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째 행방 묘연…국내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 미스터리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5.08.27. 16:55


청와대가 수집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출품작들. 지난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린 특별전시.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찾기 (38) 지상 최대의 미술품 도난 사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도둑질은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실제 물건을 도둑질하는 사건 중에 규모가 커지기 쉬운 것은 미술품, 그 중에서도 특히 회화 작품인 경우가 많다. 회화 작품은 종이나 천에 그려진 그림이므로 그 크기가 작으면서도 가격은 비싸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한국 작가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큰 액수로 거래된 그림은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된 김환기 화백의 ‘우주’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의 낙찰 금액은 당시 환율로 132억 원에 달했다. 132억 원이라는 금액을 황금 덩어리로 훔친다면 어지간한 사람의 몸무게가 훌쩍 넘어 가는 무게가 된다. 그런 물건은 빠른 시간 안에 빼내기도 어렵고 그것을 갖고 멀리 도망치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림이라면 설령 132억 원 짜리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둘둘 말아 한 팔에 끼고 나올 수도 있을 만큼 가볍다.
그렇다면 그림 도둑질로 한정했을 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도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이것도 액수 기준으로 따지기란 쉽지 않다. 그림의 가격은 거래하는 시장의 상황이나 시대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2015년 서울옥션에서 ‘의겸등필수월관음도’라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 18억 원이나 되는 고액에 낙찰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1730년에 이 그림이 처음 그려졌을 때는 어느 절에나 걸려 있음 직한 흔한 그림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식으로 과거의 그림 가치를 지금 얼마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불확실한 점이 많다.
그러나 만약 가격이 아니라 양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할 만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품 도난 사건이 1978년에 벌어졌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건이다. 사건은 대전에서 벌어졌는데 일단 사건이 벌어진 구체적인 장소부터 매우 특이하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한국 작가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큰 액수로 거래된 그림은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된 김환기 화백의 ‘우주’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의 낙찰 금액은 당시 환율로 132억 원에 달했다. 132억 원이라는 금액을 황금 덩어리로 훔친다면 어지간한 사람의 몸무게가 훌쩍 넘어 가는 무게가 된다. 그런 물건은 빠른 시간 안에 빼내기도 어렵고 그것을 갖고 멀리 도망치기도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림이라면 설령 132억 원 짜리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둘둘 말아 한 팔에 끼고 나올 수도 있을 만큼 가볍다.
그렇다면 그림 도둑질로 한정했을 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도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이것도 액수 기준으로 따지기란 쉽지 않다. 그림의 가격은 거래하는 시장의 상황이나 시대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2015년 서울옥션에서 ‘의겸등필수월관음도’라는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이 18억 원이나 되는 고액에 낙찰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1730년에 이 그림이 처음 그려졌을 때는 어느 절에나 걸려 있음 직한 흔한 그림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식으로 과거의 그림 가치를 지금 얼마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불확실한 점이 많다.
그러나 만약 가격이 아니라 양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할 만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품 도난 사건이 1978년에 벌어졌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건이다. 사건은 대전에서 벌어졌는데 일단 사건이 벌어진 구체적인 장소부터 매우 특이하다.

한국 작가의 그림 중 가장 큰 액수로 거래된 김환기의 작품 '우주(Universe 5-IV-71 #200)'를 관람하는 시민
1978년, 국내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대규모 미술품 도난 사건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혹은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은 어느 부자의 집이나 미술품의 가치를 평가해 보관하고 있는 은행 금고 같은 곳이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78년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그 중 어느 곳도 아니었다.
1978년 대한민국 역사상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초대형 미술품 도난 사건은 놀랍게도 흔히 ‘대전여상’이라고 말하는 대전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벌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여자 상업 고등학교의 고등학생 도둑이 어떤 묘한 방법으로 비싼 그림을 훔친 것일까?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런 사건은 전혀 아니다. 이 사건이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벌어진 이유는 바로 그때 국전 전시회 행사가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대개 ‘1978년 제27회 국전 전시회 작품 도난 사건’이라고 부른다.
