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왜 거기서 나와' 인사동에서 발견된 유물 미스터리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5.08.13. 16:58

수정일 2025.08.13. 19:22

조회 47,328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2021년 인사동에서 금속 유물이 발견됐다.
2021년 인사동에서 금속 유물이 발견됐다.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37) 인사동 유물의 수수께끼

서울과 같이 역사가 오래된 도시의 매력을 꼽자면, 신비로운 역사의 수수께끼가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2021년 인사동 유적 발견이 그 좋은 예시다.

이야기의 시작은 요즘 서울 시내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재개발 현장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언론에서 2021년 금속 유물이 발견된 인사동 유적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는 이곳을, 사람들은 2021년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불렀다. 이름대로 그 장소는 옛날 건축물을 없애고 깨끗한 새 건축물을 만드는 공사 현장이었다.

그런데 서울 종로 중심가는 워낙 조선 시대의 흔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는 조사 작업이 진행됐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이런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개발된 것만 하더라도 600년 전이고 그 세월 동안 종로 중심가에는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다. 땅 속으로 파고 들어 가 보니 약 4미터 깊이까지 옛 사람의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600년 전 사람들이 살던 흔적이 흙먼지에 덮여 사라진 뒤, 다시 그 위에 500년 전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고, 그것이 흙먼지에 뒤덮여 사라진 뒤 다시 그 위에 400년 전 사람이 집을 짓고 산 흔적이 있는 식이다. 이렇게 총 4미터 두께의 흙더미 속에 옛사람들이 딛던 마당, 땅 바닥, 길 바닥의 흔적이 차례로 쌓인 것이다. 이러한 흔적 속에는 항상 나오기 마련인 깨진 그릇 조각이라든가 기왓장 조각 등등 생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4미터의 땅속에 600년의 시간이 차례대로 쌓여 있다니, 여기까지만 해도 고고학이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미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수수께끼는 그 흙더미 층 중에서도 16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의 흙더미 사이에서 나왔다.

흙을 치우다 보니 500년 전 무렵으로 보이는 층 속에서 엉뚱하게도 총 같은 유물이 발견됐다.
4미터 두께의 흙더미 속에 옛사람들의 흔적이 차례로 쌓여 있었다.
4미터 두께의 흙더미 속에 옛사람들의 흔적이 차례로 쌓여 있었다.
조선 시대에 총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한국은 일찌감치 고려 시대 말부터 화약을 이용하는 대포 같은 무기들을 대량 생산해 실전에 사용한 나라다. 특히 화약 대량 생산 기술을 개발·완성한 최무선은 화약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그 화약의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화약을 이용하는 대포도 개발했고 그 대포의 위력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직접 싸우기도 했다. 최무선은 1380년에 지금의 군산 앞바다 진포해전에서 해적들을 섬멸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이후 이성계가 해적들을 물리치며 큰 인기를 얻었던 운봉전투와 이어진다. 이처럼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고려와 조선의 역사에서도 꽤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렇다 보니 화약이라는 과학 기술의 힘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조선 조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은 대포를 개발·생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 초기인 태종 시기에 이미 무려 1만 3,500대의 화약 무기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조선 조정은 아예 병사들의 기본 무기를 총으로 바꾸려는 기세로 화승총 방식의 총을 대량 생산해 수만 자루, 수십만 자루를 전국의 군부대에 쌓아 두었다.

옛날 사극을 보면 과학기술이 뒤처진 조선의 병사들이 유럽 군대와 맞서 싸울 때 무모하게 창과 칼로 덤비다가 상대방이 총으로 공격하자 놀라면서 허망하게 패배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이런 연출은 할리우드 서부 영화의 연출을 그저 따라 하다 보니 생긴 것으로, 대표적인 역사에 대한 오해다. 조선 후기에 이미 조선군은 많은 숫자의 총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임금님과 임금님 어머니의 행차를 표현한 그림을 담고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 같은 18세기 자료를 보면 행차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이 저마다 총을 메고 걷고 있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조선 시대 유적에서 총 비슷한 무기가 나오는 것은 전혀 엉뚱한 일이 아니다. 마침 인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무기를 확인해 보니 승자총통 또는 소승자총통이라고 해서 한 사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간단한 대포 모양의 무기였다. 간단한 초창기 화약 무기이기는 하지만 가늠쇠도 달려 있어서 제법 총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춘 기구다. 이 무기는 조총을 사용하기 전, 조선군이 종종 유용하게 썼던 무기이므로 조선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이런 무기가 출토된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흙더미 위로 드러난 총 모양의 쇳덩어리 옆에는 다른 쇳덩어리가 있었다. 흙을 파헤쳐 보니 무엇인가 정교하고 예쁘게 만든 묘한 쇳조각이 있었다. 투박한 공구나 무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장신구라고 할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현대의 물건이라고 한다면 자동차 부품 비슷한 느낌을 주는 물건이었다.
인사동에서 출토된 시간을 측정하던 기구 '일성정시의'
인사동에서 출토된 시간을 측정하던 기구 '일성정시의'
연구 결과 그 쇳덩어리는 ‘주전(籌箭)’이라는 기계 부품이었다. 주전은 자동 물시계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부품이다. 세종 때 노비 출신 과학자인 장영실에 의해 개발된 자동 물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에 맞추어 복잡하고도 세밀한 장치가 겹겹이 함께 움직여 자동으로 북을 쳐서 소리를 알려 주고, 선녀나 신선 인형이 움직이며 시각을 알려 주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요즘에는 시각에 맞춰 뻐꾸기가 나오는 뻐꾸기시계가 친숙한데 600년 전 장영실은 그 비슷한 선녀 시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자면 오토마톤(Automaton)이라고도 부르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로봇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준, 무척이나 신기하고도 귀한 기계였다.

