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에도 나왔던 이것! 흥미로운 '나례'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2.05. 09:01

수정일 2025.02.05. 16:03

조회 1,076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조선시대 섣달 그믐날 궁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맞이하는 의식인 ‘나례’를 행했다.
조선시대 섣달 그믐날 궁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맞이하는 의식인 ‘나례’를 행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9) 나례(儺禮)의 역사와 기록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아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것은 시대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다. 조선시대 섣달 그믐날 궁궐에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맞이하는 의식인 나례(儺禮)를 행했다. 궁궐에서 출발한 나례 의식은 관청이나 민간에서도 널리 퍼져 나갔다. 묵은 액을 풀고 희망이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귀신을 쫓는 의식이었던 나례. 그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례의 기원과 역사 속으로

나례(儺禮)는 섣달 그믐날 궁궐이나 관청,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의식으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고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구나(驅儺), 나희(儺戲), 나례(儺禮)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나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실을 전하는 첫 기록은 고려 정종(靖宗) 때인 1,040년이지만, 실제는 그 이전부터 수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예의지(禮儀志)에는, “섣달 세밑은 음양이 교차하는 시기로서 노농(勞農)이 크게 납향(臘享)을 지내는데, 납일(臘日) 하루 전에 축역(逐疫)하는 대나(大儺) 행사가 있었다. 황문(黃門:내시) 자제 중에서 10세에서 12세까지 120인을 뽑아 진자(侲子:어린 무당)로 삼았는데, 머리에는 붉은 쓰개와 검은 옷을 입고 큰 북을 잡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 예지(禮志) 군례조(軍禮條)에는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라 하여 나례 의식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뽑아
진자로 삼아 이들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
(袴褶:바지 위에 덧입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힌다.
… 공인(工人)은 22인이며 그중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탈을 쓰고 귀신을 쫓는 사람)로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걸치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또 한 사람은 창수(唱帥: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거머쥔다.

-『고려사』 예지(禮志) 군례조(軍禮條) 중
귀신을 쫓기 위해 다양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가면과 특수한 복장을 착용한 점이 주목되는데, 요즘 할로윈 축제에서 특수 분장을 하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조선시대에 궁중과 지방 관아 그리고 민간에서 거행하던 나례의 모습은 실록을 비롯해, 성종 때의 학자 성현(成俔: 439-1504)의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 세시풍속을 정리한 기록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례(儺禮)가 214건, 나희(儺戲), 구나(驅儺) 17건 정도가 검색이 돼 궁궐에서 나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광해군일기』의 기록 이후에는 거의 검색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례 행사가 조선후기에는 크게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나례는 섣달 그믐날 궁궐이나 관청,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의식이다. 사진은 국립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 ‘신(新)궁중나례’에서 선보인 '관처용' 장면.
나례는 섣달 그믐날 궁궐이나 관청, 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하는 의식이다. 사진은 국립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 ‘신(新)궁중나례’에서 선보인 '관처용' 장면.
1408년(태종 8) 12월 20일에는 “오직 제야(除夜)에 구나를 행하는 것은 경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것이라 하여 전대로 행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1425년(세종 7) 12월 29일에는 “이날 밤에 나례를 올리고, 방포(放炮)하고, 서운관에서는 구역(驅疫)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전악서에서는 처용무를 올렸다. 여기(女妓)·악사(樂師)·고자(瞽者)들에게 연회(宴會)와 선물을 내리고, 나인(儺人)과 처용(處容) 연기자들에게도 차등 있게 면포를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연산군의 나례 중지에 저항했던 공길

2005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공길(孔吉)이 나례 공연 문제로 연산군을 비판한 내용이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군 11) 12월 29일의 기록에 나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연산군은 “『주례(周禮)』에 방상시가 나례를 맡아 역질을 쫓았다면 역질 쫓는 것과 나례가 진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 풍속이 이미 역질은 쫓았는데 또 나례를 하여 역질을 쫓는 것은, 묵은 재앙을 쫓아버리고 새로운 경사를 맞아들이려는 것이니, 비록 풍속을 따라 행하더라도 오히려 가하거니와, 본디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표절하는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우인(優人:배우) 공길(孔吉)은 『논어』를 인용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했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해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했다. 나례를 베풀지 말 것을 지시한 연산군에게, 공길이 강하게 저항하다가 유배 간 사실이 확인이 되고 있다. 영화는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배우 ‘공길’이라는 인물이라는 캐릭터를 반영해, 연산군 시대를 풍자해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영화였다.

