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인기…단종의 역사, 진실은 어디까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2.25. 17:40

수정일 2026.02.25. 17:46

조회 659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단종의 무덤, 영월 장릉
단종의 무덤, 영월 장릉
  116화   수양대군의 쿠데타와 영월로 간 단종

2026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몰이에 나서고 있다. 숙부 세조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간 단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사극이다. 이제껏 어리고 나약한 이미지로 주로 그려졌던 단종이 영월 백성들과 어울리며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왕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영월 유배,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 금성대군의 역모 등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장면들도 많지만, 단종이 백성들을 가르치거나 화살로 호랑이를 잡는 모습, 금성대군의 역모에 화답하는 장면 등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문종의 승하와 단종의 즉위

단종이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 즉 ‘계유정난’이다. 1453년이 계유년이고, 어려운 것을 바로잡았다는 뜻에서, ‘계유정난’이라 한다. 계유정난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문종의 승하와 단종의 즉위이다.

1450년 세종이 54세의 나이로 승하한 후 왕위는 장남인 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3년상을 마친 직후인 1452년 5월 경복궁 강녕전에서 문종이 3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세종의 상을 당하여 “음료를 입에 넣지 않는 것이 3일이나 되니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윈 것이 예제(禮制)를 지나쳤으며, … 등창을 앓은 것이 갓 나았으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빈소(殯所)에 뫼시고 계시면서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다.” 『문종실록』의 기록에서 보듯이, 세종의 삼년상을 당해 너무나 슬퍼한 것이 건강 악화로 이어졌다. 문종은 승하 직전에도 이제 겨우 어린 세자가 걱정되었다. 고명대신(誥命大臣:왕의 유지를 받드는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세자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경복궁에서 문종이 3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경복궁에서 문종이 3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이른 승하와 12세의 어린 단종의 즉위는 왕실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종으로 즉위한 후, 김종서가 좌의정, 황보인이 우의정이 되었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을 한 채 모든 정사는 의정부에서 관할하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본격화되었다. 태종 때 신권의 강화를 우려하여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실시했지만, 세종대 이후에는 다시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해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체제를 마련해갔다.

그러나 단종의 즉위로 신권이 다시 강화되었는데, ‘황표정사(黃標政事)’ 제도가 이를 대표한다. 조정에서 인사 지명권을 위임받은 신하들이 황색 점을 찍어 대상자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그만큼 신하들의 권력이 커지는 제도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황표정사를 시행하는 한편으로,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권력욕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보다는 조정의 대신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학자풍의 왕자 안평대군을 그들의 후원자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10월 10일의 그날

김종서 등의 신권 강화 움직임에 가장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1418~1468, 재위 1455~1468)이었다. 수양은 태조 때 이방원이 신권의 중심 정도전을 겨냥하여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킨 사건을 떠올렸을 수가 있다. 『단종실록』 1453년 10월 10일의 기록에는 수양대군이 거사를 일으키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먼저 거사를 일으키는 명분을 살펴보자.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안평대군)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비정상적인 일)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안평대군의 별장터였던 무계원
안평대군의 별장터였던 무계원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연결하여 비정상적인 거사를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거사를 일으켰음을 밝히고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거사 준비를 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지만, 수양대군이 거사를 일으킨 명분을 실록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단종실록』은 세조 때 승리자 측에서 작성된 기록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수양대군과의 첫 만남 이후, 확실하게 측근이 된 한명회는 양정, 홍달손, 홍윤성 등 30여 명의 무사들을 수양의 심복으로 추천했고, 수양은 서서히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수양은 거사 1년 전인 1452년 9월 단종의 즉위를 인정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은사를 자청하여 자금성에서 중국 황제 경태제를 만나기도 하였다. 자신에게는 권력욕이 없고 단종을 확실하게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김종서 등 대신들의 견제를 느슨하게 한 것이다.

『명실록(明實錄)』 1452년 12월 15일에는 “조선국왕 이홍위(李弘暐:단종)가 왕위를 세습하여 봉작을 받음으로써 배종한 신하 이유(李瑈:수양대군) 등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말과 토산물을 바치며 대궐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서장관의 직책으로 수양을 수행한 신숙주는 이후에 핵심 참모가 된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휘하에 재사(才士)와 무사들을 끌어들인 수양은 무엇보다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김종서의 제거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1453년 10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거사 당일 수양은 안국동 자신의 집 후원에서 심복들을 모으고 활을 쏘며 전의를 다졌다.

