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강술래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역사 속 추석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10.01. 15:52

수정일 2025.10.01. 17:52

조회 2,561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추석 귀성객들
추석 귀성객들
  106화   추석의 유래와 추석 이야기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예전보다는 축소 됐지만 귀성 행렬이 꼬리를 물고가는 모습은 추석을 대표하는 풍속도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은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추석의 유래와 역사 속 추석의 모습들을 살펴본다.

역사 기록 속 추석의 유래

추석은 한가위라고도 하는데, 가위는 ‘가배(嘉俳)’의 이두식 표현에서 나왔다. 가배는 순우리말로 그 옛 어형은 ‘가배’였고, ‘가운뎃날’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 중추절(仲秋節) 또는 추석(秋夕)이라고 한다. 중추절의 중(仲)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같은 뜻으로 가을의 한가운데 있는 명절이라는 의미이다.

추석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풍습을 기록한 자료들이 있다. 『수서(隨書)』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는 “8월 15일이면 왕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쏘게 하여 잘 쏜 자에게는 상으로 말이나 포목을 준다.”라고 했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신라조에도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면 서로 하례하는 예식을 여는데 왕이 잔치를 베풀고 또 해와 달의 신에게 절을 한다. 팔월 보름이면 풍류를 베풀고 관리들을 시켜 활을 쏜 자에게는 상으로 포목을 준다.”라고 하였으며, “신라인들은 산신(山神)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며 8월 보름날이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이 모여서 활을 잘 쏜다.”라 하고 있다.

우리 문헌에는 고려중기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이사금 9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왕이 육부(六部)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편을 짜고, 7월 16일부터 날마다 육부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했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게 하고 8월 보름에 이르러 그 공(功)의 다소를 살폈다. 지는 편은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으니 이를 가배라 한다. 이때 진 편의 여성들이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 하였는데 그 소리가 구슬프면서 아름다웠으므로 뒷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연으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
그동안 농사가 잘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와 이듬해의 풍년을 바라는 마음도 담고 있다.
그동안 농사가 잘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와 이듬해의 풍년을 바라는 마음도 담고 있다.
추석은 전통시대 농업 중심 사회에서, 수확기가 시작되는 시기의 보름 명절이었기에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그동안 농사가 잘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와 이듬해의 풍년을 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어찌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으랴는 뜻을 담고 있다. 땀 흘린 보람 앞에 천지신명과 조상께 감사하고 멀리 있는 가족이 하나가 되는 명절이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친척들과 함께 추석을 맞이하는 것이다.

추석 차례와 먹거리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시대 왕들이 추석에 종묘와 선왕의 능을 찾아 제사를 지내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궁궐에서는 각지에서 올라온 음식을 만들고 햅쌀로 술을 빚어 문무백관들에게 내렸는데, 규모는 그해의 농사가 풍년이었는지 흉년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왕은 선왕들의 능을 찾아 추석 제사를 지냈다.

『단종실록』에는 단종이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과 문종의 무덤인 현릉(顯陵)에 추석제(秋夕祭)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정조실록』에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 능(陵)·묘(廟)·원(園)·궁(宮)의 추석 제사에 쓸 향(香)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음이 나타난다.

추석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은 차례, 송편, 성묘와 같은 단어들이다. 차례(茶禮)는 원래 차를 올리는 예에서 비롯되었지만, 추석 차례는 조상에게 수확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음식을 올리는 천신례(薦新禮)의 성격이 강해졌다. 추석 아침, 조상에게 차례를 지낼 때는 설날과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올렸다.
송편이란 이름은 송편을 찔 때 켜마다 솔잎을 깔기 때문에 붙여졌다.
송편이란 이름은 송편을 찔 때 켜마다 솔잎을 깔기 때문에 붙여졌다.
송편은 쌀가루를 익반죽하여 햇녹두, 청태콩, 동부, 깨, 밤, 대추, 고구마, 곶감, 계피가루 등을 소로 넣어 둥글게 빚는다. 송편이란 이름은 송편을 찔 때 켜마다 솔잎을 깔기 때문에 붙여졌다. 한가위 때 햅쌀로 빚은 송편은 각별히 ‘오려송편’이라고 하는데, 오려올벼를 뜻하는 말이다. 송편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을 넣는데 골라 먹는 재미도 좋다. 특히 요즈음에는 다양한 색깔의 송편이 나와 보기에도 더욱 좋다. 송편의 속 모두 햇것으로 했다.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저술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을 보면 “8월 15일을 우리나라 풍속에서 추석 또는 가배라고 한다. 가배는 신라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촌에서는 1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친다.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사람들은 닭고기, 막걸리 등으로 이웃끼리 어울려 배불리 먹고 흥겹게 논다.”고 하였다.

충청도 풍속에 16일은 “씨름판을 벌이고 술과 음식을 차려서 즐기고 먹는다.”고 한 후에, “덕집에서도 햅쌀로 송편을 만들고 또 청근(菁根:무우)과 남과(南瓜:호박)를 넣어서 시루떡(甑餠)을 만든다. 찹쌀가루를 쪄서 떡을 만들고 볶은 검은콩, 혹은 누런콩 가루나 참깨를 묻히는데, 이것을 인절미(引餠)이라고 한다.”고 하여, 충청도 지역에서는 특히 송편과 함께 시루떡, 인절미를 추석에 즐겼음을 알 수가 있다.

