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세조와 선을 넘은 신하들…그날 밤, 무슨 일이?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4.22. 15:51
![세조는 술자리를 베푸는 등 공신들에게 각별한 배려를 보였다.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사진임]](/uploads/mediahub/2026/04/IVQBwYBZmPPeoYRXJDuMqPZLJKQRvmhQ.jpg)
세조는 술자리를 베푸는 등 공신들에게 각별한 배려를 보였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 사진임]
120화 세조가 술자리를 베푼 까닭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 하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700만에 가까운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서, 1,761만 명의 명량에 이어 한국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세조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공신들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보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공신들을 위해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세조실록』의 ‘술자리’ 검색 기록이 무려 450여 건이 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 하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700만에 가까운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서, 1,761만 명의 명량에 이어 한국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세조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공신들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보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공신들을 위해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세조실록』의 ‘술자리’ 검색 기록이 무려 450여 건이 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신들을 위한 세조의 이벤트, 술자리 행사
세조가 술자리를 베푼 사례는 역대 왕 중 최고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실록의 ‘술자리’ 검색어 900여 건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이다. 술자리의 횟수에 관한 한 세조는 조선 최고의 군주라 불릴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술자리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신들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어서 1등공신 한명회, 권람 등에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책봉되었다. 형식상 왕인 단종이 책봉하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대부분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쿠데타 성공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1455년 윤6월에는 단종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하였고,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46명의 좌익공신(佐翼功臣)이 책봉되었다. 이들 공신들은 세조가 왕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왕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세조는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술자리를 베푼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에게 자주 술자리를 베풀면서 만남의 장을 가졌던 모습은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는 물론이고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추거나 즉석에서 게임을 하는 등 격의 없이 소통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당시에도 칼로 권력을 잡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던 만큼 최대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희석시켜 나간 것으로 풀이된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신들이, 또 다른 순간에 자신에게 칼끝을 겨눌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한 세조는 잦은 술자리를 통해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충성을 다짐하도록 했던 것이다.
세조가 왕이 된 후 술자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5년 7월 27일의 『세조실록』에 보인다. “왕이 노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술자리를 베푸니, 종친(宗親) 영해군 이상과 병조판서 이계전 그리고 승지 등이 모셨다. 음악을 연주하니, 왕이 이계전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지극히 즐긴 뒤에 파하였다. 드디어 영응대군 이염의 집으로 거둥하여 자그마한 술자리를 베풀고 한참 동안 있다가 환궁하였다.”는 기록이다. 술자리에서 음악과 춤을 즐기고, 1차의 아쉬움 때문에 2차까지 가지는 모습은 세조 술자리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완전히 권력을 잡았다. 이어서 1등공신 한명회, 권람 등에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책봉되었다. 형식상 왕인 단종이 책봉하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대부분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쿠데타 성공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1455년 윤6월에는 단종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하였고,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46명의 좌익공신(佐翼功臣)이 책봉되었다. 이들 공신들은 세조가 왕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왕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세조는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술자리를 베푼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에게 자주 술자리를 베풀면서 만남의 장을 가졌던 모습은 『세조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화는 물론이고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추거나 즉석에서 게임을 하는 등 격의 없이 소통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당시에도 칼로 권력을 잡은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던 만큼 최대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희석시켜 나간 것으로 풀이된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신들이, 또 다른 순간에 자신에게 칼끝을 겨눌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인식한 세조는 잦은 술자리를 통해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고 충성을 다짐하도록 했던 것이다.
세조가 왕이 된 후 술자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5년 7월 27일의 『세조실록』에 보인다. “왕이 노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술자리를 베푸니, 종친(宗親) 영해군 이상과 병조판서 이계전 그리고 승지 등이 모셨다. 음악을 연주하니, 왕이 이계전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지극히 즐긴 뒤에 파하였다. 드디어 영응대군 이염의 집으로 거둥하여 자그마한 술자리를 베풀고 한참 동안 있다가 환궁하였다.”는 기록이다. 술자리에서 음악과 춤을 즐기고, 1차의 아쉬움 때문에 2차까지 가지는 모습은 세조 술자리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창덕궁 선정전
술자리에서 왕과 공신들이 어울린 모습들
술자리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춤을 춘 모습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태조 이성계 역시 정도전 등 여러 공신들을 불러 주연(酒宴)을 벌이면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한 뒤 춤을 권한 내용이 『태조실록』에 보인다.
