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서울에서 가볼 만한 역사적 공간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8.06. 15:10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2)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공간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일제는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로 인하여 경성감옥은 1912년 9월 3일 서대문감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 광복 이후인 1945년 11월 서울형무소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1년 12월 서울교도소,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변경된 후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현재의 의왕시)으로 이전하면서, 서대문에 위치했던 구치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정비하는 사업이 시작되어, 1992년 8월 15일에는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5년부터는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하였다.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2010년부터 전시물 교체 정비를 하여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 당시 철거되었던 식당, 격벽장, 여옥사(1979년 철거) 등을 복원해냈으며, 보안과 건물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전시관 지하에 위치한 고문실에서는 당시 일제가 자행한 잔혹한 고문 행위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유관순(柳寬順:1902~1920) 열사가 수감 되었던 여옥사 8호실을 포함한 몇 개의 방은 옥내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 천안의 병천 아우내 장터에 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도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유관순의 이러한 모습은 2019년 ‘항거: 유관순 이야기’라는 영화로 상영되기도 하였다.
감옥에서의 만세 운동 주동 혐의로 유관순은 지하감방에 수감되었고, 고문에 의한 장독이 겹쳐서 1920년 19세의 어린 나이로 순국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지나 독립문으로 가는 길에서 유관순열사 동상을 만날 수 있으며, 열사가 재학했던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고) 안에도 유관순동상과 열사의 사진과 자료 등을 전시한 유관순기념관이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던 독립운동가들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은 선언서 낭독 후 자진해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년을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출소한 후에는 민족의식 계몽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서울시 성북동에는 한용운이 1933년부터 말년을 보낸 거처인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심우장이라는 명칭은 선종(禪宗)의 수행 단계 중의 하나에서 유래한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였던 것이다.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를 제창한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1887~1958) 선생은 1910년 8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한일합병 반대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외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일본 선전 포고문’이나 ‘대한민국 건국강령’ 작성 등을 통하여 독립 외교를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조소앙의 고향인 경기도 양주시에는 ‘조소앙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1919년 3·1운동이후 민족대표들은 체계적인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상하이에서 시작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5월 항저우(杭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는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감시망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김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가싱(嘉興)으로 피신했다. 5월 10일에는 임시정부 청사도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옮겼고, 1935년 11월까지 3년 반 동안 사용되었다.
1935년 11월 전장(鎭江), 1937년 난징에서 우한을 거쳐, 1937년 11월 창사(長沙)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는 고난의 여정을 계속했다. 1938년 7월 다시 광저우(廣州)로, 1938년 11월 류저우(柳州), 1939년 5월 구이양(貴陽)과 치장(綦江)으로 청사를 이전했으며, 1940년 9월 마침내 충칭에 도착했다. 여러 차례 거점을 옮기는 장정(長征)을 거듭한 끝에 8년 5개월 만에 충칭에 도착한 것이었다. 충칭에서도 임시정부는 네 차례 청사를 옮겼고, 해방을 맞이한 마지막 청사는 ‘연화지(蓮花池) 청사’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지상 4층, 지하 3층 건물로 상설전시실 3개와 특별전시실 1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와 행정, 외교, 군사, 재정, 경찰, 문화 활동 등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
원래 이곳에는 정조와 후궁인 의빈(宜嬪)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다. 효창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와 의빈의 이야기는 2021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방송되기도 하였다. 의빈도 사망 후 이곳에 묻혔고 의빈묘라 불렀다. 『정조실록』 1786년 11월 20일에는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렀는데, 효창묘의 왼쪽 산등성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빈묘와 효창묘는 한곳에 있는데, 정조가 의빈 성씨의 생전 소망을 들어준 것이었다.
의빈과 세자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정조가 자주 거둥(행차)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에는 ‘거둥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21년 효창원 등이 있던 조선 왕실의 묘역에 최초의 골프장이 만들어졌으며, 1940년 이후 일제는 이곳의 절반 이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효창공원’이라 하였다. 1944년에는 효창원 등 대부분의 왕실 묘소를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1945년 해방 후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은 효창공원이 있던 곳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하였다. 이봉창((李奉昌:1900~1932), 윤봉길(尹奉吉:1908~1932), 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의 유해를 안장한 삼의사묘(三義士墓)와 이동녕(李東寧:1869~1940), 조성환(曺成煥:1875~1948), 차리석(車利錫:1881~1945) 선생의 유해가 안장된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그곳이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백범은 삼의사 묘역 아래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른다는 뜻의 ‘유방백세(流芳百世)’라는 글씨를 새겼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까지 만들었으나,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효창공원에 백범김구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김구 선생이 이곳에 삼의사 묘역을 조성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혔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경교장(京橋莊:현재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된 후, 1960년 백범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1969년 8월 남산공원 백범광장에 김구 선생 동상을 세웠다. 1998년에는 기념관 건립 사업이 본격화되었고, 2000년 6월 기공식을 거쳐, 2002년 10월에 개관하였다. 현재 이곳은 백범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장소로 활용이 되고 있다.
위에서 소개한 장소 이외에도 서울 곳곳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활동을 기억하는 공간이 많이 남아 있다. 광복 80주년에 역사적 공간을 찾아 가장 힘든 시기에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분투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다짐을 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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