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의지가 모여 상징적 풍경으로…다음 세대의 랜드마크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4.12.13. 15:18

수정일 2024.12.16. 09:20

조회 1,892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36) 다음세대 상징적 풍경

산을 오르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쌓인 돌무더기들이 눈에 띈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하나둘씩 얹은 돌무더기는 수많은 사람 각자의 소원이나 바람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지형을 닮은 자연스러운 형태로 시간에 따라 나이 들어간다. 그러면서 일부 무너지면 또 다른 어떤 이들이 그 돌을 집어 올려놓으며 모습은 조금씩 변화해간다.
마치 등산로의 돌무더기처럼, 인왕산 등산길 초입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는 2008년에 설치된 서울시 공공미술 중 하나인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라는 시민참여 작품이 있다. 기획과 제작은 최연숙, 조임식, 신승수 작가.
마치 등산로의 돌무더기처럼, 인왕산 등산길 초입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는 2008년에 설치된 서울시 공공미술 중 하나인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라는 시민참여 작품이 있다. 기획과 제작은 최연숙, 조임식, 신승수 작가.
이렇게 여러 개의 돌이 자연 속에 펼쳐져 있으면 그냥 자연의 일부지만 거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가 더해져서 조금씩 쌓여 가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상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집합적 풍경(Collective Scape)’이라고도 부른다.

어린이·청소년 건축 워크숍에서도 한 가지 재료의 ‘반복’으로 집합적인 풍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개개인의 의지와 표현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협업을 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 같이, 이러한 돌무더기는 여럿이 함께 반복하며, 느리더라도 큰 변화를 보여주는 집합적인 풍경의 구축이다. ☞ [관련 칼럼] 반복 또 반복! 여럿이 모여 만들어내는 특별한 놀이풍경

집합적 표현으로의 돌담

이런 집합적 구축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조금 바뀌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처럼 가변성 또한 그 기본 속성이다. 서울의 한양도성 같은 전국의 성곽 또한 그런 성격을 담고 있는 풍경이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후 멸실되거나 더해지고, 추가되면서 패턴도 구축법도 조금씩 달라져도 전체의 성곽은 계속 이어지곤 한다.
서울성곽의 낙산공원 지역에서 보이는 여러 시대별 돌쌓기.
서울성곽의 낙산공원 지역에서 보이는 여러 시대별 돌쌓기.
경기도 연천의 ‘호로고루’. 고구려 시대의 임진강 옆 요새로 5세기와 7세기에 걸쳐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시차를 두고 협업을 한 결과의 풍경이 됐다.
경기도 연천의 ‘호로고루’. 고구려 시대의 임진강 옆 요새로 5세기와 7세기에 걸쳐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이 시차를 두고 협업을 한 결과의 풍경이 됐다.
제주도에는 돌담으로 둘러진 집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 제주에서 돌담을 전통방식으로 직접 쌓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쌓아볼 일이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쌓으며 그 아래 놓인 돌을 고려하고 각 돌의 형태적 특성을 생각해 위치를 잡아 올려놓는 구축 방식은 별다른 접착제가 없어도 서로 균형을 잡고, 자연스럽게 사이사이에 많은 틈을 갖고 있기에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고 수백 년을 이어간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됐다. 이렇게 쌓인 돌들을 보다 보면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형태보다는 그 하나하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 더 가치 있게 다가온다.
제주 아래 가파도에 쌓여있는 현무암 돌담.
제주 아래 가파도에 쌓여있는 현무암 돌담.

