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고 다정한 어른들이 만드는 다음세대라는 공간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5.01.10. 14:52

수정일 2025.01.10. 14:54

조회 137

지정우 건축가가 들려주는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공사를 앞두고 유치원 이웃들에게 쓴 아이들의 손편지 안내문과 유치원 홈페이지에 올라 보호자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EUS+건축 설계의 그 유치원의 놀이터.
공사를 앞두고 유치원 이웃들에게 쓴 아이들의 손편지 안내문과 유치원 홈페이지에 올라 보호자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EUS+건축 설계의 그 유치원의 놀이터.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37) 용기와 다정함이 깃든 다음세대 공간들

“졸업하는 아이들이 너무 아쉬워해요. 아이디어는 자기들이 냈는데 놀이터는 동생들이 쓴다고요. 그래서 오픈하우스를 열어서 졸업한 아이들도 초대하려고요. 그리고 유치원 인근의 이웃집들에게 아무래도 공사 중 불편함이 있을 수 있어서 원아들이 직접 그리고 써서 안내문을 작성해 나눠드렸어요.”

필자와 EUS+건축이 만3~5살 유치원 원아들과 지난 봄 디자인 워크숍을 하고, 설계를 완료했던 서울장충유치원 외부 놀이풍경 시공을 시작했다. 시공자, 건축가, 유치원 관계자가 모인 첫 현장 회의에 원장선생님은 동네 주민 분들에게 드리는 안내문을 보여주시며 위와 같이 이야기하셨다. 유치원 홈페이지에 우리가 설계한 조감도를 올렸던 보호자분들의 기대가 정말 크다고도 전해 주셨다. 동시에 건축가와 시공자에게 따뜻한 차와 함께 덕담으로 첫 현장 회의를 시작하셨다.

그 짧은 순간에 원아들, 보호자, 이웃들, 시공자, 설계자 모두를 포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신 것이었는데 이게 쉬워 보여도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배려와 어린이 공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자칫 딱딱하고 형식적일 수 있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시작하는 것 등이 포함된 것이라 상당한 내공이 숨어있는 것이다.

다음세대의 공간은 이런 어른들의 사려 깊음이 바탕이 돼야만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 현실에서 방법을 찾아가는 상상력과 용기, 그리고 만들어가는 주체들과 그 어린이들에 대한 다정함이 그 곳에 있다. 여기에 그런 용기와 다정함을 갖춘 몇몇 어른들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다음세대 공간을 만드는 어른들은 그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다정한 파트너로, 현실을 헤쳐 가는 데는 용기 있는 어른이어야 한다.
다음세대 공간을 만드는 어른들은 그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다정한 파트너로, 현실을 헤쳐 가는 데는 용기 있는 어른이어야 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

다음세대 공간을 만들면서 다양한 주체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있다. 흔하게 부르는 발주처 혹은 건축주, 용역사 혹은 설계사, 자문위원 혹은 교수 이렇게 위계가 명확한 구조로 만들어지는 공간은 일반적인 공간의 기능과 기술을 충실히 담는 것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데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다. 요구와 이행, 책임과 감사 속에 주도성은 사라지기 쉽다.

우리가 새로운 다음세대 공간을 만드는 데에 참여한 각 전문가들은 그 스스로 ‘주체’라고 부른다. 설계, 시공 외에도 예산, 기획, 콘텐츠, 마케팅 등 전문 영역이 있지만 마음을 열고 타 분야와 소통하며 다음세대 공간을 상상하고 실행시키기 위한 단계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에는 모두가 한 마음이다.

본 칼럼에서도 소개를 했던 트윈세대를 위한 도서관 ‘우주로 1216’을 조성하는 데는 정말 많은 주체들이 한 마음으로 함께했다. 그 중에서 콘텐츠를 고민하는 회사인 진저티프로젝트의 대표님은 다음세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매달 이어지는 월례 회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에요.”