세조의 술자리에서 춤은 빠지지 않았다. 창덕궁 선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북쪽의 야인 정벌에 나선 군사들을 위로하는 행사에서, “세자가 술을 올리고, 구성군 이준(李浚)과 잔치를 모시는 종친(宗親)과 여러 재상과 신하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축원을 기원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자, 이준(李浚:구성군)·정인지·신숙주·한명회·홍윤성·홍달손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호위 군사에게 술을 내려 주어 취할 때까지 마시게 하였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단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지 두 달이 지난 8월 16일 세조는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의 4공신(四功臣)들이 맹족(盟簇:공신 명단을 적은 족자)을 바치는 행사에서 대규모 잔치를 열었다. “풍악이 연주되고 무인(舞人)과 북을 치는 사람이 들어왔다. 양녕대군은 비파(琵琶)를 잡고, 권공(權恭)이 징[錚]을 잡았다. 이리하여 여러 공신이 차례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음악이 장차 마치려고 할 때, 왕도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에서는 흥겨운 잔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치를 파하고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하여 사정전에 나아갔다.”는 기록에서는 술자리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계전이 왕의 술이 과하시니 궁궐로 돌아가실 것을 청하자, 세조는 크게 노하며, “나의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하며, 이계전에게 곤장을 때리게 하고 그의 직책인 병조판서에서도 내려오게 하였다. 이후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왕의 술상인 어상(御床)에서 내려와 왼손으로 이계전을 잡고 오른손으로 신숙주를 잡고는 서로 술잔을 주고받자고 말하였다. 왕의 돌출 행동에 놀란 이계전 등이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자, 세조는 “우리는 옛날의 동료이다. 같이 서서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느냐?”면서 다가섰고, 어색해하면서도 세조의 뜻을 따랐다. 공신들과 자신이 동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과 신하가 잔을 나누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어서 세조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하여 춤을 추게 하였고, 화기애애한 술자리 분위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경복궁의 사정전에서 아침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입시한 신하들은 물론이고, “내금위(內禁衛)·사복(司服)을 궁중의 뜰 동쪽으로 불러서 술을 내려 주고, 거듭 북을 쳐서 입직(入直)한 군사를 뜰로 모이게 하여 술을 내려 주었다.(1461년 4월 10일)”는 기록에서는 호위하는 군사들에게도 술자리를 베풀어주는 세심함을 볼 수 있다. 내금위 군사는 왕을 지키는 금군(禁軍)으로, 현재의 경호실 병력과도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 상당수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내금위 무사들의 공을 인정한 세조는 이들의 관리에도 만전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의 술자리에서 춤은 빠지지 않았다. 창덕궁 선정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북쪽의 야인 정벌에 나선 군사들을 위로하는 행사에서, “세자가 술을 올리고, 구성군 이준(李浚)과 잔치를 모시는 종친(宗親)과 여러 재상과 신하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축원을 기원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자, 이준(李浚:구성군)·정인지·신숙주·한명회·홍윤성·홍달손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호위 군사에게 술을 내려 주어 취할 때까지 마시게 하였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단종에게 왕위를 이어받은 지 두 달이 지난 8월 16일 세조는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의 4공신(四功臣)들이 맹족(盟簇:공신 명단을 적은 족자)을 바치는 행사에서 대규모 잔치를 열었다. “풍악이 연주되고 무인(舞人)과 북을 치는 사람이 들어왔다. 양녕대군은 비파(琵琶)를 잡고, 권공(權恭)이 징[錚]을 잡았다. 이리하여 여러 공신이 차례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음악이 장차 마치려고 할 때, 왕도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에서는 흥겨운 잔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치를 파하고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하여 사정전에 나아갔다.”는 기록에서는 술자리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계전이 왕의 술이 과하시니 궁궐로 돌아가실 것을 청하자, 세조는 크게 노하며, “나의 몸가짐은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어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하며, 이계전에게 곤장을 때리게 하고 그의 직책인 병조판서에서도 내려오게 하였다. 이후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왕의 술상인 어상(御床)에서 내려와 왼손으로 이계전을 잡고 오른손으로 신숙주를 잡고는 서로 술잔을 주고받자고 말하였다. 왕의 돌출 행동에 놀란 이계전 등이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자, 세조는 “우리는 옛날의 동료이다. 