직접 돈의문 밖에 있는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면서 제거 작업을 진두지휘하였고, 양정, 유수 등은 평복을 입고 따르게 했다. 김종서는 수양이 부탁한 편지를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가, 잠복한 수양의 심복들에게 철퇴를 맞았다. 기습적인 공격을 받은 김종서가 쓰러지자 아들 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지만 다시 날아온 양정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김종서 제거 후 집으로 돌아온 수양은 단종의 명령을 빙자하여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군사를 세 겹으로 짜서 세 개의 문을 만들고, 한명회가 작성한 생살부에 따라 각 문에서 쇠뭉둥이를 내려쳤다.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인사들 다수가 처형되었다. 거사의 또 다른 표적이 되었던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에 교동도에서 사사(賜死)하였다.
사육신 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의절사'
사육신 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의절사'

왕이 된 세조와 단종 복위운동

계유정난 직후 단종은 수양에게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겸직하게 하여 모든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결정하게 했다. 수양이 정권과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43명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은 단종이 책봉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든 것이 수양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수양은 자신을 포함하여 거사에 가담한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 12명을 일등공신에 포함한 것을 비롯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단종의 경호부대였지만 수양의 편에 섰던 내금위(內禁衛) 무사들도 대거 공신에 포함되었다. 이제 단종은 허위에 머물렀을 뿐 실권은 완전히 수양에게 넘어가 있었다.

1455년 윤6월, 수양의 압박을 받던 단종은 스스로 왕위를 물려주는 양위(讓位)를 선언하였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던 날 성삼문은 수양에게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인 예방승지의 직책에 있었다. 그날 옥새를 경회루 다락 아래에서 수양에게 전해준 성삼문은 자괴감에 빠졌고, 절친한 벗 박팽년은 ‘차라리 옥새를 끌어안고 경회루에 빠져 죽자’고 하였다. 성삼문은 박팽년을 말리며, 단종을 다시 왕으로 올릴 수 있는 복위운동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뜻을 같이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무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세조는 단상에서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을 세우기로 하고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를 적임자로 지목하였다. 시해를 모의하고 있던 주동자들이 세조를 바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명회가 연회 장소인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더위가 심하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말고 세자도 참석시키지 말자고 청하였다. 세조가 이를 수용하면서 거사 주모자들 간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유응부 등은 일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자고 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거사 날짜를 다시 계획하자’고 하였다. 결국 거사는 연기되었고 내부의 밀고자가 나타났다. 김질은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사전에 준비되고 있던 단종 복위운동을 고변했고, 성삼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단종 복위에 참여한 인사들은 줄줄이 압송되어 세조 앞에서 혹독한 국문을 당하였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영월로 간 단종의 최후

1456년 6월 사육신을 중심으로 상왕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에 대한 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1457년 6월에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와 권완의 역모 고변까지 일어나자, 세조는 단종의 유배를 결정했다. 유배지로 정해진 곳은 강원도 영월. 영월은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오지였고, 특히 청령포 지역은 세조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유배지였다.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였다. 정순왕후와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하고, 지금의 광진구 화양동에 위치한 화양정으로 갔다.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까지 간 뒤 육로로 원주를 거쳐 영월로 향하였다.

청령포는 동·남·북 3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막혀있다. 육지이면서도 철저히 고립된 섬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단종이 유배지에 온 후 정국은 또다시 들끓었다. 단종 복위를 시도했다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금성대군의 처벌과 함께 단종의 처벌까지 주장하였다. 왕실 종친들과 효령대군, 양녕대군까지 단종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사육신 역사공원 옹벽에 적혀 있는 함석헌 선생의 글
사육신 역사공원 옹벽에 적혀 있는 함석헌 선생의 글
결국 세조는 단종의 처형을 명했다. 1457년 10월 21일『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하였지만, 세조가 직접 죽음을 지휘한 정황은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인조 때 나만갑이 지은 『병자록』에는 세조가 보낸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어명을 전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단종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단종 곁에서 늘 시중을 들던 통인(通引:시중드는 사람)이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고 한다.

권력에 의해 기획된 죽음이었던 만큼 시신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이다. 엄흥도는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곳에 무덤을 만들고 장사를 지냈다 한다. 단종의 무덤은 1517년 왕명으로 찾아 봉분이 조성될 때까지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에도 ‘노산군묘’로 불리었다. 숙종 때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결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면서, 그 무덤도 ‘장릉(莊陵)’으로 왕릉의 위상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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