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달리자! 서울 지명에 숨은 '말(馬)'의 역사 속으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2.11. 14:19

서울숲 군마상
115화 역사와 함께한 말 이야기
2026년 병오년은 말의 해이다. 말은 우리 민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동물이다.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말이 싣고 온 알에서 태어났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뛰어난 말타기 능력을 보유하는 등 특히 건국 시조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말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026년 병오년은 말의 해이다. 말은 우리 민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동물이다. 신라의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말이 싣고 온 알에서 태어났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뛰어난 말타기 능력을 보유하는 등 특히 건국 시조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말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말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탄생에 말이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말이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의 위치를 알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음이 나타난다.
삼국시대부터 말은 사냥이나 전쟁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고구려의 무용총(舞踊塚) 벽화를 보면 오른쪽 벽 대부분은 수렵도(狩獵圖)가 차지하고 있다. 말을 타고 호랑이와 사슴 사냥을 하는 고구려인의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말을 타면서도 방향을 뒤로하여 사슴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압권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김유신과 말에 대한 일화는, 고려시대의 학자 이인로(李仁老)가 저술한 『파한집(破閑集)』에 나온다. 젊은 시절 화랑 김유신은 천관녀라는 여인을 사랑했는데, 어머니 만명부인이 “어찌하여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 면서 크게 나무랐다. 김유신은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천관녀의 집에 들르지 않기를 맹세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에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하던 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추었다. 천관녀를 다시 만난 것을 크게 자책한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에서, ‘말 목 자른 김유신’이라는 가사로 이 이야기는 더 유명해졌다.
황산벌(현재의 논산)에서 김유신에게 맞섰던 계백은 백제 진영으로 돌진한 화랑 관창을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다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힘껏 싸웠다. 계백은 관창을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말에 실려 온 관창의 목을 벤 신라군의 사기는 급격히 높아졌고, 결국에는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관창의 성을 ‘관’씨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관창은 김품일 장군의 아들로 성이 김씨인 김관창(金官昌)이다.
삼국시대부터 말은 사냥이나 전쟁에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고구려의 무용총(舞踊塚) 벽화를 보면 오른쪽 벽 대부분은 수렵도(狩獵圖)가 차지하고 있다. 말을 타고 호랑이와 사슴 사냥을 하는 고구려인의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말을 타면서도 방향을 뒤로하여 사슴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압권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김유신과 말에 대한 일화는, 고려시대의 학자 이인로(李仁老)가 저술한 『파한집(破閑集)』에 나온다. 젊은 시절 화랑 김유신은 천관녀라는 여인을 사랑했는데, 어머니 만명부인이 “어찌하여 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 면서 크게 나무랐다. 김유신은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다시는 천관녀의 집에 들르지 않기를 맹세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에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하던 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추었다. 천관녀를 다시 만난 것을 크게 자책한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에서, ‘말 목 자른 김유신’이라는 가사로 이 이야기는 더 유명해졌다.
황산벌(현재의 논산)에서 김유신에게 맞섰던 계백은 백제 진영으로 돌진한 화랑 관창을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다 마신 후에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힘껏 싸웠다. 계백은 관창을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말에 실려 온 관창의 목을 벤 신라군의 사기는 급격히 높아졌고, 결국에는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관창의 성을 ‘관’씨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관창은 김품일 장군의 아들로 성이 김씨인 김관창(金官昌)이다.
![왕실의 주요 행사에 많은 말들이 동원되었다. [조선왕조의궤]](/uploads/mediahub/2026/02/fzaPRZPlpMSbZdFohNqRPNSvELsIdlmn.jpg)
왕실의 주요 행사에 많은 말들이 동원되었다. [조선왕조의궤]
고려, 조선시대의 말과 목장
고려시대에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 이민족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보병과 함께 고려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기마병이었던 만큼 말은 전쟁에 필수적인 무기가 되었다. 고려중기 윤관(尹瓘)은 왕명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게 되는데,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주력 부대였다. 말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서는 좋은 목장이 필요했고, 제주도는 목장 조성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려후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이 있었을 때 원나라가 가장 탐낸 곳도 말을 잘 키울 수 있는 제주도였다. 원나라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고 직할령으로 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목장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목장을 재건하는 한편, 수초가 좋은 곳에 국영 및 사영의 목장을 설치하였다. 소·양·돼지·염소 외에도 노루(獐)·고라니(麂) 까지 사육하였으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체 목장의 90%를 차지하는 말목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58개소, 『동국여지승람』에 87개소, 『대동여지도』에 114개소, 『증보문헌비고』에 171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목장은 육지에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다의 섬이나 바닷가에서 뾰족하게 내민 땅인 곶(串)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라도에 가장 많았고, 경기도·경상도의 순으로 전체의 70% 이상의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서울 지역에서는 아차산과 뚝섬 일대 등에 목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섬으로는 제주도가 15개소로 가장 많았다.