같이 서서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느냐?”면서 다가섰고, 어색해하면서도 세조의 뜻을 따랐다. 공신들과 자신이 동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과 신하가 잔을 나누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어서 세조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하여 춤을 추게 하였고, 화기애애한 술자리 분위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경복궁의 사정전에서 아침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입시한 신하들은 물론이고, “내금위(內禁衛)·사복(司服)을 궁중의 뜰 동쪽으로 불러서 술을 내려 주고, 거듭 북을 쳐서 입직(入直)한 군사를 뜰로 모이게 하여 술을 내려 주었다.(1461년 4월 10일)”는 기록에서는 호위하는 군사들에게도 술자리를 베풀어주는 세심함을 볼 수 있다. 내금위 군사는 왕을 지키는 금군(禁軍)으로, 현재의 경호실 병력과도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 상당수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내금위 무사들의 공을 인정한 세조는 이들의 관리에도 만전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사진은 단종의 무덤, 영월 장릉
술자리에서 벌어진 돌발 사건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에 책봉되었던 신숙주와 한명회가 세조와 술자리를 하면서 벌어진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술이 거나해진 세조가 장난기가 발동하면서 신숙주의 팔을 세게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는 신숙주에게 자신의 팔을 세게 비틀어 보라고 하였다. 취기(醉氣)도 있고 한 신숙주는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었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세조는 기분이 몹시 상하였다. 술기운을 이용하여 자신을 능멸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원래 술을 잘하지 못했던 한명회는 멀쩡한 정신으로 상황을 목격했고, 신숙주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원래 신숙주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면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그 집의 종을 시켜 그날은 신숙주가 꼭 바로 잠을 잘 수 있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사람을 시켜 신숙주의 동태를 살피게 했고, 신숙주가 잠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혹 맑은 정신에 술을 빙자해 자신의 팔을 비튼 것이 아닌가 하고 괘씸하게 여겼던 세조는 신숙주가 정말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임을 파악하고는 분노를 거두었다고 한다. 한명회의 기지가 신숙주를 구했다는 일화다.
술자리를 통해 벼락 승진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조참의로 있던 어효첨이란 인물은 “술이 크게 취했으면서도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조에 의해 바로 이조판서에 임명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술자리에서의 실수로 화를 당한 인물도 있었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 제거의 행동대장으로 나섰던 양정(楊汀)은 세조가 왕이 된 후에도 주로 변방 근무를 하였고 이에 불만이 쌓여갔다. 1466년 6월 평안도에서 돌아온 양정이 세조를 알현하자,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서거정 등을 불러 사정전에서 양정의 노고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로 술이 취하고 분위기가 좋아지자 세조는 참여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고, 이에 양정은 욱하는 심정에 술기운을 빌어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오로지 한가롭게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화기애애했던 술자리 분위기는 양정의 돌출 발언으로 확 깨졌다. 세조는 충격 속에서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어찌 왕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라며 승지에게 옥새를 가져 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에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양정을 비판했고, 결국 양정은 술자리의 실수가 빌미가 되어 참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 너그러웠던 세조지만 왕의 자리까지 언급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원래 술을 잘하지 못했던 한명회는 멀쩡한 정신으로 상황을 목격했고, 신숙주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원래 신숙주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면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그 집의 종을 시켜 그날은 신숙주가 꼭 바로 잠을 잘 수 있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사람을 시켜 신숙주의 동태를 살피게 했고, 신숙주가 잠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혹 맑은 정신에 술을 빙자해 자신의 팔을 비튼 것이 아닌가 하고 괘씸하게 여겼던 세조는 신숙주가 정말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임을 파악하고는 분노를 거두었다고 한다. 한명회의 기지가 신숙주를 구했다는 일화다.
