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공연으로 세계가 반한 그곳, 광화문에 이런 역사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3.25. 16:00

3월 21일 광화문 공연으로 광화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18화 광화문광장과 역사적 공간들
2026년 3월 21일 저녁 8시, 경복궁의 정문 앞 광화문광장에서 ‘BTS 광화문 공연’이 개최되면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광화문과 경복궁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더욱 커졌고, 광화문광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BTS 공연이 펼쳐졌던 광화문과 경복궁의 역사, 그리고 그 공간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026년 3월 21일 저녁 8시, 경복궁의 정문 앞 광화문광장에서 ‘BTS 광화문 공연’이 개최되면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광화문과 경복궁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더욱 커졌고, 광화문광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BTS 공연이 펼쳐졌던 광화문과 경복궁의 역사, 그리고 그 공간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까닭?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즉위하였으나, 바로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개성은 475년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였기에, 새로운 나라 조선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394년(태조 3) 10월 태조는 마침내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은 이미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으며, 고려시대에도 남경이라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기능을 한 곳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이 있어서 국방이나 백성들의 관리에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특히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서해와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세금을 거두기에도 좋았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은 이미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으며, 고려시대에도 남경이라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기능을 한 곳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이 있어서 국방이나 백성들의 관리에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었다. 특히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서해와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세금을 거두기에도 좋았다.

태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는 ‘이곳의 형세를 살펴보니 왕자(王者)의 도읍이 될 만하다. 더구나 조운(漕運)이 통하고 사방의 이수(里數)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용산창, 풍저창, 광흥창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였고,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창고 앞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창전동(倉前洞)이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졌지만 궁궐의 위치를 둘러싸고 무학(無學,1327~1405) 대사와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자, 정도전은 국왕은 남쪽을 향해 거처하는 것이 큰 원칙임을 강조하면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건국 초기 태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받았던 정도전의 의견이 수용되었고, 정도전은 신도시 한양의 건설과 궁궐 조성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졌지만 궁궐의 위치를 둘러싸고 무학(無學,1327~1405) 대사와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자, 정도전은 국왕은 남쪽을 향해 거처하는 것이 큰 원칙임을 강조하면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건국 초기 태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받았던 정도전의 의견이 수용되었고, 정도전은 신도시 한양의 건설과 궁궐 조성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경복궁의 완성과 그 이름에 담긴 뜻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1년 뒤인 1395년(태조 4) 9월 29일 한양의 북쪽에 우뚝한 산 북악 남쪽의 평평하고 넓은 터에 새로운 궁궐이 조성되었다. 태조는 같은 날 낙성된 종묘에 4조(祖)의 신위를 개성으로부터 옮겨 모시고, 친히 새 궁궐을 살핀 다음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한껏 거나해진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태조가 술에 취한 모습에서 정도전은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가 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이었다.
궁궐의 이름을 ‘경복’으로 할 것을 제안했고, 태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각의 전체 규모는 내전 173칸, 외전 192칸, 기타 주방, 중추원, 삼군부 등의 390여 칸을 합쳐 755칸에 불과하였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했을 때의 규모가 7,200여 칸임을 고려하면, 경복궁의 처음은 매우 소박한 모습으로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궁궐 조성의 책임자 정도전이 왕이 먼저 검소와 절약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그의 저술 『조선경국전』에서 “궁원(宮苑,궁궐과 정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 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1395년(태조 4) 10월 7일 『태조실록』에는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술이 한껏 거나해진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태조가 술에 취한 모습에서 정도전은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가 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이었다.