국전이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줄임말이다. 요즘 국전이라고 하면 게임이나 게임 관련 물건을 잘 파는 곳으로 유명한 서울 서초동 국제전자센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국전은 한국의 수많은 화가 나아가 예술가들이 꿈꾸는 무대였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부는 예술 방면에서도 다양한 발전 계획을 세웠다. 한국 미술은 개항 이후 20세기 초에 접어들어 세계 미술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광복으로 한국의 여러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급격히 빠져나가면서 한국 미술계는 미술품을 사거나 평가하고 거래하는 문제에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큰돈을 주고 미술품을 사거나 그런 사람을 위해 미술품을 평가할 사람들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술품을 보고 거래하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너무 나빴다. 먹고 살기 위한 산업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대에 미술품을 평가하는 안목을 갖고 활발히 거래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다리자면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1978년 대한민국 역사상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초대형 미술품 도난 사건은 놀랍게도 흔히 ‘대전여상’이라고 말하는 대전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벌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던 여자 상업 고등학교의 고등학생 도둑이 어떤 묘한 방법으로 비싼 그림을 훔친 것일까?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런 사건은 전혀 아니다. 이 사건이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벌어진 이유는 바로 그때 국전 전시회 행사가 대전여상 체육관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대개 ‘1978년 제27회 국전 전시회 작품 도난 사건’이라고 부른다.
국전이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줄임말이다. 요즘 국전이라고 하면 게임이나 게임 관련 물건을 잘 파는 곳으로 유명한 서울 서초동 국제전자센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 국전은 한국의 수많은 화가 나아가 예술가들이 꿈꾸는 무대였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부는 예술 방면에서도 다양한 발전 계획을 세웠다. 한국 미술은 개항 이후 20세기 초에 접어들어 세계 미술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광복으로 한국의 여러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급격히 빠져나가면서 한국 미술계는 미술품을 사거나 평가하고 거래하는 문제에서 혼란을 겪게 되었다. 큰돈을 주고 미술품을 사거나 그런 사람을 위해 미술품을 평가할 사람들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미술품을 보고 거래하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너무 나빴다. 먹고 살기 위한 산업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시대에 미술품을 평가하는 안목을 갖고 활발히 거래할 만한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다리자면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메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의 시작
그래서 1948년 정부 부처인 문교부의 고시로 시작된 행사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곧 국전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국전을 시행한다는 고시가 문교부 제1호 고시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만큼 문화 예술 분야를 상징하는 행사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국전에서는 수많은 국내 미술가들이 내어놓은 작품들을 정부 당국에서 선정한 심사위원들이 평가한 뒤 그중에 입선작을 골라서 전시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부의 권위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 중 뛰어난 것을 선별하고 평가해서 예술의 수준과 예술가들의 명예를 보장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행사다.
행사의 틀은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광복 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가 약칭 ‘선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적이 있었고 1947년에도 미군정청 문교부가 주도한 ‘조선종합미술전’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국전에서는 수많은 국내 미술가들이 내어놓은 작품들을 정부 당국에서 선정한 심사위원들이 평가한 뒤 그중에 입선작을 골라서 전시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부의 권위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 중 뛰어난 것을 선별하고 평가해서 예술의 수준과 예술가들의 명예를 보장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행사다.
행사의 틀은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광복 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람회’가 약칭 ‘선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적이 있었고 1947년에도 미군정청 문교부가 주도한 ‘조선종합미술전’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1923년 6월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관람 사진. 장소는 영락정(저동)에 자리한 상품진열관.
국전은 그런 행사를 대한민국 정부의 권위로 규모를 키워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선정된 입선작 중에 뛰어난 작품을 특선작으로 꼽고 특선작 중에 다시 문교부장관상, 국무총리상, 대통령상을 뽑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상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광복 이후 한 세대 동안 국선 입선작이라든가 국선 특선 작가라고 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나타내는 훌륭한 보증이 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만큼 국전 입선작 전시회는 어찌 보면 그 시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행사라고 할 만했다.
