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은 독립운동가들! 바다 건너 낯선 땅에서 독립을 외치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8.20. 17:38

서울역사박물관에서 8월 31일까지 열리는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특별전시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3) 해외로 간 독립운동가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2025년 8월 31일까지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특별전시회를 하고 있다. 이상룡은 강제병합 이후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이상룡과 같이 해외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우당 이회영 선생 6형제가 있으며, 남자현, 윤희순, 조마리아, 권기옥 등 해외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찾아가 본다.
석주 이상룡 선생 특별전과 안동 임청각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1858년 안동 임청각(臨淸閣)에서 출생하였다. 임청각은 99칸의 저택이었으나, 일제 강점 시기 중앙선 철로를 이곳에 놓음으로써 반 이상의 저택이 사라졌다.
어린 시절을 안동에서 보낸 필자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고택 임청각(臨淸閣)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님과 아침 일찍 집 근처 영남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임청각과 신세동 칠층 전탑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들 유적이 철로 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 기차 소리를 들었던 기억은 선명하다. 일제는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임청각의 절반 가까이를 훼손시켰다. 안동시에서는 중앙선 철로 이설과 함께 임청각 복원사업을 중앙 정부와 함께 추진하고 있으며, 2025년 완료할 예정이다.
어린 시절을 안동에서 보낸 필자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고택 임청각(臨淸閣)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님과 아침 일찍 집 근처 영남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임청각과 신세동 칠층 전탑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들 유적이 철로 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 기차 소리를 들었던 기억은 선명하다. 일제는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임청각의 절반 가까이를 훼손시켰다. 안동시에서는 중앙선 철로 이설과 함께 임청각 복원사업을 중앙 정부와 함께 추진하고 있으며, 2025년 완료할 예정이다.

안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 (2017년 모습)
이상룡 선생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1월 27일 53세의 이상룡은 식솔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수레로 건너며 ‘도강(渡江)’)이라는 시를 남겼다. “차라리 머리가 떨어질지언정, 무릎을 꿇고서 종이 되지는 않으리. 집 나선 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 벌써 압록강을 건너버렸네. 누굴 위해 발길을 머뭇거리랴? 가슴 펴고 나는 가리라.” 서간도로 간 이상룡은 이회영, 이시영 등의 동지들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1912년에는 애국계몽 단체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이 되었으며,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상룡은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 보다는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던 그의 유해는 중국 하얼빈에 안장되어 있다가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12년에는 애국계몽 단체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이 되었으며,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상룡은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 보다는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던 그의 유해는 중국 하얼빈에 안장되어 있다가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국립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8월 31일까지 특별전시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이 열린다.
이번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에선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 속 각종 문학작품과 취지서, 서간 등을 59건의 서예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임청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됐던 기록과 임청각 복원사업도 확인할 수가 있다. 임청각은 이상룡 이외에도 독립운동가를 대거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2018년 광복절에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 2019년 3·1절에는 부인 김우락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면서, 임청각 출신 독립유공자는 11명이 되었다.
해외로 간 이회영과 그 형제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弼雲臺)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배화여고 교정 안에 있다. 위로는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시영과 호영의 6형제였다. 이회영은 일찍부터 관직을 포기하고 항일 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이회영기념관 입구의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흉상
1896년부터 의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황해도 인삼포를 경영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늑약을 주도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준비했다. 1906년 부친의 사망 후 집안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는데, 이상룡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명동 일대에 소재한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거처를 옮겼다. 보다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해서였고, 이상룡과 더불어 경학사의 설립이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1년 6월 유하현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개소식이 있었다. 독립에 필요한 무장 군사력을 기르려는 목적이 컸다. 1912년 7월 ‘합니하’라는 물길이 360도 해자(垓字)처럼 감도는 천연의 요새 지역에 정식 학교를 설립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5월 류허현 고산자(孤山子)로 본부를 옮기면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했으며,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했다. 1924년에는 항일무장 투쟁을 위하여 의열단 조직을 적극 후원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 나섰지만, 1932년 일경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은 한산 이씨 부인 이은숙과 국립현충원에 합장되어 있다.
1913년에는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했으며,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했다. 1924년에는 항일무장 투쟁을 위하여 의열단 조직을 적극 후원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항일 무장 투쟁에 적극 나섰지만, 1932년 일경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은 한산 이씨 부인 이은숙과 국립현충원에 합장되어 있다.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가 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을 뒷바라지하면서, 쓴 회고록인 ‘서간도 시종기’를 남겼다. 명동성당 맞은편 골목길 한편에는 여섯 형제가 살았던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된 이회영 선생 동상과 표지석이 남아 있다. 이시영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고, 유일하게 해방을 맞이했던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활약했고, 신흥대학(현재의 경희대학교)을 설립했다. 남산공원에는 이시영의 동상이 있다. 2021년 남산 예장동 자락에 개관했던 ‘이회영 기념관’은 2024년 7월 17일, 사직동 옛 선교사 주택으로 옮겨 재개관했다.
해외에서도 이름을 떨친 여성 독립운동가들
유관순 열사처럼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이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들 중에는 해외에서 활동한 인물도 많았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는 아들이 순국한 후 안의사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후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1920년 1월 30일자 독립신문에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1919년 10월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 지역으로 들어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조마리아는 상해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위상과 적극적인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대모 역할을 했다. 1927년 상해에서 사망했으며,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1920년 1월 30일자 독립신문에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1919년 10월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 지역으로 들어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조마리아는 상해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라는 특별한 위상과 적극적인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들과 교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대모 역할을 했다. 1927년 상해에서 사망했으며,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노들섬에서 열린 ‘여성 독립운동가 80인 초상화전’ 전시를 관람하는 시민들.
남자현(南慈賢:1872~1933) 의사는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배우 전지현 역, 영화에서는 안옥윤으로 나옴)의 실제 모습과 닮아있다. 남편이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후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하여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였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 신장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5년 일본 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실패한 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협력에 힘을 기울였다.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된 후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흰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기도 하였다. 1933년 다시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살해를 시도하다가 체포된 후 하얼빈에서 순국하였다. 유해는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윤희순(尹熙順:1860~1935) 의사는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895년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을미의병,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때 여성으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하여 항전하였다.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5년까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1994년 유해가 국내에 봉환되어, 현재는 아들 유돈상, 시아버지 유홍석과 함께 춘천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權基玉:1901~1988)은 비행사가 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 평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기옥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23년 중국의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이후 중국 공군의 비행사로 복무하면서 항일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1943년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들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조성되어 있다.
윤희순(尹熙順:1860~1935) 의사는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895년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을미의병,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때 여성으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하여 항전하였다.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5년까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1994년 유해가 국내에 봉환되어, 현재는 아들 유돈상, 시아버지 유홍석과 함께 춘천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權基玉:1901~1988)은 비행사가 되어 조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 평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기옥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23년 중국의 운남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이후 중국 공군의 비행사로 복무하면서 항일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1943년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들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조성되어 있다.

보라매공원에 세워져 있는 김마리아 선생 동상
이외에도 김마리아(1891~1944) 선생은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고 간호사 출신의 독립단체인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자혜(朴慈惠:1895~1943) 선생은 남편인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제 강점 시기에는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생애를 바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과 노력은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고, 광복이라는 빛을 다시 찾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2025년 8월에 조국을 위해 뜨겁게 살아갔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한다.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고 간호사 출신의 독립단체인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자혜(朴慈惠:1895~1943) 선생은 남편인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제 강점 시기에는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생애를 바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과 노력은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고, 광복이라는 빛을 다시 찾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2025년 8월에 조국을 위해 뜨겁게 살아갔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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