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지키려 했던 남자, 단종 복위를 꿈꾼 '금성대군'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4.08. 15:59

영주 순흥 지역의 금성대군 신단
119화 단종과 살고 싶었던 남자, 금성대군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명량에 이어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단종(端宗:1441~1457)과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영화에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의 단종복위 운동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금성대군은 누구이며, 그는 왜 그토록 형님인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에 칼날을 겨누면서, 끊임없이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해 나갔을까?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명량에 이어 한국 영화 흥행 2위에 올랐다. 단종(端宗:1441~1457)과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영화에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의 단종복위 운동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금성대군은 누구이며, 그는 왜 그토록 형님인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에 칼날을 겨누면서, 끊임없이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해 나갔을까?
금성대군은 누구인가?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 8명의 대군과 정소, 정의 등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이 왕으로 재위하고 있던 1426년 3월 28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는데,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6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금성대군은 “신이 의빈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청한 기록이 보인다. 자신을 키워 준 의빈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봉양하길 원했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7세 때인 1433년(세종 15)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 4월에 바로 위의 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2세 때인 1437년(세종 19) 2월 참찬을 지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방석(芳碩)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의안대군은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처형되었다가, 태종 때 소도군(昭悼君)의 시호를 받고, 숙종 때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증되었다.
1440년(세종 22) 6월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의원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병세를 묻는 것이 길에 이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금성의 병이 낫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를 지급하고 시병한 환관, 관료들에게 직접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단종실록』 1453년(단종 1) 6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금성대군은 “신이 의빈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라고 청한 기록이 보인다. 자신을 키워 준 의빈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 봉양하길 원했지만,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7세 때인 1433년(세종 15)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 4월에 바로 위의 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2세 때인 1437년(세종 19) 2월 참찬을 지낸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李孟漢)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방석(芳碩)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의안대군은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처형되었다가, 태종 때 소도군(昭悼君)의 시호를 받고, 숙종 때 의안대군(宜安大君)으로 추증되었다.
1440년(세종 22) 6월 창진(瘡疹)에 걸려 위독한 상태까지 갔는데, 세종이 의원를 보내 진료하게 하는 한편 영추문을 열어두고 수시로 의원들에게 그의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병세를 묻는 것이 길에 이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금성의 병이 낫자, 의원 노중례(盧重禮)에게 안구마(鞍具馬)를 지급하고 시병한 환관, 관료들에게 직접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금성에 대한 세종의 총애가 각별했음을 ‘세종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 금성대군의 집을 자주 찾다
금성에 대한 세종의 총애가 각별했음은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자주 금성의 집을 찾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441년(세종 23) 9월 29일 금성의 집에 거동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10월 2일, 10월 10일, 10월 13일 연이어 세종은 금성의 집을 찾았다. 1442년(세종 24) 1월 9일 “왕이 왕비와 같이 금성대군 이유의 집에 이어(移御)하니 동궁(東宮)도 따라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어(移御)라는 표현에서 일정 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자인 문종도 동행한 것이 주목된다. 1442년 4월 22일에는 “거가(車駕)가 서울에 돌아와서 금성대군의 사제(私第)에 거처하였으니, 이는 대궐 안에 병든 사람이 있었던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궁궐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금성의 집에 거처하였음이 나타난다.
이후에도 왕과 왕비가 금성의 집에 거처한 기록(1442년(세종 24) 7월 15일, 1444년 11월 7일, 12월 16일)이 여러 차례 나타나며, 1445년 1월 1일의 “작년 가을에 내가 초수(椒水:초정)에서 돌아왔을 때, 마침 궁중(宮中)이 편안하지 못하여 동궁과 대군들이 모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집에서 피병(避病)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그대로 따라 그 집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기록에서 세종이 장기간 금성의 집에 머물 것을 대비해, 금성의 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금성은 화포(火砲)의 제작에도 능력을 보였다. 화포는 세종 시기 4군 6진의 개척에 큰 역할을 한 무기로 세종은 왕자들에게 화포 제작의 감독을 맡게 하였다. 1445년(세종 27) 3월 18일 실록에는 세종이 승정원 전지(傳旨)한 기록이 보인다. “화포의 법은 태종 때에 애를 썼으나 그 쏜 화살이 2, 3백 보(步)를 넘지 못하기에, 내 일찍이 제조(提調)를 골라 두고, 또 겸관(兼官)을 세워 그 임무에 전력하게 하였으나 역시 더한 것이 없었는데, 이번에 임영대군과 금성대군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맡아 보게 하였더니, 화살이 8, 9백 보를 넘어가고 혹은 천여 보에 이른다.”고 하면서, 세종이 크게 만족감을 표시한 내용이 보인다.