그렇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 행사였던 만큼 1978년의 국전은 그런대로 잘 운영되는 것 같았다. 상반기에는 어느 정도의 문제 지적도 있었다. 당시 국전은 봄과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열리고 있어서 흔히 ‘봄 국전’, ‘가을 국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봄 국전의 경우에는 심사위원들이 가장 높은 상인 대통령상 작품을 선정하지 못했다. 그 말은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을 만한 작품이 국전에 출품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국전에 수준 높은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가져올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하반기에 들어 가을 국전이 개최되면서 분위기는 어느 정도 뒤집혔던 것 같다. 당시 당국은 봄 국전에서는 공예, 서예, 건축 등을 심사하여 그에 대한 전시회를 개최했고, 가을 국전에서는 전통적인 그림, 조각을 대상으로 심사와 전시회를 개최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 다행히 가을 국전에서는 대통령상 수상자도 선정되었다. 1990년대까지도 활동한 황창배 화백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광복 이후 한 세대 동안 국선 입선작이라든가 국선 특선 작가라고 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나타내는 훌륭한 보증이 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만큼 국전 입선작 전시회는 어찌 보면 그 시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행사라고 할 만했다.
그렇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 행사였던 만큼 1978년의 국전은 그런대로 잘 운영되는 것 같았다. 상반기에는 어느 정도의 문제 지적도 있었다. 당시 국전은 봄과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열리고 있어서 흔히 ‘봄 국전’, ‘가을 국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봄 국전의 경우에는 심사위원들이 가장 높은 상인 대통령상 작품을 선정하지 못했다. 그 말은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을 만한 작품이 국전에 출품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국전에 수준 높은 좋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가져올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하반기에 들어 가을 국전이 개최되면서 분위기는 어느 정도 뒤집혔던 것 같다. 당시 당국은 봄 국전에서는 공예, 서예, 건축 등을 심사하여 그에 대한 전시회를 개최했고, 가을 국전에서는 전통적인 그림, 조각을 대상으로 심사와 전시회를 개최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 다행히 가을 국전에서는 대통령상 수상자도 선정되었다. 1990년대까지도 활동한 황창배 화백이 그 주인공이었다.
1978년 가을 국전 수상작, 서울에 이어 지방순회 전시회 개최
그래서인지 가을 국전은 봄 국전에 비하면 더 활기찬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라고 부르는 덕수궁 경내에 있는 미술관에서 10월 2일 가을 국전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개최 전에는 황창배 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총리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10월 7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행렬이 덕수궁을 구경하고 국전 전시회를 둘러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즐겼음을 전하기도 했다.
국전 작품을 처음으로 일반 공개하는 이 전시회는 별 큰 문제 없이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대한민국 전시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을 국전 수상작과 초대 작가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지방순회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1월 7일에서 20일까지 예정으로 대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대전 전시회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전시회 시작과 대부분의 운영 기간동안 특별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는 없다. 11월 2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어느 정도의 입장료를 받은 유료 전시회였는데도 하루 800명에서 1,000명이 관람하는 등 1970년대 한국의 미술 전시회치고는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다들 이만하면 국전이 부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만한 좋은 느낌으로 행사가 흘러갔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사는 아니다. 당시 대전의 미술 전시회 장소는 대전여상 체육관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전시회를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연다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한국의 문화 예술의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다.
1978년 당국에서도 이런 상황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아일보 보도에는 이것이 대전에서 6년 만에 열리는 행사라고 되어 있다. 지방 순회를 위한 전시관 사정이 좋지 않아 그만큼 지방 주민들이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제약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당국으로서는 국전을 큰 행사로 키우기 위해 그림 크기를 줄이고 전문 전시장이 아닌 곳이라도 섭외해서 최대한 그림을 더 많은 주민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국전 작품을 처음으로 일반 공개하는 이 전시회는 별 큰 문제 없이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대한민국 전시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을 국전 수상작과 초대 작가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지방순회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1월 7일에서 20일까지 예정으로 대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대전 전시회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전시회 시작과 대부분의 운영 기간동안 특별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는 없다. 11월 2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어느 정도의 입장료를 받은 유료 전시회였는데도 하루 800명에서 1,000명이 관람하는 등 1970년대 한국의 미술 전시회치고는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다들 이만하면 국전이 부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만한 좋은 느낌으로 행사가 흘러갔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사는 아니다. 당시 대전의 미술 전시회 장소는 대전여상 체육관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전시회를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연다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한국의 문화 예술의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다.