집합적 풍경의 메모리얼

이와는 반대로 아주 기막힌 형태를 가진 큰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면 그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와 비슷하게 개선문이나 에펠탑 같이 아주 거대한 하나의 구조물을 만들어 상징성을 부여해온 역사도 있다. 거대한 구조물은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회의 권위성이나 기술력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물을 이룬 하나하나 다른 마음이 숨결이 느껴지진 않는다.
911 테러 후 조성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거대한 수공간의 상징성과 함께 그 테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음각돼 있어서 꽃을 꽂아놓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911 테러 후 조성된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거대한 수공간의 상징성과 함께 그 테두리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음각돼 있어서 꽃을 꽂아놓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추모의 공간, 즉 메모리얼도 전통적으로 좌우대칭의 엄격함과 거대함을 속성으로 갖고 있었다. 피라미드나 우리의 왕릉도 그 크기에 비례해 많은 인원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닌 통치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형태와 크게로 랜드마크임을 표현하는 메모리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처럼 역사 속 전쟁이나 테러 같은 참사를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메모리얼은 돌무더기 같이 집합적인 풍경으로 랜드마크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로 발생한 많은 희생자들을 위한 메모리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테러가 직접 벌어진 장소 세 군데 중 가장 큰 희생을 낳은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 부지에 조성된 ‘그라운드 제로’다. 쌍둥이 타워였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진 큰 상징이 있기에 그 자리에 지하로 꺼진 두 개의 거대한 수공간을 조성하고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게 돼 있다.

건물 크기만큼 거대한 수공간이 주는 엄숙함과 압도감도 있지만, 여기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더 큰 추모는 그 테두리 금속을 뚫어새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어루만지고 작은 꽃을 꽂아놓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마치 거대한 산 아래의 돌무더기에 각자의 소원을 담은 돌을 하나 얹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미국 워싱턴 D.C.의 펜타곤 인근에 설치된 911 메모리얼. 벤치처럼 앉을 수 있는 형태의 작은 구조물이 희생자들의 숫자만큼 놓여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펜타곤 인근에 설치된 911 메모리얼. 벤치처럼 앉을 수 있는 형태의 작은 구조물이 희생자들의 숫자만큼 놓여 있다.
펜타곤 911 메모리얼은 각 희생자를 표현하는 벤치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을 수 있다. 하부에는 작은 수공간이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을 반사시킨다.
펜타곤 911 메모리얼은 각 희생자를 표현하는 벤치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을 수 있다. 하부에는 작은 수공간이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며 하늘을 반사시킨다.
911 테러 중 미국 국방성 빌딩인 펜타곤에 비행기가 충돌해 많은 희생자를 낸 ‘펜타곤 메모리얼’은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와는 다르게 거대하거나 랜드마크를 추구하지 않는다.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새겨진 날렵한 벤치가 충돌한 비행기의 방향과 펜타곤을 향해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땅을 절개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같은 벤치는 마치 비행기나 새 같기도 하며 남은 땅에는 작은 수공간이 담겨서 하늘을 반사시키고 있다.
펜타곤 메모리얼인 각 벤치형 구조물 위에는 꽃이나 각자의 기억을 담은 물건들이 놓이곤 한다. 아기 희생자의 것에는 장난감이 놓이기도 한다.
펜타곤 메모리얼인 각 벤치형 구조물 위에는 꽃이나 각자의 기억을 담은 물건들이 놓이곤 한다. 아기 희생자의 것에는 장난감이 놓이기도 한다.
추모객들은 그 벤치에 걸터앉을 수도 있고 그 위에 마음을 담은 물건을 올려놓기도 한다. 수많은 벤치들이 군집을 이루며 놓여있는 그 자체가 집합적 풍경의 메모리얼이다.

다음세대 랜드마크로서의 뉴욕 프리덤 뮤지엄

몇 년 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Liberty Island)에 새로운 ‘자유 박물관(이하 프리덤 뮤지엄, Freedom Museum)’을 제안하는 국제 건축 아이디어 공모가 있었다. 필자와 동료들(허보석, 이석)은 이 공모에 작품을 제출해 전 세계에서 모인 수백 개의 안들 가운데 대상을 받았다.