문헌 기록에 나타난 ‘나례’ 행사

성현은 나례에서 연행된 연희를 보고 ‘관나희(觀儺戲)’라는 시를 지었다. 당시 나례에서 본 방울 놀이, 인형극, 줄타기 등에 대한 소감과 더불어 나례를 행하는 주요한 목적이 왕이 신하들과 함께 태평성대를 누리려 함이라고 글을 맺고 있다.

궁궐의 봄빛이 오색 장말 위에 일렁이고
붉은 옷 노란 바지 입고 종횡으로 오가네
신묘한 방울 놀이는 전문가의 솜씨인 듯
줄 타는 모습은 나는 제비처럼 날렵하네
네 벽 두른 좁은 방에 인형을 감춰 놓고
백 척 솟대 위에서 잔 잡고 춤추네
우리 임금님 광대놀이 즐기지 않지만
신하들과 태평성대 누리려 함이라네

- 성현(成俔), 관나희(觀儺戲)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저술한 『동국세시기』 12월 제석조(除夕條)에는,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화전(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 귀신을 쫓는 행사의 유풍이다. 제석과 설날에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중국의 풍습을 모방한 제도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제석조에는 또한 “함경도 풍속에 빙등(氷燈)을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마치 원주(圓柱) 안에 기름 심지를 박은 것 같다. 그것을 켜놓고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희(儺戲)를 행하는데, 이것을 ‘청단(靑壇)’이라 한다.”고 해, 지역마다 특색있는 나례를 소개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유행하는 귀신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귀신 이야기는 자주 등장한다. 『성종실록』에는, 성종이 비서실인 승정원에 “듣건대 호조 좌랑 이두(李杜)의 집에 요귀(妖鬼)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있는가? 그것을 물어서 아뢰라.”고 지시를 한 내용이 보인다. 이에 이두는 “신의 집에 9월부터 과연 요귀가 있어서, 혹은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자취를 감추기도 하며 창문 종이를 찢기도 하고 불빛을 내기도 하며 기와나 돌을 던지기도 하는데, 사람이 부딪혀도 다치는 일은 없으나 다만 신의 아내가 살쩍에 부딪혀 잠시 다쳐서 피가 났습니다.”고 귀신에 대한 목격담을 말하고 이어서, “종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사람과 말을 하기를 사람과 다름이 없고, 비록 그 전신은 보이지 아니하나 허리 밑은 여자의 복장과 방불한데 흰 치마가 남루하다.’고 하고 있다.

현종 때는 대비(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거처하는 창경궁에 귀신이 나왔다고 해 큰 소동이 벌어지는 상황이 기록돼 있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근래 대내에 귀신이 요변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고 보고하자, 현종은 “대비께서 거처하시는 통명전(通明殿) 근처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다. 돌덩이가 날아오거나 의복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의 일이 자주 있는데, 궁인들이 거처하는 곳은 더욱 심하다. 이치로 미루어 보면 넓은 집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또 이곳이 여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음기가 많이 모여 요사스러운 재앙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왕이 직접 나서서 궁궐에 귀신이 있는 것에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이 실록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이에 정태화 등은 대비의 거처를 옮길 것을 제안했고, 결국 대비는 경희궁으로 가게 됐다.
현종 때는 대비(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거처하는 창경궁에 귀신이 나왔다고 해 큰 소동이 벌어지는 상황이 기록돼 있다.
현종 때는 대비(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거처하는 창경궁에 귀신이 나왔다고 해 큰 소동이 벌어지는 상황이 기록돼 있다.
『중종실록』에는 귀신을 주제로 한 소설 『설공찬전』이 많은 사람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읽지 말도록 하고 소각을 지시했음이 보인다. “『설공찬전(薛公瓚傳)』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놓지 않는 자는,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괴이한 책을 숨긴 형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공찬전』은 죽은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일어나는 귀신 이야기가 주제인데, “저승은 바닷가로되 매우 멀어 여기서 40리로되 우리 달림은 하도 빨라 여기서 오후 8시에 나서면 12시에 들어가 오전 2시 성문이 열리면 들어간다고 하고,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이라 하고 중국과 제국(諸國)의 죽은 사람이라, 이 땅에 모인 사람이 하도 많아 수를 세지 못한다.”고 해 16세기 당시에도 지옥은 만원이라는 기록이 흥미롭다.

『설공찬전』의 저자는 채수(蔡壽)라는 학자였는데, 사회지도층 인사가 귀신 이야기를 써서 사회를 혼탁하게 한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다. 『설공찬전』의 금서 지정에는 귀신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던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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