1978년 당국에서도 이런 상황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아일보 보도에는 이것이 대전에서 6년 만에 열리는 행사라고 되어 있다. 지방 순회를 위한 전시관 사정이 좋지 않아 그만큼 지방 주민들이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제약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당국으로서는 국전을 큰 행사로 키우기 위해 그림 크기를 줄이고 전문 전시장이 아닌 곳이라도 섭외해서 최대한 그림을 더 많은 주민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덕수궁 경내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78년 당시 국전 작품을 공개했다.
빈 액자들이 가득 걸린 체육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남지부의 장 사무국장이라는 사람은 국전의 그 많은 그림들이 대전을 떠나기 하루 전인 11월 19일 아침 8시 30분에 전시 장소인 체육관에 왔다. 그리고 지난 12일 간의 아침과 똑같이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는 그때 그 어떤 그림의 풍경보다도 초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체육관에 가득 전시되어 있던 그 많은 그림들이 칼로 잘려 나가 버리고 빈 액자들이 가득 걸려 있었던 것이다.
조사해 보니 당시 범인들이 잘라 간 그림들의 숫자는 무려 58점에 달했다. 대전 전시회에 걸려 있던 그림의 숫자는 총 165점이었다고 하므로 전시된 모든 그림의 3분의 1 이상을 범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훔쳐 간 셈이다. 이 정도 규모면 거의 미술관 하나를 통째로 훔쳐 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초대형 절도 사건이었다. 이런 정도의 미술품 도난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이전에도 없었고 2025년 현재까지 이후에도 없었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노리는 대형 절도 사건으로는 세계사에도 유래가 드물 만큼 기이한 초대형 사건이었다.
범인은 그림을 빠르게 훔쳐서 쉽게 도망가기 위해서 액자는 그대로 두고 유리를 제거한 뒤에 그림을 칼로 잘라갔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액자에 물려 있는 그림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이 약간 잘려 나가게 되는데 어차피 그림을 훔쳐 돈을 받고 팔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도둑들은 이 정도의 예술품 훼손은 개의치 않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이렇게 많은 그림을 훔쳐 갔다면 범인은 한 명이라기 보다는 여러 명의 도둑이 힘을 합친 팀일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범인들은 어떻게 침입해서 무슨 수로 그림을 훔쳐 갔을까? 우선 장 사무국장은 정상적으로 남쪽 출입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2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북쪽 출입문의 자물쇠는 어떤 기구를 사용해 연 흔적이 있고 그에 따라 철문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범인들은 자물쇠를 몰래 여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그 기술을 활용해 북쪽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다.
자물쇠를 여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들은 자물쇠 여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관람객으로 가장하고 사람들이 많은 체육관 안으로 낮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숨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없는 밤이 될 때까지 체육관 한 켠의 어느 장소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나와서 그림을 훔치고 이후 안에서 북쪽 출입문 자물쇠를 연 뒤에 그곳을 통해 도망쳤을 수 있다. 그림의 양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차량을 담당하는 범인이 따로 한 명 있어서 그림을 다 훔칠 무렵에 시간 약속을 하고 건물 바깥길에서 만나 도주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등학교 체육관을 빌려서 한 행사라고는 하지만 밤새 경비하는 사람이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기사에서는 45세의 임시 경비원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원래 우유 배달원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일당 3,000원을 받고 임시 경비원을 하고 있었다. 이 경비원은 밤마다 스티로폼으로 된 깔개를 체육관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체육관을 지켰다. 그런데 19일에는 마침 낮에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하게 되어 너무나 피곤했고 그래서 체육관에 나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잠을 잤다고 기사는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이 경비원은 주최측에 체육관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미리 전화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최측에서는 그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주장이 엇갈렸다. 기사에서는 일단 이 경비원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누구 쪽의 주장이 사실이든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 갈 무렵이 되니 아무래도 더 이상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라고 방심했던 것 아닌가 싶다.