지금의 환경을 만들어온 관습적인 결정, 제도, 소통, 관계 등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어렵고 부딪히는 것들이 많을 것이고 지치기 쉬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로운 중력을 만들어가는 것일 수도.
‘우주로 1216’에서 중력을 거슬러 활동하고 있는 트윈세대.
‘우주로 1216’에서 중력을 거슬러 활동하고 있는 트윈세대.
‘우주로 1216’을 함께 만든 수많은 제3의 어른들.
‘우주로 1216’을 함께 만든 수많은 제3의 어른들.

미래를 내다보는 배려

본 칼럼에도 소개한 횡성의 공근초등학교 ‘공각도서관’ 프로젝트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 학교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와 함께하는 프로젝트 이전에도 학생들과 자주적으로 가구를 바꾸고 교실 환경을 재구조화 해보는 등 ‘공간’을 학생들 성장에 중요한 대상으로 같이 시도를 하셨었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학생들의 주도적 문화를 잘 촉진하시고 건축가들과 제대로 협업하시는 정말 훌륭한 분이시다. 우리는 디자인을 하고 감리를 열심히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리적 한계와 강원 지역 시공사의 수준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선생님 덕분이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완공 이후까지 이 분과 나눈 이야기들 중 많은 울림의 순간들이 있었다. 주변의 몰이해를 설득하고 조정해 가며 자칫 나락으로 빠져버릴 수 있던 순간들도 결국 아이들을 위해서 자리를 잡게 하셨다. 먼지 풀풀 날리는, 한창 공사 중인 현장에 앉아서 완성될 모습을 상상하시며 건축가들에 가슴 벅참을 전해오시기도 했다.

강원도의 한 학교에서 학교 공간에 대한 공부를 하시며 학교를 설득해 예산을 신청하고 그에 적합한 설계자를 찾아 교육부에까지 찾아가서 소개를 요청하고 서울에 있는 우리를 초청해 학교를 소개하고 프로젝트를 맡아주길 진심으로 요청하신 이 분은 학생들이 우리의 설계로 변화된 학교를 ‘호텔학교’라고 부른다며 전해주기도 하셨다.

그렇게 변화된 학교 공간을 추후 건축가인 우리가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이라고 하는 국가 주최의 상에 출품해 상을 받게 됐다. 우리는 당연히 시상삭에서 수상을 (그 사이 그 학교의 교장은 다른 분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 프로젝트가 가능케 한 장본인인 이 분과 함께 수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연락을 드렸다.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 또한 담당 교사인 이 선생님이 수상을 하라고 하셨지만, 이 분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기회에 오히려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께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며 새 교장선생님께 그 영광을 넘겨드렸다. 더 큰 그림을 그리실 줄 아는 이 분을 통해 필자도 많이 배웠다.
공근초등학교 ‘공각도서관’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학생들
공근초등학교 ‘공각도서관’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학생들

청소년들의 마음뿐 아니라 건축가들의 마음도 챙기시는

코로나 시기 청소년들은 더욱 갈 곳이 없었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런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 대치동 학원가 한 복판에서 청소년심리지원센터 ‘사이쉼’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마음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 심리상담사 선생님들이 계셨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민간 심리센터가 아닌 보건소 소속의 선생님들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보건소와 구청 내부에도 수많은 설득의 작업이 필요했고, 이전에 없었던 이런 공간을 설계하는데 최적의 건축가를 찾는 노력까지 직접 하셨다. 그렇게 찾은 건축가들이 과연 설계를 맡아 줄 것인가, 형식적인 서류와 요청으로도 혹은 무조건 도와달라는 식으로도 성사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공간의 의미를 진심을 다해 설명하시는 것으로부터 건축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실 평생에 건축가라는 직업의 전문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당위성을 충분히 인식했더라도 외부 전문가인 모르던 건축가에게 연락을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심리상담 선생님들은 그런 용기를 가지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내부의 실행으로도 이어져 제도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고 완공 후 운영을 통해 지역 청소년들에게 안착하는 과정을 만들었다.