추석에 즐긴 놀이들

모두가 즐거운 날이었던 만큼 추석에는 다양한 놀이도 행해졌다. ‘소놀이’는 멍석을 쓰고 소 모양으로 가장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즐겁게 놀아주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년 기원 놀이이다. 소는 농부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을 하는 존재로서 생구(生口)라 할 정도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겼다. 소 대신 거북으로 가장하여 노는 ‘거북놀이’도 있었다. 거북은 십장생에도 등장하는 영물로서 수신(水神)과 농경신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이 놀이들은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성격을 지닌다.

추석에는 서당의 훈장들이 차례를 지내기 위해 집으로 가기 때문에 서당 학동들이 주도하는 가마싸움원님놀이가 있다. 추석 때 훈장이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서당을 비우면 놀이가 시작된다. 모처럼 글공부에서 해방된 학동들이 모여서 나무로 가마를 만들며 놀이를 만끽하는 것이다. 이긴 편의 서당에서 과거 급제자가 많이 나온다고 여겼다. 원님 놀이는 똑똑한 학동을 원님으로 뽑고 소송 등의 놀이를 통해 행정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강강술래를 즐기는 시민들
강강술래를 즐기는 시민들
보름달이 뜨면 그 환한 빛에 여인네들이 나와 동그랗게 돌며 노는 놀이인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가 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진다. 1597년 9월에 있었던 명량해전 승전의 현장인 해남군 전라우수영 일대를 중심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아낙네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수십 명씩을 무리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 함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대군이 산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강강수월래’가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말인 만큼 군사적 방어에서 유래한 놀이임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각 고을마다 놀이의 종류도 다양하다. 잘 알려진 놀이에는 기와밟기, 꼬리따기, 남생이놀이,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처고사리꺾기, 청어엮기 등이 있다. 강강수월래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변형되어 최근엔 강강술래로 표기하고 있다.

전쟁 중에 맞이한 오희문의 추석 이야기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쓴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에는 임진왜란 중에 추석을 보낸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다. 『쇄미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이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을 증언하는 3대 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것은『시경』의 ‘쇄혜미혜(瑣兮尾兮:누구보다 초라함이여) 유리지자(遊離之子: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난의 기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592년 8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산속에 머물며 바위 아래에서 잤다. 한밤에 큰비가 오기 시작해 밤새 그치지 않았다. 임시로 거처하는 장막에 비가 새어 쪼그려 앉은 채 아침을 맞았으니, 그 고생을 알 만하겠는가. 오늘은 추석인데 성 남쪽 산소에 차례 지내는 사람이 없으니, 상로(霜露)의 감회에 깊이 잠겨 애통함이 끝이 없다. 더구나 노모와 처자식은 지금 어디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있을까? 오늘을 생각하니 더욱 애통하구나.” 하여 피난 생활로 추석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현의 사람이 오늘이 명절이라며 이곳 사람들이 먹을 떡과 술, 고기, 과일 등을 많이 가져왔다.”는 기록에서는 간단히 음식을 맛보며 추석을 보낸 모습이 나타나 있다. 1593년 추석의 기록에는 “누이가 아버지의 신위 앞에 술, 과일, 떡과 구이, 탕을 갖추어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바로 추석이다. 일찍이 생원(아들 오윤해)으로 하여금 상경해서 광주 선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지냈는지 모르겠다.”고 하여, 선산을 찾지 못하고 피난지에서 누이와 함께 차례를 지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1594년 8월 15일의 “오늘은 추석이다. 술과 밥을 준비하여 조부모와 죽전 숙부의 제사를 지냈다. 나머지 먼 조상님들까지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추모하여 슬퍼하는 마음은 있지만 어찌하겠는가.”라는 일기에서도 피난지에서 추석 제사를 챙긴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추석 차례를 지내는 가족
추석 차례를 지내는 가족
1595년의 추석에는 “닭 2마리를 잡고 탕과 구이 및 술과 과일, 떡, 안주 등의 물품을 차려 신위에 제사를 지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술과 안주와 과일, 밥과 탕 등을 준비해 왔다.”고 하여 이웃과 함께 추석 음식을 주고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1596년의 추석에는 비가 오는 중에도 추석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날이 개기를 기다려 묘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늦도록 비가 그치지 않는다. 또 날이 갤 조짐이 없어 부득이 산에 올라가서 돗자리로 상석을 덮고 제수를 차렸다. 먼저 조부모에게 올리고 그다음은 아버지께 올린 뒤 죽전 숙부에게 올리는 순서로 상하 삼위의 진설을 끝내고 절을 올렸다. 삿갓을 쓰고 제례 행사를 혼자서 맡았는데, 옷이 모두 젖었다. 또한 기력이 다해 고달프다.”고 하여, 빗속에서도 조상 제사를 챙기고 있다. 이어서 “물린 제수로 계집종 마금과 덕노의 아비 덕수의 묘에 망제를 지내게 했다.”고 하여 집안 노비에 대한 배려가 드러난다.

1598년의 추석에는 “술, 떡, 과일, 포, 구이로 차례를 지낸 뒤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먹었다. 속절(추석)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차례를 지내고 남은 좁쌀떡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쇄미록』의 이러한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중에도 추석 제사를 챙겼던 오희문을 중심으로, 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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