조사해 보니 당시 범인들이 잘라 간 그림들의 숫자는 무려 58점에 달했다. 대전 전시회에 걸려 있던 그림의 숫자는 총 165점이었다고 하므로 전시된 모든 그림의 3분의 1 이상을 범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훔쳐 간 셈이다. 이 정도 규모면 거의 미술관 하나를 통째로 훔쳐 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초대형 절도 사건이었다. 이런 정도의 미술품 도난 사건은 한국 역사에서 이전에도 없었고 2025년 현재까지 이후에도 없었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노리는 대형 절도 사건으로는 세계사에도 유래가 드물 만큼 기이한 초대형 사건이었다.
범인은 그림을 빠르게 훔쳐서 쉽게 도망가기 위해서 액자는 그대로 두고 유리를 제거한 뒤에 그림을 칼로 잘라갔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액자에 물려 있는 그림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이 약간 잘려 나가게 되는데 어차피 그림을 훔쳐 돈을 받고 팔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도둑들은 이 정도의 예술품 훼손은 개의치 않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이렇게 많은 그림을 훔쳐 갔다면 범인은 한 명이라기 보다는 여러 명의 도둑이 힘을 합친 팀일 가능성이 높다. 도대체 범인들은 어떻게 침입해서 무슨 수로 그림을 훔쳐 갔을까? 우선 장 사무국장은 정상적으로 남쪽 출입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2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북쪽 출입문의 자물쇠는 어떤 기구를 사용해 연 흔적이 있고 그에 따라 철문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범인들은 자물쇠를 몰래 여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그 기술을 활용해 북쪽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다.
자물쇠를 여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들은 자물쇠 여는 일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관람객으로 가장하고 사람들이 많은 체육관 안으로 낮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숨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없는 밤이 될 때까지 체육관 한 켠의 어느 장소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나와서 그림을 훔치고 이후 안에서 북쪽 출입문 자물쇠를 연 뒤에 그곳을 통해 도망쳤을 수 있다. 그림의 양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차량을 담당하는 범인이 따로 한 명 있어서 그림을 다 훔칠 무렵에 시간 약속을 하고 건물 바깥길에서 만나 도주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등학교 체육관을 빌려서 한 행사라고는 하지만 밤새 경비하는 사람이 애초부터 아무도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기사에서는 45세의 임시 경비원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원래 우유 배달원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일당 3,000원을 받고 임시 경비원을 하고 있었다. 이 경비원은 밤마다 스티로폼으로 된 깔개를 체육관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체육관을 지켰다. 그런데 19일에는 마침 낮에 아버지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하게 되어 너무나 피곤했고 그래서 체육관에 나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잠을 잤다고 기사는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이 경비원은 주최측에 체육관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미리 전화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최측에서는 그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주장이 엇갈렸다. 기사에서는 일단 이 경비원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누구 쪽의 주장이 사실이든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 갈 무렵이 되니 아무래도 더 이상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라고 방심했던 것 아닌가 싶다.

국제 아트페어(미술품 장터) '키아프 서울(Kiaf SEOUL) 2024'를 찾은 관람객들
훔친 그림, 정말 큰 돈이 될까?
범인들은 어떤 인물일까? 일단 165점의 그림 중에 58점의 그림을 어떻게 골라 갔느냐를 수사 당국은 살펴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눈여겨볼 만한 대통령상 수상작인 ‘秘51’은 도난당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좋아 보이는 위치에 눈에 잘 뜨이는 그림부터 마구잡이로 집어 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초창기 기사를 보면 범인들이 초대 작가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림을 골라 간 것을 지적하면서 나름대로 팔아 치우기 좋은 그림을 훔쳐 간 것 같다는 추측이 눈에 보인다. 그 말은 그림을 거래하는 데 대해서, 특히 훔친 그림을 몰래 거래하는 데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범인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미술품 절도 사건에서 그림이 가볍고 비싸다는 점은 범인에게 유리한 장점이지만, 반대로 그 그림을 돈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점은 범인 입장에서는 최대의 단점이다. 그림은 쌀이나 종이처럼 시장통에서 그냥 적당히 팔아 치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림을 금처럼 잘게 잘라서 수시로 나누어 팔 수도 없다. 비싸고 좋은 그림이 있을수록 그 비싸고 좋은 그림을 그만한 돈을 내고 살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야만 그림은 돈이 된다. 그런데 그 정도로 그림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부유한 사람이 굳이 위험하게 범죄자들과 훔친 그림을 거래하고 싶어 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첫째로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찾아내고, 둘째로 돈도 많은 사람을 찾아내고, 동시에 셋째로 그림에 얽힌 법적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만 그림 도둑은 돈을 만질 수 있다.