궁궐의 이름을 ‘경복’으로 할 것을 제안했고, 태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각의 전체 규모는 내전 173칸, 외전 192칸, 기타 주방, 중추원, 삼군부 등의 390여 칸을 합쳐 755칸에 불과하였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했을 때의 규모가 7,200여 칸임을 고려하면, 경복궁의 처음은 매우 소박한 모습으로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궁궐 조성의 책임자 정도전이 왕이 먼저 검소와 절약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그의 저술 『조선경국전』에서 “궁원(宮苑,궁궐과 정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 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1395년(태조 4) 10월 7일 『태조실록』에는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을 찾은 관광객들
이어서 “뒤에 궁성을 쌓고 동문은 건춘문(建春門)이라 하고, 서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하며,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누각 3간에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였다. …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삼군부·육조·사헌부 등의 각 관청이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태조 때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정해졌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광화문 남쪽, 현재의 광화문광장 좌우에는 의정부·삼군부·육조의 여러 관청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세종과 광화문과의 인연
조선의 왕 중에서도 경복궁, 광화문과 가장 인연이 깊은 왕은 세종이다. 세종은 1418년 8월 10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398년(태조 7) 8월 이방원이 주도하여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이듯 태조 때부터 광화문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그런데 『세종실록』 1426년(세종 8) 10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고종 때 중건할 때 ‘흥례’로 고침), 셋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 동랑(東廊) 협문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宮城)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석교(石橋)를 영제(永濟)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세종 때 각 문에 대한 명칭을 확실하게 정하면서 현판을 걸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광화문에 걸어둔 종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한 노비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1428년 5월 24일 사비(私婢) 자재(自在)가 광화문의 종을 치고 자기의 억울한 일을 호소하였다. 승정원에서 그 이유를 묻자, 자재는 “의금부의 당직원이 신문고(申聞鼓) 치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종을 쳤다.”고 대답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칠 수 있게 하여, 아래 백성들의 사정이 위에 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금하였는가?” 하며, 의금부의 당직원을 사헌부에서 국문할 것을 지시하였다. 광화문에 걸린 신문고를 활용하여 민원을 접수하려 한 세종의 애민 정신이 잘 나타난 기록으로, 광화문광장이 현재에도 민의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세종은 1434년 3월 소리가 좋은 새로운 종을 제작하여 광화문에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종실록』 1426년(세종 8) 10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고종 때 중건할 때 ‘흥례’로 고침), 셋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 동랑(東廊) 협문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宮城)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석교(石橋)를 영제(永濟)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세종 때 각 문에 대한 명칭을 확실하게 정하면서 현판을 걸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광화문에 걸어둔 종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한 노비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1428년 5월 24일 사비(私婢) 자재(自在)가 광화문의 종을 치고 자기의 억울한 일을 호소하였다. 승정원에서 그 이유를 묻자, 자재는 “의금부의 당직원이 신문고(申聞鼓) 치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종을 쳤다.”고 대답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세종은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칠 수 있게 하여, 아래 백성들의 사정이 위에 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 무슨 까닭에 금하였는가?” 하며, 의금부의 당직원을 사헌부에서 국문할 것을 지시하였다. 광화문에 걸린 신문고를 활용하여 민원을 접수하려 한 세종의 애민 정신이 잘 나타난 기록으로, 광화문광장이 현재에도 민의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세종은 1434년 3월 소리가 좋은 새로운 종을 제작하여 광화문에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1429년 2월 5일에는 “왕이 내리는 금령의 조문을 요약하여 글판을 만들어서 광화문 밖과 도성의 각 문과 종루(鍾樓) 등지에 걸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광화문 앞 공간이 왕의 지침을 알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외에도 세종은 광화문 앞에서 활쏘기를 시험하고, 무과 시험을 직접 주관하였다. 문과는 근정전 앞에서 실시하고 무과는 광화문 앞에서 실시하였는데 장전(帳殿,천막을 설치한 왕의 자리)을 마련했다는 기록도 흥미롭다. 세종이 광화문광장에 모습을 보이며 무과 등의 행사를 주관하던 모습은, 현재 이곳에 조성되어 있는 동상과도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현재의 경복궁
