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담지 못한 진짜 한명회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3.11. 15:16

수정일 2026.03.11. 15:17

조회 285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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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화   압구정, 한명회 그 영욕의 공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세조에 의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간 단종과 영월 백성 엄흥도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한명회의 모습도 시선을 끌었다.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수양대군의 쿠데타와 단종의 유배 이야기를 썼는데, 영화의 성공 덕분에 많은 독자들이 큰 관심을 보여 주었다. ( ☞[관련기사]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인기…단종의 역사, 진실은 어디까지? )
이번에는 금성대군과 단종의 처형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또 다른 가해자 한명회의 실제 역사 속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명회는 누구인가?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사우당(四友堂)이다. 한기와 여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종조부인 한상경은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부모가 일찍 사망하면서 종조부인 호조참판 한상덕에게 의탁해 살았다고 한다.

한명회는 ‘칠삭둥이’란 이미지도 강한데, 이것은 『성종실록』의 한명회 졸기에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 위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는 기록과 『연려실기술』의 “공이 잉태된 지 일곱달 만에 태어났으므로 사체(四體)가 아직도 덜 자랐다.”는 기록 등에 근거한다.

그러나 “온 집안사람들이 기르지 않으려 하니 유모가 솜으로 싸서 밀실에 두었는데 뒤에 형체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자라감에 따라 골격이 기걸(奇傑)하였다.”는 기록에서도 보듯 장성해서는 기골이 장대했음을 알 수 있다. ‘왕과 사는 남자’ 영화에서 기존과는 다르게 한명회 역으로 체격이 건장한 유지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고증에 충실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한명회는 과거 시험에 몇 차례 응시했으나 거듭 실패하자 산천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의기 투합한 친구가 권람(權擥:1416~1465)이었다. 그리 순탄하지 않은 젊은 시절을 보낸 한명회는 1452년(문종 2) 경덕궁(敬德宮: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개성의 사저)의 직(直:궁지기)이 되었다. 가 되었다. 경덕궁은 ‘추궁(楸宮)’ 또는 '추동궁(楸洞宮)'이라고도 했는데, 1983년에 시작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의 첫 시즌 제목인 〈추동궁 마마〉가 여기서 나왔다.

한명회와 수양대군과의 만남

한명회는 단종 즉위 후 젊은 시절 함께 산천을 유람하던 벗 권람(權擥)을 통해 수양대군의 참모가 되었고, 이것은 한명회의 정치 인생, 나아가 조선전기 왕실 구도를 완전히 바꾸게 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단종실록』에는 당시의 정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권람은 수양대군을 알현한 자리에서, “모름지기 장사로서 사생(死生)을 부탁할 만한 자 두어 사람을 얻어서 창졸(倉卒)의 변에 대비하소서.”라고 건의했고, 수양이 추천을 의뢰하자, 권람은 “한명회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권람의 말을 들은 한명회는,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사람을 모으는 안평대군에게 맞설 수양대군을 자신이 적극 도울 것”이라고 화답하였다. 권람은 다시 수양에게 전하면서,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하지 않고, 포부도 작지 않으나, 명(命)이 맞지 않아 지위가 낮아서 사람들이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공이 만일 발난(拔亂)할 뜻이 있으시면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면서, 한명회를 적극 추천했다. 

수양은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 내가 비록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 논하는 바를 들으니 참으로 국사(國士)로다. 내가 마땅히 대면하여 상의하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권람을 통해 만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만남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수양의 최고 책사가 된 한명회는 안평대군, 김종서, 황보인 등 제거 대상 세력의 동선을 파악하는가 하면, 홍달손, 양정, 유수 등의 무사들을 규합해 나갔다. 단종을 경호하는 부대인 내금위(內禁衛) 소속 무사들까지 포섭하면서 거사의 날을 기다렸다.  
성삼문 등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 연회 날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거사가 연기되었다.
성삼문 등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 연회 날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거사가 연기되었다.

정권 창출과 유지의 책사 한명회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수양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수양이 직접 김종서 제거에 나섰고, 수양의 지시를 받은 한명회는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한명회가 작성한 생살부(生殺簿)에서 살부에 적힌 정분, 조극관, 이양 등은 수양의 심복들이 내려친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정난 성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명회는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홍달손, 권람 등과 함께 정난공신 1등에 올랐다. 

1455년 세조 즉위 후에는 더욱 승승장구하여 좌부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을 때, 한명회는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좌절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성삼문 등은 창덕궁에서 중국 사신을 맞아 연회(宴會)하는 날을 거사일로 잡고 별운검(別雲劍:특별 경호원)으로 임명된 성승과 유응부와 힘을 합해 세조와 의경세자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리 행사장을 답사한 한명회는, ‘창덕궁은 좁고 무더우니, 세자가 입시(入侍)하는 것은 불편하고, 따로 운검(雲劍)을 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고 세조에게 건의하였다. 