공간이 조성된 이후에는 보통 용역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해 건축가와 연락을 하는 일이 없는 것이 공공기관이다. 그러나 이곳의 선생님들은 주기적으로 사이쉼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건축가들에게 안부 차 전해오셨으며 건축가들도 관심의 끈을 계속 갖게 돼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그로 인해 해당 지자체의 가장 빛나는 성과로, 그리고 타 지자체에도 확산케 하는 동력도 이어지게 됐다. 개관식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단체장이나 의원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 있는 어른들은 바로 ‘이 분들’이다.
강남구 청소년 심리지원센터 ‘사이쉼’에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기관, 학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강남구 청소년 심리지원센터 ‘사이쉼’에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기관, 학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청소년들은 이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필자와 EUS+건축이 설계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리모델링 과정에서 중심에 서서 결정하신 센터장님의 주도성을 가진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에 한마디 한마디는 힘과 지혜가 있다. 현장에서 직접 어린이, 청소년을 비롯한 주민들과 생활하며 최고의 청소년 공간, 주민 공간을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공간이 새롭게 조성되는데 참여한 민관 모든 주체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시면서 동시에 주인공인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늘 진심이시다.

“청소년들은 이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 대상자가 아닌 주인으로 초대돼야 되는 게 미래 교육의 방향인데 여전히 우리가 청소년들을 프로그램과 서비스의 소비자로만 만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뭔가 비어있는 것 같지만 이 속에는 꽉꽉 무언가가 차 있거든요. 청소년들이 방과 후엔 달려오는 재미있는 놀이터이기도 하고요, 마을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청소년들 어린이들 어떻게 도울까 궁리하는 그런 기지이기도 해요.”

“어린이, 청소년들은 약자거든요. 이 약자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은 사람들 안에 씨앗처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라는 공간이 생겼을 때, 그 씨앗을 가진 주민들이 있을 거라는 저희 운영진들의 믿음이 있었고 그 분들을 찾아 나섰어요. 그리고 초대하고 연결시키는 일을 했어요. ‘어린이를 돕는 것이 마을의 문화를 바꾸는 거구나, 어린이 청소년이라는 우리 마을의 보편의 약자에 둘레 사람이 돼주겠다는 이웃들이 나 말고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걸 사람들이 많이 확인한 것 같아요.”

“우리가 만들어가는 미래라는 건 청소년들의 실제 삶이 담긴 마을 속에서 작지만 구체적인 성취의 경험이 쌓이게끔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센터들이 마을에서 청소년들이 작고 구체적인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에 방문한 미국 대학생들에게 센터장님이 센터를 소개하는 모습.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에 방문한 미국 대학생들에게 센터장님이 센터를 소개하는 모습.
필자와 EUS+건축이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리모델링을 설계하며 만든 모형을 청소년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역 어른들이 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
필자와 EUS+건축이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리모델링을 설계하며 만든 모형을 청소년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역 어른들이 보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
건축공간연구소 auri에서 필자와 의견을 교환해가며 편찬한 좋은 공공건축 ‘청소년의 꿈을 담은 사랑방’ 편.
건축공간연구소 auri에서 필자와 의견을 교환해가며 편찬한 좋은 공공건축 ‘청소년의 꿈을 담은 사랑방’ 편.
건축가에게 지어진 공간은 마치 애써서 키운 자식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잘 키운 자식 같은 공간이 많은 이모, 고모, 삼촌, 이웃 같은 어른들이 때때로 용돈도 쥐어 주고 격려해주는 것 같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다음세대와 함께 지은 공간들이 그래서 공공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렇게 칼럼에서 공간 설계의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 함께 했던 다양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결과가 아닌 그게 가능했던 과정과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는 다른 다음세대 공간들이 더 많이 생겨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음세대의 참여가 사회를 바꿔나가는 시대, 이 칼럼을 마지막으로 필자의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연재를 마친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