이런 일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 2023년 9월 26일 중앙일보에는 유명한 ‘산울림’ 사건을 소개했다. 이것은 김환기 화백의 그림 ‘산울림’에 얽힌 사건이다. 1970년대부터 김환기 화백과 연락하던 박 교수라는 인물이 그의 그림을 그 무렵에 사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 교수가 힘겹게 투병하며 세상을 떠날 무렵 즈음해서 그가 보관하고 있던 그림이 사라졌다. 기사에서는 2018년 말에 교수의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 교수의 제자 등이 짜고 그림을 빼돌렸다는 추측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사라진 그림 중에 ‘산울림’이라는 그림을 판매하겠다는 사람이 2019년 6월에 나타났다. 교수의 유가족은 모르는 척하고 그에게 접근해 그림을 확인했는데 과연 유가족이 본 적이 있는 ‘산울림’이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은 경찰에 알려졌고 유가족들은 법적 분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뻔히 그림을 보면서도 유가족들은 ‘산울림’을 쉽게 회수할 수 없었다.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은 그 그림을 합법적으로 샀다고 주장했고 당시 시점에서 그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미술품 판매한 사람에게 지불한 돈은 39억 5,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초창기 기사를 보면 범인들이 초대 작가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림을 골라 간 것을 지적하면서 나름대로 팔아 치우기 좋은 그림을 훔쳐 간 것 같다는 추측이 눈에 보인다. 그 말은 그림을 거래하는 데 대해서, 특히 훔친 그림을 몰래 거래하는 데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범인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미술품 절도 사건에서 그림이 가볍고 비싸다는 점은 범인에게 유리한 장점이지만, 반대로 그 그림을 돈으로 바꾸기 어렵다는 점은 범인 입장에서는 최대의 단점이다. 그림은 쌀이나 종이처럼 시장통에서 그냥 적당히 팔아 치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림을 금처럼 잘게 잘라서 수시로 나누어 팔 수도 없다. 비싸고 좋은 그림이 있을수록 그 비싸고 좋은 그림을 그만한 돈을 내고 살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야만 그림은 돈이 된다. 그런데 그 정도로 그림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부유한 사람이 굳이 위험하게 범죄자들과 훔친 그림을 거래하고 싶어 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첫째로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찾아내고, 둘째로 돈도 많은 사람을 찾아내고, 동시에 셋째로 그림에 얽힌 법적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만 그림 도둑은 돈을 만질 수 있다.
이런 일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 2023년 9월 26일 중앙일보에는 유명한 ‘산울림’ 사건을 소개했다. 이것은 김환기 화백의 그림 ‘산울림’에 얽힌 사건이다. 1970년대부터 김환기 화백과 연락하던 박 교수라는 인물이 그의 그림을 그 무렵에 사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 교수가 힘겹게 투병하며 세상을 떠날 무렵 즈음해서 그가 보관하고 있던 그림이 사라졌다. 기사에서는 2018년 말에 교수의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 교수의 제자 등이 짜고 그림을 빼돌렸다는 추측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사라진 그림 중에 ‘산울림’이라는 그림을 판매하겠다는 사람이 2019년 6월에 나타났다. 교수의 유가족은 모르는 척하고 그에게 접근해 그림을 확인했는데 과연 유가족이 본 적이 있는 ‘산울림’이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은 경찰에 알려졌고 유가족들은 법적 분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뻔히 그림을 보면서도 유가족들은 ‘산울림’을 쉽게 회수할 수 없었다.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은 그 그림을 합법적으로 샀다고 주장했고 당시 시점에서 그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미술품 판매한 사람에게 지불한 돈은 39억 5,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미술품 전문 도둑 VS 경험 부족한 ‘보통’ 도둑
그런데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시켜서 그림을 팔아넘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품 절도 사건에는 이런 복잡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전문가나 경험 많은 사람이 항상 개입되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1978년 국전 도난 사건에서도 미술품 전문 도둑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면서도 앞서의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다른 미술품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미술품 전문 도둑의 솜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정반대의 의견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 이유는 1978년 국전 전시회에 소개된 그림들을 도저히 들키지 않고 거래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고 작가의 그림이라면 해외의 장물아비에게 연락해 빼돌려 어디라도 그 그림을 아는 사람을 널리 찾아서 팔아버린다는 식의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전에 소개되는 작가의 그림이라면 그런 식으로 거래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58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그림이 사라지는 대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소리 소문 없이 몰래 그림을 처분하기는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당시 신문은 이때 도난당한 모든 그림들의 목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오히려 인근 지역에 몰래 침입해서 도둑질할 정도의 재주는 갖추고 있었던 보통 도둑이 범인인 것 아닐까? 