강건하여 늘 쉽게 타협하지 못하였다.

박지원 자신도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니, 바로잡고자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다”고 단점을 인정하였다. 비판과 풍자로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심적 고통을 크게 겪었던 고뇌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박지원의 실제 모습은 손자 박주수(朴珠壽)가 그린 초상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체격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면서 강한 인상을 준다.
박지원은 1767년 산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의 별장에 세들어 살다가, 1768년 현재의 파고다 공원 인근인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했다. 이어 1772년에는 백탑의 서쪽 전의감동(典醫監洞)의 집에서 살았다.(이하 박지원의 서울 거처에 대해서는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4책』 (2006, 휴머니스트)를 주로 참조하였다.) 백탑은 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국보 제2호)을 말하는데, 조선시대 한양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다.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는 사라졌지만, 십층석탑만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리서 보면 탑이 하얗게 보여 백탑이라 불렸고, 현재도 이곳을 탑골공원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었다.

백탑 근처에 살던 시기 박지원은 당대의 학자들인 홍대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면서 북학파의 리더가 되었다. 정조 초반 홍국영(洪國榮)이 권력을 잡자 노론 벽파에 속했던 집안이 어려워지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하였다. 그의 호 연암은 이곳에서 유래한 것이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며 관직에 진출한 박지원은 한성부 판관, 의금부 도사, 의릉(懿陵: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 령(令) 등의 직책으로 서울 근무를 할 때는 종제 박수원(朴綬源)이 지방으로 가게 되면서 비워둔 계산동(桂山洞) 집에 거처하였다.
제생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제생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현재 현대그룹 본사와 중앙고등학교 일대에 위치했던 계산동은 제생동(濟生洞), 계동(桂洞)으로도 불렸다. 제생동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있던 것에서 유래하며, 제생동과 비슷한 계생동으로 불리다가, 계생동의 발음에 기생이 연상된다고 하여, 계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계동에 살던 시기 박지원은 근처의 과수원을 매입하고 흙벽돌을 사용하여 서쪽에 다락을 얹은 집 총계서숙(叢桂書塾)을 짓고 생활하였다고 한다.(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2008, 창비)』, 1805년 10월 박지원이 생을 마감한 곳도 계동 집이었다.

서울살이 이후 박지원은 경상도 안의(安義) 현감, 충청도 면천(沔川) 군수, 강원도 양양(襄陽) 부사 등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안의(현재 함양군 안의면), 면천(현재 당진시 면천면)에는 그가 거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의 현감 시절 박지원은 북경에서 손수 그려 온 물레방아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 소재한 안의초등학교에는 1968년에 세운 ‘연암박지원 사적비’가 있다. 당진시 면천면에서는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 골정지(骨井池)를 수축하고, 이곳에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초가 정자를 세운 흔적을 볼 수가 있다.

1800년 9월 박지원은 양양 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는데,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아버지의 일생과 저술 등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는 한양에 올라가 관리들과 임지의 녹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보인다. 박지원은 “양양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에서 1만냥을 받았고 녹봉으로 2천냥을 받았다.”고 하면서, 당시에도 설악산과 동해의 풍광이 뛰어났음을 찬양하였다.
헌법재판소 안에는 조선후기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백송이 남아 있다.
헌법재판소 안에는 조선후기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백송이 남아 있다.

손자 박규수의 집터에 남은 백송

박지원의 본가는 재동에 있었고, 이 집은 손자인 박규수(朴珪壽,1807~1877)에게 이어졌다. 현재 서울 북촌의 계동 헌법재판소 안에는 조선후기에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백송(白松)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박규수의 집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그린 지도를 보면, 재동은 ‘재 회(灰)’자를 써서 횟골로 표기되어 있다.

횟골(또는 잿골)의 유래는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관련이 있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를 바탕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은 대거 처형되었고, 이들이 흘린 피가 냇가를 이루며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사람들이 나무 등을 불태우고 남은 재(灰)를 모아 뿌렸다. 온 동네에 재가 가득하게 되어 ‘잿골’의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법 관련 전문 서적이 많이 구비되어 있는 헌법재판소 도서관
법 관련 전문 서적이 많이 구비되어 있는 헌법재판소 도서관
헌법재판소 북쪽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재동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박규수의 집터에는 1885년 서양인 선교사 알렌이 세운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이 자리를 잡았다가, 1년 후에 구리개(을지로 입구)로 위치를 옮겼다. 이곳에는 1923년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다가, 1945년 10월 중구 정동으로 이전하였다. 이 자리에는 1949년 중구 신당동에 있던 창덕여중과 창덕여고가 자리를 잡았는데, 창덕여중은 1973년 2월 중구 정동으로, 창덕여고는 1989년 2월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했다. 창덕여중 앞에는 근대 시기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이 이 일대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1988년에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을지로에 있다가 1993년부터 재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박지원과 박규수가 살았던 곳에는 병원, 학교에 이어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박규수 선생 집터
박규수 선생 집터
박규수는 근대 시기 개화파의 멘토로 활약했다. 근대의 문학가 이광수가 개화파 박영효를 면담한 후 쓴 글에는 “당시의 신사상(新思想)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채에서 나왔소. 나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내 백형(박영교)은 재동 환재(박규수) 대감 집에 모이곤 했소. 우리는 『연암집』에서 양반 귀족들을 공격하는 연암의 글로부터 평등사상을 배웠소."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처럼 박지원의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는 데는 박규수의 역할이 컸다.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박제가의 사상은 김정희에게 계승되었고, 김정희의 학문은 박규수, 오경석, 강위 등 초기 개화사상가들에게 이어졌다. 박규수는 북촌 재동의 사랑채에서 인근에 살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 청년들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박지원의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접목되는 부분은 전통사상의 자생적 근대화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파고다 공원 일대와 북촌에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수용했던 북학파 리더 박지원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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