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 잡고 호랑이 막고…조선시대 '한성부'의 별별 업무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5.06. 15:37

수정일 2026.05.06. 15:37

조회 67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앞, 옛 서울의 지도 '수선전도'
서울역사박물관 앞, 옛 서울의 지도 '수선전도'
  121화   조선시대 한성부의 출범과 역사

2026년 4월 30일부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현재 서울시 전신인 한성부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특별전 ‘한성부입니다’를 개최하고 있다. 한성부(漢城府)의 역사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태조 이성계가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로 이름을 고친 데서 시작된다. 1910년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 한성부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한성부의 출범과 위치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 1394년 6월 6일 『태조실록』

1394년 6월 6일 『태조실록』의 기록은 한성부의 출범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있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정도(開國定都)에는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다. … 그 뒤에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 군주(軍主)를 두더니, 경덕왕이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 고려 초기에 또 양주(楊州)라고 고쳤고, 문종이 남경(南京)이라 하고 남경 유수(留守)로 승격하였다. 충렬왕이 한양부(漢陽府)라고 고쳤다. 태조 3년에 도읍으로 정하였다.”고 하여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때까지 한성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지도학자 김정호(金正浩)가 1820년경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당시 한성부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는데,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과 홍제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한성부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세종로 교보빌딩 북쪽 일대였다. 19세기 중반 한성부에 관련된 각종 내용을 정리한 지지(地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 의하면 “한성부 관아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며, 그 남쪽에는 호조가 있었고, 북쪽에는 이조(吏曹)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천이 흘렀고, 서쪽에는 큰 도로가 있었다.”고 하여, 오늘날 교보빌딩 북쪽 지역에 한성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사의 규모는 172칸이었는데 그중 99칸이 호적(戶籍)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만큼 한성부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이 호적을 관리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번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에서도 호적을 다수 전시하고 있다.
한성부 판윤 임명 관련 문서
한성부 판윤 임명 관련 문서

한성부의 직제와 하는 일은?

현재의 서울시장과 같은 역할을 한 판윤(判尹)은 정2품직으로, 현재의 정부 부처 장관급인 판서(判書)와 동일한 직급이었다. 현재의 도지사와 같은 각도의 관찰사 직급이 종2품(현재의 차관급)인 것과 비교하면, 당시 한성부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부시장에 해당하는 종2품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각 1명씩을 두었다. 이어 종4품인 서윤(庶尹) 1명, 종5품 판관(判官) 2명, 정7품 참군(參軍) 3명 등을 배치하였다. 이들 정식 관원 이외에 문서 정리, 경비, 심부름 등 잡일을 담당하는 이속(吏屬)들이 있었는데, 서리(書吏) 41인, 호적서원(戶籍書員) 11인, 서사(書寫) 1인, 소차서리(疏箚書吏) 3인, 대령서리(待令書吏) 1인, 고직(庫直) 1인 등 58인의 이서(吏胥)와 사령(使令) 47명, 구종(驅從) 14명, 군사 7명 등 도예(徒隷) 68명 등이 배치돼 있었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정2품 아문 한성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경도(京都)의 인구(人口)와 장적(帳籍:호구와 토지 대장), 시전(市廛), 가사(家舍:가옥), 전토(田土), 사산(四山:서울의 동서남북을 둘러싼 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 도로, 교량, 구거(溝渠:하수도), 포흠(逋欠:관물을 빌려서 갚지 않는 것), 부채(負債), 투구(鬪毆:서로 다투어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 주간순찰(晝間巡察), 검시(檢屍), 거량(車輛:수레), 고실우마(故失牛馬):도살한 소와 말)의 낙계(烙契:증명서) 등에 관한 일을 맡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부 직제로는 육방(六房)이 있어서 각기 담당 업무를 맡았다. 이방(吏房)은 인사업무, 호방(戶房)은 가사(家舍)와 호적, 재정, 경비 지출 등, 예방(禮房)은 산송 업무, 형방(刑房)은 주로 시신(屍身)의 검안(檢案)과 마을 침입 금지, 병방(兵房)은 궁성(宮城)과 도성 순찰, 금화(禁火:소방), 공방(工房)은 도로와 개천, 교량의 관리 및 보수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서울의 산에 있는 송충이를 퇴치하는 것도 한성부의 몫이었다. 『중종실록』에는 “근래 살펴보면 작년부터 경성(京城) 10리 사이의 소나무들을 송충이가 모두 먹었고 능침의 소나무들까지도 송충이가 모두 먹었는데 한성부가 송충이를 잡으려 해도 다 잡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한성부가 송충이를 잡는 일로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서쪽 성밖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물었다는 것으로 한성부에서 아뢰었다.”는 『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는 호환(虎患) 피해에 대한 대처도 한성부에서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로구 인의동48-43 한성부 동부 관아터 표석
종로구 인의동48-43 한성부 동부 관아터 표석

한성부의 구성과 동명의 유래

한성부는 크게 중부(中部),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의 5부로 나누고, 부 아래에 52개의 방(坊)을 두었다. 방은 현재의 구(區)와 유사한 행정단위로 볼 수 있는데, 현재 서울은 25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 때 처음 설치된 방은 다음과 같다.