그저 ‘요즘 그림도 큰돈이 된다더라’는 정도의 풍문을 접하고 짧은 생각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이다. 경향신문 11월 21일 기사에서는 그림을 골라 갔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값비싼 그림들을 그대로 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둑의 경험 부족을 뜻한다는 주장도 소개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11월 27일 동아일보 보도는 이 경비원이 혐의가 없다는 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이 경비원이 자신의 가정에 관한 일 때문에 도저히 숙직을 할 수가 없어서 이미 사건 날짜 이전에도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사건 날 밤에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건 당일에 이 경비원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경비원이 미리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이야기였을 수 있다.
12월 8일 경향신문은 여전히 경찰 당국이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경험이 많은 전문 미술품 도둑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는 점 이외에 특별한 진전 사항은 없었다. 도난당한 미술품이 이미 거래되고 있다는 정황은 그때까지 없었으므로 범인이 미술품을 그대로 돌려주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 테니 자수하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28일에는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는 유 아무개라는 인물이 스스로 자신이 도난 사건의 범인이라고 거짓 주장하여 멀리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연행해 가는 기괴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사건은 이 정도로 점차 사그라들었다. 정부 중앙 부처의 국장 한 사람이 교체되었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남지부의 장 사무국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술품에는 보험이 걸려 있었으므로 작가들은 정부 당국의 사과와 함께 보험금을 받았다고 한다. 대전 전시 다음의 전시는 모두 취소되었으며 이후로도 국전의 지방 순회 전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당국은 방침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앞서의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다른 미술품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미술품 전문 도둑의 솜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정반대의 의견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 이유는 1978년 국전 전시회에 소개된 그림들을 도저히 들키지 않고 거래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고 작가의 그림이라면 해외의 장물아비에게 연락해 빼돌려 어디라도 그 그림을 아는 사람을 널리 찾아서 팔아버린다는 식의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전에 소개되는 작가의 그림이라면 그런 식으로 거래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58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그림이 사라지는 대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소리 소문 없이 몰래 그림을 처분하기는 불가능해진다. 실제로 당시 신문은 이때 도난당한 모든 그림들의 목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오히려 인근 지역에 몰래 침입해서 도둑질할 정도의 재주는 갖추고 있었던 보통 도둑이 범인인 것 아닐까? 그저 ‘요즘 그림도 큰돈이 된다더라’는 정도의 풍문을 접하고 짧은 생각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이다. 경향신문 11월 21일 기사에서는 그림을 골라 갔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값비싼 그림들을 그대로 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도둑의 경험 부족을 뜻한다는 주장도 소개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11월 27일 동아일보 보도는 이 경비원이 혐의가 없다는 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이 경비원이 자신의 가정에 관한 일 때문에 도저히 숙직을 할 수가 없어서 이미 사건 날짜 이전에도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사건 날 밤에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건 당일에 이 경비원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경비원이 미리 연락을 했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이야기였을 수 있다.
