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독서하라! 무더위도 막지 못한 세종·정조의 책읽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7.23. 15:22

수정일 2025.07.23. 15:22

조회 4,091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자리이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자리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101) 역사 속 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

대학교에 이어, 초·중·고등학교에서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올해처럼 무더위가 극심한 여름 피서지 중 한 곳으로 필자는 도서관을 추천한다. 시원한 냉방 속에서 원하는 책을 읽으며 독서 삼매경에 빠져보는 것은 최고의 피서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평가를 받는 세종과 정조는 학자 군주라는 명성답게 학문에 뛰어났으며, 최고의 인재들을 발탁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집현전이나 규장각과 같은 도서관을 설치하여 도서 수집과 학문 연구에 만전을 기한 점 역시 두 왕의 공통점이다. 집현전과 규장각, 그리고 현대 최고의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종, 집현전을 설치하다

1418년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의 네 번째 왕이 된 세종은 학문 연구에 의한 정책 개발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세워서 도서관 기능과 함께 정책 개발의 중심 기관으로 삼았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도서관이자 연구기관으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였다. 1420년 3월 16일 집현전의 직제가 정비되었는데, 궁중에 둔다는 것과,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집현전에 근무하게 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왕의 자문에 대비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자리로 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집현전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컸음을 보여준다. 세종이 집현전을 자주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신숙주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어느 겨울 밤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본 세종이 이곳에서 깜빡 잠이 든 신숙주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덮어준 일화는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집현전에서는 방대한 도서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옛 제도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집현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연구 성과는 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역사서, 유교 경전,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이 집현전에서 완성되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많은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오늘날의 공공기관 감사에 해당하는 감찰 업무를 집현전에서는 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1430년(세종 12) 8월 사헌부에서 집현전 관원들의 근면하고 태만함을 조사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세종은 “집현전은 대궐 안에 있으니 그 출근하고 하지 않는 것을 모두 나에게 아뢰게 하고, 역시 규찰하지는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만큼 집현전 학자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당시 최고의 특산물이었던 귤을 하사하여 학자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도 했다.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집현전에서는 일찍 출근하여 늦게야 끝나서 일관(日官)이 시간을 아뢴 연후에 나가게 하였고, 아침과 저녁에 밥을 먹을 때에는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처럼 대하게 하였으니, 그 우대하는 뜻이 지극하였다.”고 하여 집현전에 대한 세종의 각별한 관심과 총애를 기록하고 있다.

독서를 마음껏 하게 한 사가독서 제도

집현전에는 장기 근속자가 많았다. 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을 집현전에서 근무하였다. 집현전에서 오래 근무한 관리들을 위하여 세종은 ‘왕이 하사하는 독서 제도’라는 의미를 담은,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실시하게 하였다. 사가독서란 심신이 지친 학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이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종 8) 12월에 집현전 학사 권채(權綵), 신석견(辛石堅), 남수문(南秀文) 등을 집에 보내 3개월간 독서를 하면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세종은 이들을 불러,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전에 일하게 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처음 집에서 마음껏 책을 읽게 했으나, 개인의 집이라는 공간은 책을 읽고 연구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이에 세종은 서울 근교에서 독서 하기 좋은 곳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은 서울 근교에서 독서 하기 좋은 곳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은 서울 근교에서 독서 하기 좋은 곳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나이가 젊으며 재주 있고 몸가짐이 단정한 몇 사람을 뽑아 긴 휴가를 주어 번을 나누어 들어와 숙직하게 하며,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에서 그 비용을 제공하였다. 경사(經史), 백가(百家)와 천문, 지리와 의약,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를 이룩하였으니,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고 하여, 세종이 실시한 사가독서제가 독서 문화 정착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세조 때 집현전이 폐지된 이후에도, 사가독서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성종은 용산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남호(南湖)’라 했고, 중종은 현재의 금호동과 옥수동 한강 주변에 독서당을 확대하여 동호(東湖) 독서당이라 하였다. 남호, 동호 모두 한강변에 위치했던 만큼 여름날에는 피서지로 최적이었을 것이다. 한강의 다리 중 동호대교의 명칭은 동호 독서당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무더위를 피해 책을 읽는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이다. 인왕산 자락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정선의 자화상으로 보고 있다. 책들이 쌓여 있는 배경과 여름의 더위를 피해 부채를 손에 쥔 모습이 흥미롭다.
정조는 누각을 짓고,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다.
정조는 누각을 짓고,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다.

