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수난의 역사 속으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1.15. 15:00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8)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와 공간
해외여행에 나서면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은 용산에 자리를 잡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와 서울에 위치했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실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은 1909년 대한제국 시기 순종 황제가 지은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그 시작을 보고 있다. 제실박물관은 1909년 11월 1일에 창경궁 명정전 일대의 전각을 사용하여 개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9년을 한국박물관 100주년의 해로 선포하고, 일본 덴리데 소장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 등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과 행사를 열었던 것도 이를 기념해서였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1인당 1분만 볼 수 있도록 관람을 제한할 정도였는데, 필자도 엄청난 인파 속에 이를 관람한 기억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09년을 한국박물관 100주년의 해로 선포하고, 일본 덴리데 소장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 등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과 행사를 열었던 것도 이를 기념해서였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1인당 1분만 볼 수 있도록 관람을 제한할 정도였는데, 필자도 엄청난 인파 속에 이를 관람한 기억도 있다.
제실박물관은 1909년 11월 1일에 창경궁 명정전 일대의 전각을 사용하여 개관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라 했는데, 황제의 나라에서 왕의 나라로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제실박물관은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라 했는데, 황제의 나라에서 왕의 나라로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왕가박물관은 창덕궁박물관, 창경궁박물관 또는 이왕직박물관으로도 불렀다. 1912년에는 창경궁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었던 자경전(慈慶殿) 터에 본관을 지었다.
1915년 일제는 이왕가박물관과는 별개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경복궁 경내에 지었다. 1915년 시정(施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전시품을 전시한 미술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산하 기관으로 편성했으며, 박물관협의회와 조선고적 조사위원회를 설립해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운영했다.
1915년 일제는 이왕가박물관과는 별개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경복궁 경내에 지었다. 1915년 시정(施政)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전시품을 전시한 미술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개관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산하 기관으로 편성했으며, 박물관협의회와 조선고적 조사위원회를 설립해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운영했다.
1915년 일제는 이왕가박물관과는 별개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경복궁 경내에 지었다.
낙랑 및 대방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불교미술품 등 6개의 전시실을 뒀는데, 낙랑 및 대방군을 별도의 전시실로 구성한 것에서 보듯 전시했다.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 역사를 유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내선일체(內鮮一體)’ 등 식민사관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교육과 선전의 창구로 활용했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과 오대산본 역시 이곳에 보관을 했고, 총독부 학무과에서 관리하면서 식민통치에 활용됐다.
해방 이후 박물관의 역사
1945년 해방 이후, 12월 3일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해 국립박물관을 개관했다. 경주, 부여, 개성, 공주 등 지방 분관의 소장품들도 현재 국립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됐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국립박물관은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옮겨져, 소장품들은 광복동 사무실에 보관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성립된 후, 8월에 경복궁 청사로 소장품들을 옮겨 왔다. 1954년 1월 남산 분관으로 이전해 개관했고, 1955년 6월 남산 분관에서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으로 이전해 개관했다. 덕수궁 시기의 국립박물관에서는 1957년 12월부터 1959년 9월까지 워싱턴 등 미국 8개 도시에서 ‘한국 국보전’이라는 최초의 해외 전시를 개최했다.
덕수궁 시기인 1972년 7월 19일 국립박물관은 명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경했고, 8월 25일 경복궁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신축해 이전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왕실의 어진을 봉안하던 선원전(璿源殿)이 자리한 곳이었다.
1966년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세우기로 했고 1972년에 완공했다. 선원전 영역은 일제 강점 시기에도 많이 훼손됐지만, 이 일대에 그나마 있던 경안당, 대향당 등 9동 106칸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조성한 문제점이 있다.
1979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향원정 뒤편 옛 국립현대미술관 건물(1998년 철거)을 사용해 왔던(1975년~1992년) 국립민속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 소속으로 흡수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72년부터 사용하다가 1986년 중앙청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는, 1993년 2월부터 민속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성립된 후, 8월에 경복궁 청사로 소장품들을 옮겨 왔다. 1954년 1월 남산 분관으로 이전해 개관했고, 1955년 6월 남산 분관에서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으로 이전해 개관했다. 덕수궁 시기의 국립박물관에서는 1957년 12월부터 1959년 9월까지 워싱턴 등 미국 8개 도시에서 ‘한국 국보전’이라는 최초의 해외 전시를 개최했다.
덕수궁 시기인 1972년 7월 19일 국립박물관은 명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경했고, 8월 25일 경복궁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신축해 이전했다. 이곳은 원래 조선 왕실의 어진을 봉안하던 선원전(璿源殿)이 자리한 곳이었다.
