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대를 아시나요? 월대와 광화문 복원이 우리에게 남긴 것
발행일 2025.07.01. 13:00
경복궁 앞 광화문 아래 놓인 ‘월대(月臺)’는 조선시대 임금이 백성을 만났던 의례의 무대다. 가운데 돌계단은 임금의 전용 통로 ‘어도(御道)’, 양옆은 신하들의 자리였다. 이곳은 조선의 권위와 백성과의 소통이 만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1923년, 일제가 전차 선로를 만들며 월대는 철거됐고, 백 년 가까이 시민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그 후 2007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기단석과 계단 구조, 차일 고리 등이 발견되었고, 2023년 복원을 마쳐 다시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23년, 일제가 전차 선로를 만들며 월대는 철거됐고, 백 년 가까이 시민의 기억에서도 지워졌다. 그 후 2007년부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기단석과 계단 구조, 차일 고리 등이 발견되었고, 2023년 복원을 마쳐 다시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콘크리트로 만들고, 위치조차 달랐던 광화문
광화문도 긴 역사의 굴곡을 겪었다. 6·25 전쟁 이후, 원래의 목조건물이 불에 타 사라진 뒤 제3공화국 시절 광화문이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당시 건축은 다급했다. 속도와 상징이 우선이었던 시대, 위는 콘크리트로, 아래는 원래의 돌을 이용해 복원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관계자 외에는 거의 몰랐다고 한다. 시민들은 그저 전통의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무 대신 시멘트와 철근이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광화문의 위치였다. 원래 경복궁 중심 축선에 정문으로 자리잡아야 했지만, 1968년 복원된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 맞춰 삐딱하게 놓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의 궁궐을 비껴가도록 지은 건물이었고, 그 앞에 광화문이 세워지면서 역사적 축이 왜곡되었다.
이러한 위치의 왜곡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총독부와 남산의 조선신궁을 잇는 일제의 ‘지배의 선’을 따르도록 조율된 것이었다. 그 상징성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다.
이러한 위치의 왜곡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총독부와 남산의 조선신궁을 잇는 일제의 ‘지배의 선’을 따르도록 조율된 것이었다. 그 상징성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다.
서수상과 월대, 잃어버린 퍼즐이 돌아오다
다행히도 월대 복원에는 반가운 성과도 있었다. 호암미술관이 보관 중이던 ‘서수상’ 2점이 문화재청에 기증되면서, 월대 양옆을 지키던 상상의 수호 동물들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 동구릉에 보관 중이던 석재도 50% 가까이 활용되어 고종대의 월대 모습이 상당 부분 복원되었다. 이처럼 하나씩 맞춰지는 조각들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닌, 공간의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의 퍼즐’이 된다.
광화문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최고 통치자가 손을 댄 공간이라고 한다. 조선의 정문이자 상징이었던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엔 총독부 앞에서 조선의 정신을 가리는 도구가 되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로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격해졌다. 이에 정부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1968년 광화문광장에 세운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인물, 조선을 지켜낸 영웅을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시간이 남긴 길, 우리가 걷는 길
지금 우리가 걷는 광화문광장은 조선의 ‘육조거리’였고, 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던 정치의 중심이었다. 이곳은 과거의 흔적이 현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장소다. 광화문은 단지 하나의 문이 아니라, 시대마다 권력이 형상을 새기고, 시민들이 기억을 되새긴 흔적이다. 그 돌 하나, 위치 하나가 말해주는 건 “역사는 건물이 아닌 기억이고, 우리는 그 기억 위를 걷는다”는 사실이다.

2023년 복원된 월대가 앞에 자리하고 있고, 광화문과 경복궁 정문이 중심선에 맞춰 당당히 서 있다. ©장신자

호암미술관에서 기증받은 고종대의 서수상. 월대 양옆을 지키던 상상 속 동물 형상이 되돌아왔다. ©장신자

1968년 복원 당시 광화문의 상부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지어졌고, 이후 원형 복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장신자

새롭게 조성된 광화문광장 하부에서 발견된 유구를 안내하는 입체적 복원 모형과 설명판 ©장신자

고종대에 만들어졌던 월대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기초 유구. 문화재청의 발굴조사로 드러났다. ©장신자

문을 지키는 상상의 수호자, 해태 ©장신자

시민이 도심 속에서 걷는 길은 조선의 육조거리와 맞닿아 있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장신자

신희권 교수와 해설사들의 강의 현장. 시민이 역사와 직접 연결되는 교육의 공간 ©장신자

한일청구권 협정 이후 국민 자긍심 회복을 위해 세워진 상징물. 지금도 많은 시민이 찾는다. ©장신자

세종대왕 동상 뒤로 광화문과 북악산이 이어진다. 왕의 눈앞에 펼쳐진 시간의 경관 ©장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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