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에도 나왔던 이것! 흥미로운 '나례'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2.05. 09:01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9) 나례(儺禮)의 역사와 기록
나례의 기원과 역사 속으로
나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실을 전하는 첫 기록은 고려 정종(靖宗) 때인 1,040년이지만, 실제는 그 이전부터 수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예의지(禮儀志)에는, “섣달 세밑은 음양이 교차하는 시기로서 노농(勞農)이 크게 납향(臘享)을 지내는데, 납일(臘日) 하루 전에 축역(逐疫)하는 대나(大儺) 행사가 있었다. 황문(黃門:내시) 자제 중에서 10세에서 12세까지 120인을 뽑아 진자(侲子:어린 무당)로 삼았는데, 머리에는 붉은 쓰개와 검은 옷을 입고 큰 북을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 예지(禮志) 군례조(軍禮條)에는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라 하여 나례 의식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뽑아
진자로 삼아 이들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
(袴褶:바지 위에 덧입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힌다.
… 공인(工人)은 22인이며 그중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사람)로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걸치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또 한 사람은 창수(唱帥: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거머쥔다.
조선시대에 궁중과 지방 관아 그리고 민간에서 거행하던 나례의 모습은 실록을 비롯해, 성종 때의 학자 성현(成俔: 439-1504)의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 세시풍속을 정리한 기록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례(儺禮)가 214건, 나희(儺戲), 구나(驅儺) 17건 정도가 검색이 돼 궁궐에서 나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광해군일기』의 기록 이후에는 거의 검색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례 행사가 조선후기에는 크게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연산군의 나례 중지에 저항했던 공길
연산군은 “『주례(周禮)』에 방상시가 나례를 맡아 역질을 쫓았다면 역질 쫓는 것과 나례가 진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 풍속이 이미 역질은 쫓았는데 또 나례를 하여 역질을 쫓는 것은, 묵은 재앙을 쫓아버리고 새로운 경사를 맞아들이려는 것이니, 비록 풍속을 따라 행하더라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본디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우인(優人:배우) 공길(孔吉)은 『논어』를 인용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했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해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했다. 나례를 베풀지 말 것을 지시한 연산군에게, 공길이 강하게 저항하다가 유배 간 사실이 확인이 되고 있다. 영화는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배우 ‘공길’이라는 인물이라는 캐릭터를 반영해, 연산군 시대를 풍자해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영화였다.
문헌 기록에 나타난 ‘나례’ 행사
궁궐의 봄빛이 오색 장말 위에 일렁이고
붉은 옷 노란 바지 입고 종횡으로 오가네
신묘한 방울 놀이는 전문가의 솜씨인 듯
줄 타는 모습은 나는 제비처럼 날렵하네
네 벽 두른 좁은 방에 인형을 감춰 놓고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
우리 임금님 광대놀이 즐기지 않지만
신하들과 태평성대 누리려 함이라네
제석조에는 또한 “함경도 풍속에 빙등(氷燈)을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마치 원주(圓柱) 안에 기름 심지를 박은 것 같다. 그것을 켜놓고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희(儺戲)를 행하는데, 이것을 ‘청단(靑壇)’이라 한다.”고 해, 지역마다 특색있는 나례를 소개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유행하는 귀신 이야기
현종 때는 대비(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거처하는 창경궁에 귀신이 나왔다고 해 큰 소동이 벌어지는 상황이 기록돼 있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근래 대내에 귀신이 요변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고 보고하자, 현종은 “대비께서 거처하시는 통명전(通明殿) 근처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다. 돌덩이가 날아오거나 의복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의 일이 자주 있는데, 궁인들이 거처하는 곳은 더욱 심하다. 이치로 미루어 보면 넓은 집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또 이곳이 여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음기가 많이 모여 요사스러운 재앙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왕이 직접 나서서 궁궐에 귀신이 있는 것에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이 실록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이에 정태화 등은 대비의 거처를 옮길 것을 제안했고, 결국 대비는 경희궁으로 가게 됐다.

『설공찬전』은 죽은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일어나는 귀신 이야기가 주제인데, “저승은 바닷가로되 매우 멀어 여기서 40리로되 우리 달림은 하도 빨라 여기서 오후 8시에 나서면 12시에 들어가 오전 2시 성문이 열리면 들어간다고 하고,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이라 하고 중국과 제국(諸國)의 죽은 사람이라, 이 땅에 모인 사람이 하도 많아 수를 세지 못한다.”고 해 16세기 당시에도 지옥은 만원이라는 기록이 흥미롭다.
『설공찬전』의 저자는 채수(蔡壽)라는 학자였는데, 사회지도층 인사가 귀신 이야기를 써서 사회를 혼탁하게 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다. 『설공찬전』의 금서 지정에는 귀신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던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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