이후에도 왕과 왕비가 금성의 집에 거처한 기록(1442년(세종 24) 7월 15일, 1444년 11월 7일, 12월 16일)이 여러 차례 나타나며, 1445년 1월 1일의 “작년 가을에 내가 초수(椒水:초정)에서 돌아왔을 때, 마침 궁중(宮中)이 편안하지 못하여 동궁과 대군들이 모두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집에서 피병(避病)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그대로 따라 그 집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기록에서 세종이 장기간 금성의 집에 머물 것을 대비해, 금성의 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금성은 화포(火砲)의 제작에도 능력을 보였다. 화포는 세종 시기 4군 6진의 개척에 큰 역할을 한 무기로 세종은 왕자들에게 화포 제작의 감독을 맡게 하였다. 1445년(세종 27) 3월 18일 실록에는 세종이 승정원 전지(傳旨)한 기록이 보인다. “화포의 법은 태종 때에 애를 썼으나 그 쏜 화살이 2, 3백 보(步)를 넘지 못하기에, 내 일찍이 제조(提調)를 골라 두고, 또 겸관(兼官)을 세워 그 임무에 전력하게 하였으나 역시 더한 것이 없었는데, 이번에 임영대군과 금성대군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맡아 보게 하였더니, 화살이 8, 9백 보를 넘어가고 혹은 천여 보에 이른다.”고 하면서, 세종이 크게 만족감을 표시한 내용이 보인다.

금성대군을 기리는 신당, 금성당
1448년(세종 30) 11월 8일에는 “세자가 금성대군의 집으로 이차(移次:거처를 옮김)하였다. ...세자궁이 편치 못해서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문종의 아들인 8살의 단종도 이때 이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 1449년 9월 24일에는 세종이 금성대군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음이 기록되어 있고, 이해 11월 19일의 기록에는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1434~1467)의 집으로 옮기면서, 세자는 금성대군의 집으로 있게 하였음이 나타난다.
세자(문종)는 1449년(세종 31) 10월 세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금성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하였다. 세종은 1450년 2월 막내 영응대군의 집에서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세종은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였지만,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금성대군의 집이었다. 당시 세자인 문종도 세종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고, 세손인 단종은 삼촌인 금성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간에 형성된 유대와 의리는 1455년(세조 즉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자, 상왕 복위라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세자(문종)는 1449년(세종 31) 10월 세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금성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하였다. 세종은 1450년 2월 막내 영응대군의 집에서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세종은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였지만,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금성대군의 집이었다. 당시 세자인 문종도 세종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고, 세손인 단종은 삼촌인 금성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간에 형성된 유대와 의리는 1455년(세조 즉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자, 상왕 복위라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금성대군은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신다.”고 하며,
북쪽을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처형을 당하였다.
북쪽을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처형을 당하였다.
단종의 폐위와 상왕 복위 운동
조선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저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단종조(端宗朝) 고사본말(故事本末)에서는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을 인용하여, “정축년(1457년) 가을에 금성대군 유(瑜)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거사하기를 꾀하다가 얼마 안 되어 발각되었다. 종친과 재상, 대간이 법으로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청하니, 유에게는 사사(賜死)를 명하고 한남군(漢南君) 어(?)와 영풍군(永豐君) 전(瑔)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등은 모두 극변에 안치하여 금고(禁錮)하였다.”고 금성대군의 역모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한남군과 영풍군은 세종이 후궁인 혜빈 양씨의 아들로, 혜빈은 어머니를 잃은 단종에게 젖을 먹인 유모이기도 하였다. 금성대군의 역모 여파로 모자가 한꺼번에 희생을 당했다.