전 세계적인 자유의 상징, 랜드마크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뉴욕항을 바라보며 세워졌다. 이 랜드마크 바로 뒤가 본 공모의 대지였기에 우리는 새로운 ‘프리덤 뮤지엄’을 자유의 여신상과 경쟁하길 바라지 않았다.
필자와 동료들은 뉴욕의 관문인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에 새로운 ‘프리덤 뮤지엄(Freedom Museum)’을 제안했다.
필자와 동료들은 뉴욕의 관문인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에 새로운 ‘프리덤 뮤지엄(Freedom Museum)’을 제안했다.
프리덤 뮤지엄은 거대한 단일 건물이 아닌 작은 불꽃 같은 구조물들 여러 개가 모여서 이룬다. 그 사이사이와 내외부를 오가며 세계 여러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다.
프리덤 뮤지엄은 거대한 단일 건물이 아닌 작은 불꽃 같은 구조물들 여러 개가 모여서 이룬다. 그 사이사이와 내외부를 오가며 세계 여러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다.
1800년대의 상징이 거대한 단일 구조물이었다면, 21세기인 지금과 다음세대의 랜드마크는 작고 여러 개면서도 시민들의 생각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 여신상이 단 하나의 거대한 황금 횃불을 들었다면 지금은 시민 한 명 한 명이 드는 작은 촛불이 모인 의미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불꽃 혹은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작은 유닛(Unit)들을 수백 개 배치했고 그 하나하나는 세계 여러 도시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 상황을 담을 수 있게 했다.
프리덤 뮤지엄 각 내부에는 해당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이 실시간으로 투영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풍경과 함께 중첩된다.
프리덤 뮤지엄 각 내부에는 해당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이 실시간으로 투영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풍경과 함께 중첩된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뉴욕의 리버티섬 한쪽에 제안된 이 프리덤 뮤지엄은 수공간 위에 형성돼 있어서 각 지역을 상징하는 물방울 혹은 불꽃 모양의 형태를 아래와 위에서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마치 인공 숲에 와 있는 느낌도 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뉴욕의 리버티섬 한쪽에 제안된 이 프리덤 뮤지엄은 수공간 위에 형성돼 있어서 각 지역을 상징하는 물방울 혹은 불꽃 모양의 형태를 아래와 위에서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마치 인공 숲에 와 있는 느낌도 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프리덤 뮤지엄의 각 유닛은 자유의 여신상처럼 불변하지 않는다. 다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계 각 지역의 자유와 인권의 상황에 따라서 계속 움직인다. 그 지역의 시민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유와 인권 소식을 뮤지엄에 소셜 미디어나 문자 메시지를 통해 보내면 그 정도와 양에 따라서 그 유닛의 각도가 기울어진다. 즉, 많이 기울어질수록 그 지역의 자유와 인권의 상황이 좋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런 유닛들 수백 개가 모인 프리덤 뮤지엄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집합적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바로 앞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1800년대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을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나타낸다. 반면 필자가 제안한 프리덤 뮤지엄은 집합적 풍경으로 새로운 시대의 랜드마크를 만들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1800년대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을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나타낸다. 반면 필자가 제안한 프리덤 뮤지엄은 집합적 풍경으로 새로운 시대의 랜드마크를 만들고 있다.
전 세계 각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을 소셜 미디어나 문자 메시지로 전송하면 그 양과 정도에 따라서 뮤지엄 내 그 지역을 상징하는 유닛의 기울어짐이 달라진다. 즉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전 세계 각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의 자유와 인권 상황을 소셜 미디어나 문자 메시지로 전송하면 그 양과 정도에 따라서 뮤지엄 내 그 지역을 상징하는 유닛의 기울어짐이 달라진다. 즉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마치 산길의 돌무더기에 자신의 소원을 담은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얹는 것 같이 시민 한 명 한 명의 의견과 바람은 모일수록 더 큰 의미를 표현한다. 그것이 현재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사회는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하고 각자의 주도적인 마음을 담는 집합적 풍경이 될 수 있다.
이 유닛의 구조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의 기둥 형태에서 차용해왔다. 그 위에 얹어진 물방울 혹은 불꽃을 닮은 구조물은 사용자들과의 상화작용에 따라 좌우로 기울어질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단 하나의 횃불을 들었지만 새로운 ‘프리덤 뮤지엄’에는 수백 개의 불꽃이 집합을 이루고 있다.
이 유닛의 구조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의 기둥 형태에서 차용해왔다. 그 위에 얹어진 물방울 혹은 불꽃을 닮은 구조물은 사용자들과의 상화작용에 따라 좌우로 기울어질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단 하나의 횃불을 들었지만 새로운 ‘프리덤 뮤지엄’에는 수백 개의 불꽃이 집합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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