정도전이 조성 작업을 주도하면서 755칸 규모로 출발한 경복궁은 이후에 계속 증축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1865년(고종 2)부터 중건 사업이 시작되었다. 왕실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신정왕후(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고종 대에 추진된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시작은 조대비의 하교에서 비롯되었다. “경복궁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며, 중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68년 7월 2일 드디어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고종은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헌종비 명헌왕후), 대비(철종비, 철인인왕후), 왕비(명성왕후)를 모두 대동하고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 시대를 새롭게 열었다. 고종은 “법궁을 영건(營建)한 지 겨우 40달가량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 벌써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던 일을 이렇게 완공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감격하였다. 이어 경복궁 조성의 책임자이면서, 1398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낙인찍혔던 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330여 동의 궐내 전각 7,225칸, 후원 전각 232칸 반으로 7,450칸이 넘었다. 처음 완공된 경복궁의 전각이 755칸과 비교하면 거의 10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1866년 3월 3일 경복궁을 조성한 과정을 담은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에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를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제강점 시기인 1923년 전차선로가 설치되며 땅속에 묻히면서 오랜 기간 그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월대는 2023년 10월 발굴 조사를 거쳐 100년 만에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고종 대에 추진된 경복궁 중건 사업의 시작은 조대비의 하교에서 비롯되었다. “경복궁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하며, 중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68년 7월 2일 드디어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고종은 대왕대비(신정왕후), 왕대비(헌종비 명헌왕후), 대비(철종비, 철인인왕후), 왕비(명성왕후)를 모두 대동하고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 시대를 새롭게 열었다. 고종은 “법궁을 영건(營建)한 지 겨우 40달가량밖에 되지 않는데 지금 벌써 이어(移御)하게 되었다.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던 일을 이렇게 완공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감격하였다. 이어 경복궁 조성의 책임자이면서, 1398년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낙인찍혔던 정도전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330여 동의 궐내 전각 7,225칸, 후원 전각 232칸 반으로 7,450칸이 넘었다. 처음 완공된 경복궁의 전각이 755칸과 비교하면 거의 10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1866년 3월 3일 경복궁을 조성한 과정을 담은 『영건일기』에는 ‘광화문 앞에 월대(月臺·궁궐 주요 건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터보다 높게 쌓은 단)를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일제강점 시기인 1923년 전차선로가 설치되며 땅속에 묻히면서 오랜 기간 그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월대는 2023년 10월 발굴 조사를 거쳐 100년 만에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세계 어느 위인과 견주어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이번 광화문광장 공연에서는 광장 한복판에 자리잡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눈길을 끌었다. 우리 역사 속 문과 무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세계 어느 위인과 견주어 보아도 큰 업적과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68년 4월 27일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기단부에는 한자로 ‘忠武公李舜臣將軍像(충무공이순신장군상)’이라고 된 글자가 양각되어 있고, 기단부 아래에는 거북선 모형과 청동으로 만든 북 두 개가 놓여 있다. 1990년대 중반 경복궁을 가리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면서, 경복궁과 북악산이 장군의 동상 뒤로 훤히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1968년 4월 27일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기단부에는 한자로 ‘忠武公李舜臣將軍像(충무공이순신장군상)’이라고 된 글자가 양각되어 있고, 기단부 아래에는 거북선 모형과 청동으로 만든 북 두 개가 놓여 있다. 1990년대 중반 경복궁을 가리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면서, 경복궁과 북악산이 장군의 동상 뒤로 훤히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동상은 200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건립되었다. 한 손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백성을 교화하는 모습의 좌상(坐像)이다. 동상 앞에는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같은 세종 시대의 과학 정신을 대표하는 발명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동상 기단 뒤쪽 지하에는 ‘세종이야기’ 전시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세종의 업적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다.
BTS의 공연을 계기로 광화문에 대한 내외국인의 관심과 방문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업적도 널리 기억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광화문을 정문으로 둔 경복궁 복원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경복궁과 광화문이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가길 기대한다.
BTS의 공연을 계기로 광화문에 대한 내외국인의 관심과 방문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업적도 널리 기억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광화문을 정문으로 둔 경복궁 복원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경복궁과 광화문이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여 나가길 기대한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