1966년 정부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경복궁 선원전 영역에 세우기로 했고 1972년에 완공했다. 선원전 영역은 일제 강점 시기에도 많이 훼손됐지만, 이 일대에 그나마 있던 경안당, 대향당 등 9동 106칸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조성한 문제점이 있다.
1979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향원정 뒤편 옛 국립현대미술관 건물(1998년 철거)을 사용해 왔던(1975년~1992년) 국립민속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 소속으로 흡수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72년부터 사용하다가 1986년 중앙청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는, 1993년 2월부터 민속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전경. 과거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 사용됐다.
1972년 완공돼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현재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된 건물은 무엇보다 특이한 외양 때문에 우선은 눈길을 끈다.
건물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상부의 5층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난간 위의 평면과 부속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난간 아래 부분과 건물 측면은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상륜부 난간은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에서 따온 모양으로, 최고의 국보들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조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궁궐 내에 사찰 건물을 배치하고 이들 조합도 엉성해, 건축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 청사로 활용이 됐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앙청’이 됐다. 정부 수립 직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됐으며, 6.25 전쟁 시기 3개월간 인민군 청사가 된 적도 있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사진은, 후대에 찍은 사진인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장면과 함께 중앙청을 떠올릴 때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이다. 국회의사당은 1950년 부민관(府民館:현재의 서울이 의회 의사당)으로 이전했다가 1975년에 준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했다.
건물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상부의 5층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난간 위의 평면과 부속 건물은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호), 난간 아래 부분과 건물 측면은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상륜부 난간은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에서 따온 모양으로, 최고의 국보들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조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궁궐 내에 사찰 건물을 배치하고 이들 조합도 엉성해, 건축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 청사로 활용이 됐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중앙청’이 됐다. 정부 수립 직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됐으며, 6.25 전쟁 시기 3개월간 인민군 청사가 된 적도 있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사진은, 후대에 찍은 사진인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장면과 함께 중앙청을 떠올릴 때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이다. 국회의사당은 1950년 부민관(府民館:현재의 서울이 의회 의사당)으로 이전했다가 1975년에 준공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이전했다.
중앙청 건물에서 용산 시대로
정부 부처들이 광화문의 정부중앙청사나 경기도 과천의 정부 제2종합청사로 이전하면서, 중앙청의 기능이 사라졌다.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앙청 자리로 이전했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 ‘한국예술사’ 수업의 과제로 박물관을 탐방하고 레포트를 써오는 과제를 부여받고, 당시 중앙청에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기억이 있다.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중앙청 자리로 이전했다. 이후 1993년 ‘역사바로세우기’의 핵심 사업으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추진하며 국립중앙박물관도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다.
1993년 2월에는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역사바로세우기’의 핵심 사업으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추진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은 그날 청사가 폭파 후 철거되는 장면을 많은 국민들이 TV 생방송 중계로 볼 수가 있었다. 현재 천안시에 소재한 독립기념관에는 이때 철거된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이 조성돼 있다. 조선총독부의 상징처럼 보인 첨탑도 이 공원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2005년 10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축 이전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로 국립중앙박물관도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면서 소장품들은 임시로 근처 벙커에 보관했다가 1996년 12월 경복궁 경내의 사회교육관 건물(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 자리)을 개축해 이전했다. 임시로 이전해 개관을 한 후에는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최종 부지로 확정된 곳은 용산이었다.
1997년 10월 31일 용산에 새 국립중앙박물관 기공식이 있었다. 2003년 3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차관급 기관으로 승격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의 직위를 가지게 됐다. 2004년 10월 17일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위한 임시 휴관이 결정됐고, 2005년 10월 28일 신축 이전 개관해 본격적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시대’를 열어 나가게 됐다.
1997년 10월 31일 용산에 새 국립중앙박물관 기공식이 있었다. 2003년 3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차관급 기관으로 승격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의 직위를 가지게 됐다. 2004년 10월 17일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을 위한 임시 휴관이 결정됐고, 2005년 10월 28일 신축 이전 개관해 본격적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시대’를 열어 나가게 됐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전국에 지방 국립박물관 13곳이 있다.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전국에 지방 국립박물관 13곳이 있다. 경주, 공주, 광주, 김해, 나주, 대구, 부여, 전주, 제주, 진주, 청주, 춘천, 익산 등으로 옛 왕조의 수도이거나 지역의 거점 도시들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으면 상설 전시품 이외에,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청자’,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달항아리를 만든 곳, 금사리’ 특별 전시품도 볼 수가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으면 상설 전시품 이외에,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청자’,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달항아리를 만든 곳, 금사리’ 특별 전시품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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