성삼문 등의 거사는 연기가 되었고 김질의 밀고로,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한명회의 촉이 큰 역할을 한 것이었다. 1456년 한명회는 좌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심에 들어서게 된다.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각별한 신임은 혼사로도 이어졌다. 1460년 한명회의 딸(후의 장순왕후)과 세조의 차남인 해양대군(후의 예종)과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차기 왕비가 보장되었던 이 딸은 1461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면서 왕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세조와 사돈 관계를 맺으며 한명회는 더욱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경덕궁 직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니, 9급 공무원에서 국무총리까지 오른 격이었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한나라 고조의 참모로 장량이라고도 함)’이라 칭하며 최고의 예우를 하며 아꼈다. 『세조실록』의 “모든 형벌과 상을 주는 것이 모두 그의 손에 있었다.”(1461년 9월 26일)는 기록이나, 한명회의 졸기(卒記:죽은 후 그 인물에 대한 기록)에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였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면서 한명회에게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곧 석방되었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하였다. 1468년 청년 장군 남이의 역모 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봉되었으며, 1469년 성종이 즉위하는데 막후 세력으로 활약하면서,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올랐다.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 20년도 안 된 시기에 한명회는 네 차례 일등공신에 오르면서 이름을 떨쳤다. 

1469년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왕위는 세조의 장남으로 1457년에 요절한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의 두 번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결정되었다. 제안대군(예종의 장남)은 네 살로 너무 나이가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제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더해졌다. 
한강 주변은 왕실 소유의 정자들이 먼저 세워졌다.
한강 주변은 왕실 소유의 정자들이 먼저 세워졌다.

여의도 근처에 처음 압구정을 조성하다

사위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한명회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한명회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공간이 한강변 풍광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이다. 한강 주변은 왕실 소유의 정자들이 먼저 세워졌다. 현재의 잠실대교 부근에 세운 낙천정(樂天亭),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인근에 세운 화양정(華陽亭), 한남대교 부근의 제천정(濟川亭), 망원동 부근의 망원정(望遠亭) 등이 대표적이다.

한명회가 압구정을 조성한 것은 이례적이었고, 그만큼 그의 위상이 컸음을 보여준다. 조선전기의 학자인 김수온(金守溫)의 문집인 『식우집(拭疣集)』의 「압구정기(狎鷗亭記)」에는 “왕도(王都)에서 남으로 5리쯤 가면 양화진의 북쪽과 마포(麻浦)의 서쪽에 언덕 하나가 우뚝 솟아 환히 트이고 강물로 빙 둘러 있어 세상에서 화도(火島)라 일컫는다. … 상당부원군 한공(韓公:한명회)이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 노니는 땅으로 삼았다.”고 한명회가 처음 압구정을 조성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한림(翰林) 예겸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니 애공이 압구(狎鷗:갈매기와 친하게 지냄)로 하기를 청하자 공은 더욱 흔연히 허락하였다.”고 하여 압구정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압구정기」에서 묘사되어 있는 압구정은 ‘양화진(楊花津)의 북쪽과 마포(麻浦)의 서쪽에 언덕 하나가 우뚝 솟아 환히 트이고 강물로 빙 둘러 있어 세상에서 화도(火島)라 일컫는다.’는 표현에서도 보듯이 현재의 여의도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476년(성종 7) 두모포 건너 강 남쪽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압구정 천막 사건과 한명회의 몰락

성종 시절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의 정치 인생에 최대의 위기는 압구정과 함께 찾아왔다. 압구정의 명성이 중국 명나라에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이 성종을 통해 압구정 관람을 청하였다. 이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의 뜻을 보였고, 성종은 아무리 장인이라지만 왕의 뜻을 거역하는 한명회의 태도에 분노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사용하게 해 준다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에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없애겠다는 강경한 선언을 했다. 『성종실록』(1481년 6월 25일) 기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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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두루 돌아다니면서 놀고야 말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다 이것을 본떠 유람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들렀다가 마침 신령스러운 비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라.” 

왕의 권위를 우습게 보는 장인에게 확실하게 왕의 권위를 각인시킨 성종의 강경한 선언이었다. 주인을 잃은 압구정은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풍광이 워낙 아름다운 지역이었기에 조선후기에 다시 정자가 들어섰고, 정선의 압구정 그림은 그때의 모습을 기록으로 담은 것이다. 압구정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마지막 소유주는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 인물 박영효였다. 이제 그 자리 한강변에는 올림픽대로가 조성되었고, 원래 위치보다 조금 떨어진 곳,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내 ‘압구정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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