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복싱 세계챔피언 탄생! 흥미로운 '장충체육관'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1.01. 00:12

수정일 2025.01.02. 10:55

조회 1,127

타이틀이미지
1963년 2월 1일에 문을 연 장충체육관은 2012년 리모델링 공사 후 2015년 재개장했다.
1963년 2월 1일에 문을 연 장충체육관은 2012년 리모델링 공사 후 2015년 재개장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7) 장충체육관과 문화체육관

겨울철이 되면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몰리는 곳 중 하나가 실내체육관이다. 서울에 최초로 등장한 실내체육관은 1963년 2월 1일에 문을 연 장충체육관이다. 1895년 을미사변 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제단장충단(獎忠壇)에서 유래한 장충동에 소재했기에 장충체육관이라 불렸다.

1955년 육군체육관으로 개관했을 당시에는 노천체육관이었는데, 1959년 서울시가 인수해 1963년 실내체육관으로 만들었다. 이후 장충체육관은 실내 스포츠의 요람이 됐으며, 특히 동계 시즌에는 농구, 배구 경기가 주로 열렸다. 1960~1970년대에는 김일 선수로 대표되는 프로레슬링 경기의 성지였으며, 김기수를 비롯한 복싱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장소이기도 했다.
장충체육관 개관식 모습.
장충체육관 개관식 모습.

장충체육관을 장식한 스타들

1966년 김기수가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세계챔피언 니노 벤베노트를 15회 판정승으로 꺾고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복싱 분야 한국 최초의 세계챔피언은 많은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이후 복싱에서의 세계챔피언 배출은 최대 관심사가 됐다.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등이 1970년대에 세계챔피언에 올랐고, 1979년에 박찬희, 1980년 이후 김태식, 장정구, 박종팔 등의 세계챔피언 타이틀 획득은 모두를 열광시켰다. 이들 세계챔피언의 주요 타이틀전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1960년대 프로레슬러 김일의 등장은 레슬링 경기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들끓게 했다. 김일은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1963년 스승인 역도산이 사망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한국 프로레슬링 1세대인 장영철과 천규덕 등과 함께 1960~1970년대 레슬링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5년 3월 27일에는 한일 레슬링 라이벌인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의 시합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려 관심을 집중시켰다. 모든 스포츠 분야에서 일본은 한국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만큼 두 사람의 대결은 많은 사람들을 체육관으로 몰리게 했다.

농구와 배구의 열기

1970년대 이후 장충체육관은 농구배구의 열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70년대 남녀농구는 실업리그라고 해, 남자부의 한국은행, 기업은행, 산업은행, 전매청, 여자부의 상업은행, 조흥은행, 외환은행 등 주로 은행팀 중심으로 시합이 이뤄졌다.

그러다가 1978년 대기업의 최대 라이벌 현대와 삼성이 남자농구단을 창단하고, 여자농구에서는 1975년 한국화장품에 이어, 화장품계 라이벌인 태평양학이 1977년 창단되면 농구의 열기를 한층 고양시켰다.

슈퍼스타 박찬숙의 출현도 한몫을 했다. 남자부에서는 신선우, 박수교, 신동찬, 이충희, 황유하 등이, 여자부에서는 박찬숙, 강현숙, 조영란, 정미라 등이 큰 활약을 했다.

농구의 인기는 1983년 농구대잔치의 창설로 이어졌다. 1983년부터 시작된 대한농구협회(KBA) 주관의 농구 대회는 창설 당시에는 ‘점보시리즈’라고 불렸으나, 한글 사용 권장 정책에 따라 1984년부터는 농구대잔치로 불리고 있다.

창설 이후 실업, 대학, 국군체육부대 등 성인 농구계 모든 팀들이 참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농구 대회이자 대표적인 겨울 스포츠 행사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97년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농구대잔치는 서울은 물론 전국 주요 대도시를 돌며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며, 서울에서는 장충체육관과 함께 잠실학생체육관,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경기를 개최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일본팀과 산업은행팀의 여자 농구대회가 열려 경기를 치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일본팀과 산업은행팀의 여자 농구대회가 열려 경기를 치르고 있다.
남자배구에서는 고려증권, 현대, 삼성팀과 더불어 실력을 갖춘 한양대, 성균관대 대학팀이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면서 1980년대 이후 장충체육관을 뜨겁게 했다.

여자배구에서는 대농(大農)에서 미도파로 이어진 배구팀이 최정상에 올랐고, ‘날으는 작은새’라는 별명을 얻은 조혜정의 활약이 컸다. 장충체육관에서 실전 연습을 한 여자배구의 성과는 1976년 몬티리올 올림픽 구기 종목 분야에서 최초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미도파팀을 이어 호남정유 배구단이 1991년부터 1995년도까지 3년 10개월 동안 92연승의 대기록을 이어가기도 했다. 호남정유의 후신인 팀이 현재 장충체육관은 연고지로 하는 GS칼텍스 배구단이다. 1980~1990년대 여자배구는 현대, 한일합섬, 선경배구단이 맞수가 돼 장충체육관은 달아오르게 했다.