도대체 작은 대포 비슷한 무기와 귀한 시계 부품이 왜 한곳에서 나온 것일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런 물건들이 묻혀 있던 구덩이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즉 물건들은 그 항아리 같은 곳에 담겨 있던 것으로 보였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항아리는 깨져 있었지만 정황으로 보면 그렇게 추정할 수 있었다.

같은 곳에 특이한 모양의 자잘한 쇳조각들이 많이 보였다. 그 쇳조각은 얼핏 보면 작은 초콜릿 조각만 한 크기였다. 그런데 쇳조각마다 무슨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발견 당시 지켜보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기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기호가 한글이었기 때문이다.
화약 무기, 시계 부품과 함께 발견된 유물은 바로 금속활자였다.
화약 무기, 시계 부품과 함께 발견된 유물은 바로 금속활자였다.
화약 무기, 시계 부품과 함께 발견된 유물은 바로 금속활자였다. 인쇄를 하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를 금속 재료로 만들어서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을 수 있도록 만든 도구다. 그 숫자는 무려 1,600개에 달했다. 한자 금속 활자도 있었고 한글 금속 활자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특히 한글 금속 활자들이 자주 눈에 띄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마도 학창 시절에 세계에서도 굉장히 빠른 시기에 한국인들이 금속활자 기술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주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유럽에서는 금속활자를 이용해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그러면서 문명이 빠르게 발전했는데, 금속활자를 먼저 개발한 한국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아쉬움이랄까, 문제의식을 갖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에는 현재 수백 년 묵은 금속활자 유물이 무척 많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무려 82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활자 조각들이 소장돼 있다. 그중 금속활자가 약 50만 점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이렇게 많은 활자를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은 전 세계에서도 아주 드물다.

그 82만 자의 활자는 조선 시대의 명필 글씨를 따라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 전부를 1초에 한 글자씩 그냥 감상한다고 하면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보아야 할 만큼 많다. 우리의 관심이 부족하고 충분히 멋지게 전시하고 감상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해서 그렇지 이런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문명의 상징이자 기술의 상징이며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도대체 왜 조선은 이렇게 많은 금속활자를 만들었는지, 그러면서도 왜 출판문화는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는지는 분명 함께 고민해 볼 만한 주제다.
한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나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한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나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많은 금속활자 중에서 한글 금속활자는 굉장히 드물다. 그런데 2021년 공사장 바닥 구덩이의 어느 깨진 항아리에서 갑자기 한글 금속활자가 무더기로 나왔으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승자총통과 물시계 부품과 금속활자가 같은 항아리에 들어가 묻혀 있었을까? 요즘으로 치면 대형 기관총과 값비싼 귀중품 손목시계의 일부와 레이저 프린터 복합기가 같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사실 이때 발견된 유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해와 별을 관찰하는 장치의 부품과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의 일부도 같이 발견되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최첨단 천체망원경과 전문가용 실로폰의 일부도 같이 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무슨 개구리가 흘린 침과 모기의 날개 같은 것들을 모아서 마녀의 약을 모은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누가, 왜, 이 모든 물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두었을까?

학자들은 이 수수께끼의 절반 정도를 풀이하는 데 성공했다. 전혀 다른 물건 같아 보이지만 조선 시대 기준으로 보면 이 모든 물건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전부 구리를 주재료로 만든 물건이다.

강철을 다루는 기술이 아직 부족했던 조선 시대에는, 대포와 같은 무기를 철로 만들면 터뜨릴 때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깨졌다. 그렇기 때문에 초창기 화약 무기는 흔히 구리를 주재료로 하여 청동 재질로 만들곤 했다. 마찬가지로 다루기 어려운 재료인 철을 녹여서 정교하고 세밀한 금속활자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좀 더 잘 녹고 쉽게 가공할 수 있는 구리를 이용해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다. 물시계 부품이나 해, 별을 관찰하는 장치의 부품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서 녹슬지 않고 오랫동안 사용하려면 당시 기술로는 철보다 구리를 주재료로 만드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못 쓰고 버리게 된 구리 제품들을 한곳에 모아 재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2021년 발견된 유적에서 이 모든 서로 다른 특이한 물건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는 이유는 구리라는 재질의 과학적 특징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500년 전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지금도 금속 제품을 분리수거해 재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금속 제품을 더 구하기 어려웠던 500년 전에는 못 쓰는 구리를 다시 녹여서 물건을 만드는 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수수께끼 유적이 출현한다는 것이 나는 서울만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수수께끼 유적이 출현한다는 것이 나는 서울만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이 항아리가 발견된 위치는 민가가 있는 구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온돌방의 흔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민가의 광이나 창고 같은 곳인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평범한 사람이 사는 민가에 당시로서는 강력한 무기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이나 과학 연구 장비라고 할 수 있는 물건들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재활용해서 귀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었다면 왜 그 뜻대로 재활용되지 못하고 흙 속에 묻혀 500년의 세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 잊힌 채 있었을까?

그 정확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고고학의 수수께끼가 정글이나 사막 한가운데의 신비로운 유적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바로 곁에서 지하철과 버스가 쉴 새 없이 지나다니고 관광객과 회사원들이 하루에도 수십만 명씩 오가는 생명력 넘치는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수수께끼의 유적이 새로이 출현한다는 것이 나는 서울만의 멋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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