금성대군은 이미 단종복위 운동을 일으킨 전력으로 인하여, 순흥에 유배되었는데, 순흥부사 이보흠과 지역의 무사들을 규합하여 다시 단종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단종을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 복위할 계책을 세운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금성대군이 사람을 보내 단종이 복위 운동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특히 단종이 활을 쏘아 격문에 답하는 모습은 극적인 요소를 적극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벽장 속에서 모의 사실을 몰래 엿들었던 순흥 관노(官奴)로 인하여 미리 누설되었다. 관노는 사귀던 시녀를 시켜 격문을 훔쳐 서울로 향하였고, 이 과정에서 풍기 현감이 다시 그 격문을 빼앗아 서울에 들어가 고변하였다. 체포되어 처형에 임한 금성대군의 마지막 모습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걸터 앉은 금성대군에게 금부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위패(位牌)인 전패(殿牌:‘전’자를 새겼으며, 각 고을의 객사에 봉안하였다)에 절을 하도록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이에 금성대군은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신다.”고 하며, 북쪽을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처형을 당하였다. 끝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하여 절을 하고 최후를 마친 것이다.
금성대군은 이미 단종복위 운동을 일으킨 전력으로 인하여, 순흥에 유배되었는데, 순흥부사 이보흠과 지역의 무사들을 규합하여 다시 단종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단종을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 복위할 계책을 세운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금성대군이 사람을 보내 단종이 복위 운동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특히 단종이 활을 쏘아 격문에 답하는 모습은 극적인 요소를 적극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벽장 속에서 모의 사실을 몰래 엿들었던 순흥 관노(官奴)로 인하여 미리 누설되었다. 관노는 사귀던 시녀를 시켜 격문을 훔쳐 서울로 향하였고, 이 과정에서 풍기 현감이 다시 그 격문을 빼앗아 서울에 들어가 고변하였다. 체포되어 처형에 임한 금성대군의 마지막 모습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걸터 앉은 금성대군에게 금부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위패(位牌)인 전패(殿牌:‘전’자를 새겼으며, 각 고을의 객사에 봉안하였다)에 절을 하도록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이에 금성대군은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신다.”고 하며, 북쪽을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처형을 당하였다. 끝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하여 절을 하고 최후를 마친 것이다.
금성대군을 기억하는 공간들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꾀했던 순흥 지역의 피해도 컸다. 관군의 습격을 받으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순흥은 폐부(廢府)가 되고 말았다. 순흥 인근의 죽계(竹溪)는 희생된 사람들의 핏물로 넘쳐났고, ‘피끝마을’이라는 지명도 생겼다. 금성대군 신단의 오른쪽에는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충신수(忠臣樹)’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고 순흥부가 폐지되었을 때 나무 또한 말라 죽었고,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새 가지가 돋자 순흥부도 복설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순흥이 다시 본 이름을 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220여 년이 지난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복설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이 복권되자 1693년(숙종 19)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壇)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소하여 3개의 단으로 고쳤고,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였다. 금성대군 신단(神壇)의 제단은 돌로 만든 세 개의 단을 ‘품(品)’ 자 형태로 배치한 구조이다. 앞쪽 왼편은 이보흠을 기리는 단, 오른편은 함께 희생된 선비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뒤쪽 중앙의 제단이 금성대군을 모신 신단이다.
순흥이 다시 본 이름을 찾게 된 것은 그로부터 220여 년이 지난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복설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이 복권되자 1693년(숙종 19)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壇)을 쌓았다고 한다. 이후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소하여 3개의 단으로 고쳤고,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였다. 금성대군 신단(神壇)의 제단은 돌로 만든 세 개의 단을 ‘품(品)’ 자 형태로 배치한 구조이다. 앞쪽 왼편은 이보흠을 기리는 단, 오른편은 함께 희생된 선비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뒤쪽 중앙의 제단이 금성대군을 모신 신단이다.

단종의 무덤, 영월 장릉
1791년(정조 15) 정조는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배향할 인물의 명단을 정하였는데, 금성대군은, 안평대군, 한남군, 영풍군, 사육신, 엄흥도(嚴興道) 등과 함께 정단(正壇)에 배향된 인물에 포함되었다. 단종과 함께 살고 싶었던 금성대군은 지금도 단종의 장릉 옆에서 그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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