1980년대는 민속씨름의 인기가 장충체육관을 달궜다. 1983년 출범한 민속씨름은 그해 4월 14일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대성황을 이뤘다. 민속씨름 출범 당시에는 태백급, 금강급, 한라급, 백두급 4체급으로 시작했는데, 한라급 출신의 이만기가 화려한 기술로 백두급 장사들을 제치고 천하장사의 타이틀을 처음 따면서 인기에 불을 지폈다. 이만기에 이어 이준희, 이봉걸, 강호동 등의 활약은 추석이나 설 명절마다 장충체육관을 찾게 한 힘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일부 종목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남자유도 종목에서는 60kg급의 김재엽과 65kg급의 이경근이 금메달을 땄는데, 필자는 이경근이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직관한 좋은 추억이 있다.

현재도 장충체육관은 남자배구 우리카드, 여자배구 GS칼텍스의 홈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필자도 가끔 이곳을 찾는데 2012년 리모델링 공사 후 2015년 재개장한 효과인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시설들이 경기를 편하게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1946년 명동에서 설립돼,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빵집인 태극당을 경기 전후로 찾아가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문화체육관과 명랑운동회, 대학가요제

1978년 겨울방학, 서울의 친척집을 찾은 필자는 문화체육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당시 인기 프로그램인 MBC 명랑운동회 공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변웅전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명랑운동회는 많은 인기를 끌었고, 지방의 중학생에게도 ‘이 프로그램을 직접 꼭 봐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1961년 1월 인사동에서 한국문화방송으로 출발한 MBC는 1969년 8월 정동(貞洞)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이곳을 ‘정동’으로 부르는 이유는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무덤정릉(貞陵)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4년 MBC는 문화방송, 경향신문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1975년 문화체육관을 준공했다. MBC 사옥은 1986년 여의도를 거쳐 2014년 상암동으로 이전했지만, 경향신문 사옥은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61년 1월 인사동에서 한국문화방송으로 출발한 MBC는 1975년 문화체육관을 준공했다.
1961년 1월 인사동에서 한국문화방송으로 출발한 MBC는 1975년 문화체육관을 준공했다.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이 같은 회사여서 그런지 당시 명랑운동회 방청권은 경향신문 구독자에게만 지급하고 있었다. 호기롭게 문화체육관에 간 필자는 당황했다. 방청권을 소지하지 않았고, 따로 방청권을 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필자처럼 방청권 없이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바람에 필자도 날렵하게 합류해 공개 방송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이기동, 남성훈, 하청일, 김만수 등 당대의 연예인들이 출연해 운동하는 모습에 열광했다. 현재도 활약하는 가수 현숙이 막내로 출연한 기억이 난다. 공개 방송 마지막에는 경품 추첨이 있었는데 방청권이 없어 이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체육관에서는 명랑운동회 외에도 다양한 공개 방송이나 야외 프로그램과 함께 세계적인 복싱타이틀매치도 개최됐다. 1978년 9월 30일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플라이급 복싱타이틀매치에서 도전자 김성준이 태국의 챔피언 보라싱을 3회에 KO로 이기고 온 국민의 환호를 받았다. 당시는 프로복싱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고,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챔피언이 된 김성준의 인생 역전에 모두가 축하를 보냈다.

문화체육관에서는 명랑운동회 외에도 다양한 공개 방송이나 야외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대표적인 것이 1977년 9월 3일 거행된 MBC 대학가요제다. 1회에서는 서울 출신 그룹 샌드페블지(모래와 자갈)의 ‘나 어떡해’가 대상을 차지했다.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에서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사진은 제1회 ‘77대학가요제 1집 음반.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에서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사진은 제1회 ‘77대학가요제 1집 음반.
대학가요제 출전을 위해서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대학가요제는 이후에도 1982년 6회까지 문화체육관에서 열리면서, 이곳을 대학가요제의 성지로 만들어 갔다.

1978년에 열린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는 부산대 혼성그룹인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가 대상을 차지했다. 1979년에 열린 제3회 대학가요제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18팀이 참가했는데, 대상은 김학래와 임철우가 부른 ‘내가’였다. 이범용과 한명훈이 부른 제4회 대학가요제 대상곡 ‘꿈의 대화’는 필자의 애창곡 중 하나다. 이들 노래들을 적고 따라 부른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문화체육관은 이후에도 각종 공연장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11월부터 2005년 2월까지 ㈜팝콘하우스 대여됐다. 그 이후 문화체육관은 폐쇄됐고, 그 자리에 아파트 공사가 진행돼 현재는 정동 상림원이 준공돼 있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