술자리를 통해 벼락 승진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조참의로 있던 어효첨이란 인물은 “술이 크게 취했으면서도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조에 의해 바로 이조판서에 임명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술자리에서의 실수로 화를 당한 인물도 있었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 제거의 행동대장으로 나섰던 양정(楊汀)은 세조가 왕이 된 후에도 주로 변방 근무를 하였고 이에 불만이 쌓여갔다. 1466년 6월 평안도에서 돌아온 양정이 세조를 알현하자,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서거정 등을 불러 사정전에서 양정의 노고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로 술이 취하고 분위기가 좋아지자 세조는 참여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고, 이에 양정은 욱하는 심정에 술기운을 빌어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오로지 한가롭게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화기애애했던 술자리 분위기는 양정의 돌출 발언으로 확 깨졌다. 세조는 충격 속에서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어찌 왕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라며 승지에게 옥새를 가져 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에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양정을 비판했고, 결국 양정은 술자리의 실수가 빌미가 되어 참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 너그러웠던 세조지만 왕의 자리까지 언급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회맹제를 치렀던 제단인 회맹단은 현재는 청와대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공신회맹제와 회맹단
수양대군의 주도하에 공신의 책봉을 기념하고, 후대에도 공신의 지위와 명예가 영원히 유지되기를 기원하는 회맹제(會盟祭)를 실시한 점도 주목된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밖에는 공신을 녹훈한 뒤 구리 쟁반에 담은 피를 나누며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를 치렀던 제단인 회맹단(會盟壇)이 있었다. 공신회맹단, 맹단이라고 했고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단으로 불렀다. 현재는 청와대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정선의 그림 「북단송음(北壇松陰)」에는 사각형 모양의 북단이 표시되어 있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수양대군은 40일 후인 11월 20일 공신 회맹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이 주관하는 행사였지만, 실질적으로 수양대군과 공신들을 위한 잔치였다.
『단종실록』에는 “노산군(魯山君)이 공신을 거느리고 성북단(城北壇)에서 맹세하고 환궁하여 길복(吉服)으로 경회루 아래에서 음복(飮福)하였다.”고 한 후, 그 맹세문에, “다행히 천지·조종의 영(靈)에 힘입어 숙부(수양대군)께서 능히 풍상(風霜)의 위세를 떨쳐 기미를 밝게 알고 계책을 결정하여 군흉(群兇)을 전멸하고, 또한 충의의 신하가 있어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서로 함께 모책(謀策)을 돕고 힘을 다하여, 호흡지간에 대악(大惡)을 숙청하고 발란반정(撥亂反正)하여 과궁(寡躬:단종)을 지키고 왕실을 재조(再造)하였습니다. ... 자손 만세토록 오늘을 잊지 말 것이되, 혹 어김이 있으면 신명(神明)이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 맹세를 마음에 간직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과 공신의 힘을 반란을 막은 점을 강조한 단종의 이 선언은 왕위를 물려주는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받는 회맹제를 실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자주 만들며 집권의 안정을 유지해 나갔던 세조. 술자리를 통해 깊은 정을 쌓았기 때문일까? 세조는 임종 직전에 원상제(院相制)를 만들어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같은 측근 공신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은 세조의 공신 세력들이 예종과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훈구파로 그 지위를 공고히 하는 바탕이 되었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수양대군은 40일 후인 11월 20일 공신 회맹제를 성대하게 열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이 주관하는 행사였지만, 실질적으로 수양대군과 공신들을 위한 잔치였다.
『단종실록』에는 “노산군(魯山君)이 공신을 거느리고 성북단(城北壇)에서 맹세하고 환궁하여 길복(吉服)으로 경회루 아래에서 음복(飮福)하였다.”고 한 후, 그 맹세문에, “다행히 천지·조종의 영(靈)에 힘입어 숙부(수양대군)께서 능히 풍상(風霜)의 위세를 떨쳐 기미를 밝게 알고 계책을 결정하여 군흉(群兇)을 전멸하고, 또한 충의의 신하가 있어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서로 함께 모책(謀策)을 돕고 힘을 다하여, 호흡지간에 대악(大惡)을 숙청하고 발란반정(撥亂反正)하여 과궁(寡躬:단종)을 지키고 왕실을 재조(再造)하였습니다. ... 자손 만세토록 오늘을 잊지 말 것이되, 혹 어김이 있으면 신명(神明)이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 맹세를 마음에 간직하여 끝까지 변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양과 공신의 힘을 반란을 막은 점을 강조한 단종의 이 선언은 왕위를 물려주는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받는 회맹제를 실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자주 만들며 집권의 안정을 유지해 나갔던 세조. 술자리를 통해 깊은 정을 쌓았기 때문일까? 세조는 임종 직전에 원상제(院相制)를 만들어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같은 측근 공신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은 세조의 공신 세력들이 예종과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훈구파로 그 지위를 공고히 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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