12월 8일 경향신문은 여전히 경찰 당국이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경험이 많은 전문 미술품 도둑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는 점 이외에 특별한 진전 사항은 없었다. 도난당한 미술품이 이미 거래되고 있다는 정황은 그때까지 없었으므로 범인이 미술품을 그대로 돌려주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 테니 자수하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28일에는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는 유 아무개라는 인물이 스스로 자신이 도난 사건의 범인이라고 거짓 주장하여 멀리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연행해 가는 기괴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사건은 이 정도로 점차 사그라들었다. 정부 중앙 부처의 국장 한 사람이 교체되었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남지부의 장 사무국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미술품에는 보험이 걸려 있었으므로 작가들은 정부 당국의 사과와 함께 보험금을 받았다고 한다. 대전 전시 다음의 전시는 모두 취소되었으며 이후로도 국전의 지방 순회 전시는 하지 않는 것으로 당국은 방침을 세웠다.

4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많은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라진 국전,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그림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국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점점 깊어졌다. 자유롭게 정신을 표현하며 예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화가들이 정부 당국에서 정해 놓은 심사위원들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애쓰는 것이 옳으냐 하는 뿌리 깊은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심사위원들과의 친분, 관계 등에 따라서 입선작, 수상작이 정해지는 경향이 있어 보이는 것 같다는 불만도 간혹 제기되었다. 정부 당국 행사에서 갖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의 기준이나 취향에 대한 의심이 커지다 보니 오히려 국전에서 탈락했지만 좋은 작품들만 모아서 전시하는 행사라든가 국전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 준다는 민간 전시회 등이 대안으로 조명받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1970년대 들어 유신헌법이 시행되면서 정부 주최 행사에 대한 예술가들의 답답함 같은 것도 쌓여 나갔던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겹쳐서 국전에 대한 비판은 심해졌다. 결국 1980년 29회 국전부터는 주관사를 민간단체 성격이 강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관전이 아닌 민전’이라면서 행사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1년 제5공화국 정부가 탄생할 무렵에 개최된 30회 국전을 마지막으로 국전이라는 명칭 자체도 사라져서 지금은 ‘대한민국미술대전’이 국전의 뒤를 이어 탄생한 행사로 보고 있다.
2018년 11월 20일 경향신문 기사는 1978년의 도난 사건을 돌아보면서 이 사건이 국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원인으로 소개했다. 그러니 1978년 사건은 어찌 보면 한국 예술계의 큰 흐름을 바꾼 일인지도 모른다.
1978년 11월에 대전에서 사라진 58점의 그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4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많은 그림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미 절도죄나 특수절도죄의 공소 시효는 지난 지가 한참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사건에 대한 수사가 적극적으로 진행될 리도 없고 굳이 범인을 잡아 처벌하려는 사람도 없을 듯하다. 그래도 58점이나 되는 그림들이 사라졌으니 혹시 그 중 한둘이라도 거래가 이루어져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온다면 누구인가 유심히 그 그림을 추적하는 방법으로 1978년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전여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예전 체육관 건물은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기는 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미술품 절도 사건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서 오늘도 학생들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1970년대 들어 유신헌법이 시행되면서 정부 주최 행사에 대한 예술가들의 답답함 같은 것도 쌓여 나갔던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겹쳐서 국전에 대한 비판은 심해졌다. 결국 1980년 29회 국전부터는 주관사를 민간단체 성격이 강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관전이 아닌 민전’이라면서 행사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1년 제5공화국 정부가 탄생할 무렵에 개최된 30회 국전을 마지막으로 국전이라는 명칭 자체도 사라져서 지금은 ‘대한민국미술대전’이 국전의 뒤를 이어 탄생한 행사로 보고 있다.
2018년 11월 20일 경향신문 기사는 1978년의 도난 사건을 돌아보면서 이 사건이 국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원인으로 소개했다. 그러니 1978년 사건은 어찌 보면 한국 예술계의 큰 흐름을 바꾼 일인지도 모른다.
1978년 11월에 대전에서 사라진 58점의 그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4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많은 그림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미 절도죄나 특수절도죄의 공소 시효는 지난 지가 한참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사건에 대한 수사가 적극적으로 진행될 리도 없고 굳이 범인을 잡아 처벌하려는 사람도 없을 듯하다. 그래도 58점이나 되는 그림들이 사라졌으니 혹시 그 중 한둘이라도 거래가 이루어져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온다면 누구인가 유심히 그 그림을 추적하는 방법으로 1978년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전여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예전 체육관 건물은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기는 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미술품 절도 사건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서 오늘도 학생들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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