정조,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1776년 6월 창덕궁 후원의 중심 공간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도서의 수집과 출판을 통해 학문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이곳을 개혁 정치의 산실로 삼은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책을 읽게 하고 인재를 양성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왕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나 어필(御筆) 등 일부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큰 기능을 하지 못했던 규장각은 정조의 즉위 이후 왕실도서관이자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세손의 신분으로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왕이 남긴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이라 이름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정조는 신하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서향각은 서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말리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서향각은 서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말리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규장각에서는 정조의 학문적 열정이 담긴 수많은 책들이 편찬되었는데, 당시의 목록을 정리한 『군서표기(群書標記)』에는 왕이 직접 저술한 어정서(御定書) 87종, 왕명으로 신하들이 편찬한 명찬서(命撰書) 64종으로, 책의 총수는 3,960권에 이른다. 명찬서에는 『이충무공전서』 14권도 포함되어 있는데, 정조 때 이순신 장군의 전집이 편찬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규장각에는 신하들인 각신(閣臣)들이 모여 책을 읽고 연구했던 본관 규장각과 주합루 이외에도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摛文院)을 두었고,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曝曬: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을 할 수 있는 부용정(芙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중국 도서 2만여 책을 분류, 보관하였는데, 1781년에 정조는 서호수(徐浩修)에게 중국본 도서를 정리하여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는 목록을 만들도록 하였다.
주합루에 서서 내려다본 부용지와 어수문
주합루에 서서 내려다본 부용지와 어수문

국립중앙도서관의 역사

현재를 대표하는 도서관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의 기원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 2월에 개관한 대한도서관으로 보고 있다. 대한도서관은 회현동 미동(美洞:현재 을지로 1가) 이용문의 집을 임시사무소로 하여 개관한 후, 3월 25일에 대한제국 궁내부 종부시 청사로 이전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대한도서관의 장서들은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몰수되었고, 1923년 11월 조선헌병대사령부(현재 남산한옥마을)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도서관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1925년 4월 남대문통 석고단(현재 소공동 롯데 백화점 자리)에 새로운 청사를 마련하고 정식 개관하였다.
서초역 방향에서 '누에다리'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다본 국립중앙도서관
서초역 방향에서 '누에다리'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다본 국립중앙도서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본격적인 국립도서관 시대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15일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건물, 장서, 인력을 계승하여 국립도서관을 개관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국립도서관은 문교부 소속 기관이 되었으며, 1963년 명칭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칭하였다. 현재의 국립중앙도서관도 문교부에서 그 명칭이 바뀐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이다. 롯데백화점 본점 1층 주차장 한쪽에는 1992년에 세운 ‘국립중앙도서관 옛터’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이 국립도서관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소공동 일대에 롯데백화점 부지가 조성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은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였고, 1974년 12월 남산에 어린이회관이 있던 곳으로 이전하였다. 1974년 능동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고, 어린이회관을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은 남산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원래 어린이회관 건물은 현재 서울 교육연구정보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시절 국립중앙도서관은 산에 둘러싸인 시원하고 낭만적인 장소였다. 198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국립중앙도서관의 강남 지역 이전이 추진되었고, 1988년 5월 마침내 현재의 서초구 반포동에 자리를 잡았다. 필자는 개관 직후 긴 줄을 서서 이곳 열람실에 들어간 기억이 있다. 지상 7층, 지하 1층의 본관, 자료보존관, 사서연수관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 앞에 있는 디지털 도서관은 정보화 시대에 맞추어 2009년 5월 개관하였다. 17세기 이전에 간행된 귀중본 3,850여책을 포함, 총 300만여 책과 더불어 42만점에 달하는 사진, 영상, CD-ROM, 마이크로 필름, 음향자료, 지도자료 등이 있다.
누에다리는 몽마르뜨 공원과 서리풀 공원을 이어주는데, 반포대로 위에 설치되어 있다.
누에다리는 몽마르뜨 공원과 서리풀 공원을 이어주는데, 반포대로 위에 설치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정문 쪽을 나서면 ‘누에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원래 넓은 뽕나무밭인 잠실(蠶室)이 있어서, 누에 모양을 한 다리를 조성한 것이다. 이 일대를 잠원동(蠶院洞)이라고 칭하는 것은 잠실과 함께, 이곳에 여행자의 숙소인 신원(新院)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에다리는 몽마르뜨 공원과 서리풀 공원을 이어주는데, 반포대로 위에 설치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나와 서리풀 공원으로 가는 산책로 역시 독서 후 피서를 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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