동부에는 연희방(燕禧坊), 숭교방(崇敎坊), 천달방(泉達坊), 창선방(彰善坊), 건덕방(建德坊), 성덕방(聖德坊), 서운방(瑞雲坊), 연화방(蓮花坊), 숭신방(崇信坊), 인창방(仁昌坊), 관덕방(觀德坊), 흥성방(興盛坊) 등 12방이 있었다. 숭교방은 현재의 명륜동, 혜화동 일대이며, 연화방은 낙산과 창경궁 사이, 현재의 대학로 일대이다.

서부는 영견방(永堅坊), 인달방(仁達坊), 적선방(積善坊), 여경방(餘慶坊), 인지방(仁智坊), 황화방(皇華坊), 취현방(聚賢坊), 양생방(養生坊), 신화방(神化坊), 반석방(盤石坊), 반송방(盤松坊) 등 11방이 있었다. 반송방의 이름은 서대문 밖 천연동 서지(西池)에 있던 반송정에서 유래되었는데, 조선후기의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은 반송방 야동에서 태어났다.

남부는 광통방(廣通坊), 호현방(好賢坊), 명례방(明禮坊), 대평방(大平坊), 훈도방(薰陶坊), 성명방(誠明坊), 낙선방(樂善坊), 정심방(貞心坊), 명철방(明哲坊), 성신방(誠身坊), 예성방(禮成坊) 등 11방이 있었는데, 명례방은 현재의 명동 일대이며, 호현방에서 유래한 동네가 회현동이다.

북부는 광화방(廣化坊), 양덕방(陽德坊), 가회방(嘉會坊), 안국방(安國坊), 관광방(觀光坊), 징청방(澄淸坊), 순화방(順化坊), 명통방(明通坊), 준수방(俊秀坊), 의통방(義通坊) 등 10방이 있었다. 한성부가 위치했던 징청방은 현재의 세종로 일대이며, 세종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준수방은 오늘날의 서촌 지역에 해당한다. 통인시장 앞 네거리에 세종대왕 탄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세종이 이 근처에서 출생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중부는 정선방(貞善坊), 경행방(慶幸坊), 관인방(寬仁坊), 수진방(壽進坊), 진정방(鎭定坊), 장통방(長通坊), 서린방(瑞麟坊), 견평방(堅平坊) 등 8방이 있었는데, 공평동, 서린동, 인사동 등의 명칭은 중부에 설치되었던 방을 떠올리게 한다. 인사동은 관인방의 ‘인’과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의미의 ‘대사동’의 ‘사’자를 합해서 만든 동네명이다.

태조 때 설치된 52방 제도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천하였다. 현재의 서울이 분구(分區)가 계속되어 구의 숫자가 늘어났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 한성부의 방들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세종 때에는 서부의 영견방, 인지방, 취현방의 3개 방이 폐지되어 49개 방이 되었고, 영조 때에는 동부 6방, 서부 10방, 남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의 45개 방이 되었다. 이후 정조 때인 1788년에 2개의 방이 늘어나 조선후기에는 5부 47방 체제가 확립되었다.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참조).

현재의 동(洞)과 유사한 개념으로 쓰인 행정 단위는 (契)였다. 예를 들면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신설계, 안암리계, 어창계, 종암미계, 가오리계, 수유촌계, 번동계, 사하리계, 번리계, 우이리계, 숭신방계 등이 배치돼 있었는데, 이들 계는 현재의 동명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5부가 5서(署)로 개칭되고, 일부 방명이 개칭되었다. 계(契)가 축소되고, 동을 따로 두는 행정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5서 47방·288계·775동 체제로 변하였다.
1949년 서울특별시가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가 되었다.

한성부에서 경성부, 서울시로

갑오개혁에 의한 지방행정 개혁에 따라 1895년에는 8도(道) 체제가 폐지되면서 전국은 23부(府)·337군(郡)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한성부는 기존 한성부 지역과 고양군, 파주군, 교하군, 적성군, 양주군, 포천군, 영평군, 가평군, 연천군, 광주군 등 11개 군을 포함하게 되었고, 구 한성부 지역은 한성군(漢城郡)이 되었다. 한성부가 한성군으로 격하된 시기는 극히 짧았다.

1896년에는 23부 제도가 폐지되고 조선 13도 제도를 시행되면서 1개 군으로 격하되었던 한성부는 다시 조선왕조 수도로서의 위치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하면서, 그 이름을 잃고 경성부(京城府)가 되어 경기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43년에는 처음으로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영등포구, 동대문구, 서대문구의 7개구(區)가 설치되었고, 1944년 마포구를 추가로 설치하여 8개 구가 되었다.

1946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쳤고, 9월 28일 경기도에서 독립하여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다. 경성부 시기 정목(丁目)은 가(街), 통(通)은 로(路), 정(町)은 동(洞)으로 변경하면서 일제식 행정명칭에서 벗어났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1949년 서울특별시가 되었고, 1963년 경기도 주변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대되어 오늘날 서울시 권역의 토대를 만들었다. 경성부 시기 8개 구에서 출발한 서울시는 1949년 동대문구에서 나온 성북구가 신설되고,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1975년 강남구, 1977년 강서구, 1979년 은평구, 강동구, 1980년에는 구로구, 동작구가 신설되어 총 17개 구가 되었다. 1988년까지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 중랑구, 노원구가, 1996년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신설되면서 현재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총 25개 구로 구성되어 있다.

약 10만 명이었던 세종 때의 인구는 현재, 당시보다 약 90배 늘어났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성부입니다’ 특별전을 찾아 서울의 변화상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동네의 역사가 바뀐 모습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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