혼례식, 장례식과 같은 왕실의 주요 행사에 많은 말들이 동원되었던 모습은 왕실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의궤(儀軌)의 반차도(班次圖:행렬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1759년 6월 66세의 왕 영조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은 혼례식에는 391필의 말이 등장하고 있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화성 행차에 나섰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당시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를 보면, 779필의 말이 등장하고 있다. 정조가 탄 말은 좌마(座馬)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정조는 융복(戎服:군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행차에 나섰다. 혜경궁 홍씨가 탄 자궁가교(慈宮駕轎)를 보면, 두 마리 말이 관리들과 함께 가마를 운반하는 모습이다. 장거리 행차인 만큼 사람이 가마를 메지 않고 말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말의 색깔은 흰색, 갈색, 회색 등으로 다양하다. 행차에 동원된 말은 서울 부근의 중림역, 도원역, 양재역, 경안역, 연서역, 평구역 등에서 141필의 경기도 역마(驛馬)를 차출하고, 나머지는 사복시(司僕寺:조선시대 말을 먹이는 관청,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의 말 199필, 군용마 등으로 구성되었다.(한영우, 『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참고)
조선시대의 목장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목장을 재건하는 한편, 수초가 좋은 곳에 국영 및 사영의 목장을 설치하였다. 소·양·돼지·염소 외에도 노루(獐)·고라니(麂) 까지 사육하였으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체 목장의 90%를 차지하는 말목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58개소, 『동국여지승람』에 87개소, 『대동여지도』에 114개소, 『증보문헌비고』에 171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목장은 육지에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다의 섬이나 바닷가에서 뾰족하게 내민 땅인 곶(串)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라도에 가장 많았고, 경기도·경상도의 순으로 전체의 70% 이상의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서울 지역에서는 아차산과 뚝섬 일대 등에 목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섬으로는 제주도가 15개소로 가장 많았다.
혼례식, 장례식과 같은 왕실의 주요 행사에 많은 말들이 동원되었던 모습은 왕실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의궤(儀軌)의 반차도(班次圖:행렬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1759년 6월 66세의 왕 영조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은 혼례식에는 391필의 말이 등장하고 있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화성 행차에 나섰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당시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를 보면, 779필의 말이 등장하고 있다. 정조가 탄 말은 좌마(座馬)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정조는 융복(戎服:군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행차에 나섰다. 혜경궁 홍씨가 탄 자궁가교(慈宮駕轎)를 보면, 두 마리 말이 관리들과 함께 가마를 운반하는 모습이다. 장거리 행차인 만큼 사람이 가마를 메지 않고 말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말의 색깔은 흰색, 갈색, 회색 등으로 다양하다. 행차에 동원된 말은 서울 부근의 중림역, 도원역, 양재역, 경안역, 연서역, 평구역 등에서 141필의 경기도 역마(驛馬)를 차출하고, 나머지는 사복시(司僕寺:조선시대 말을 먹이는 관청,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의 말 199필, 군용마 등으로 구성되었다.(한영우, 『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참고)
기록으로 전하는 명마 이야기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의 해라고도 하는데 붉은 말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삼국지』에서 관우(關羽) 장군이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이다. 원래 여포가 탔는데,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 「여포전(呂布傳)」에 ‘여포는 적토(赤兎)라고 하는 좋은 말이 있었다. … 여포가 원소(袁紹)의 요청을 받아 장연(張燕)을 공격했을 때 언제나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타고 적진을 돌진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를 바탕으로 명나라의 나관중(羅寬中)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적토마가 관우에게 전해졌다고 나온다. 여포가 조조(曹操)에게 사로잡히면서 적토마는 조조의 손에 들어갔고, 관우가 하비(下邳)에서 조조에게 패하여 항복했을 때, 조조가 관우를 위해 적토마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이후 적토마는 관우를 따라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였다. 관우가 손권(孫權)에 의해 처형된 후에 적토마는 마충(馬忠)에게 넘어갔는데, 사료를 일체 먹지 않고 굶어 죽음으로써 관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룻밤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 천리마에 대한 일화는, 사실 말의 능력을 알아본 백락(伯樂)에 대한 이야기가 더 중심을 이룬다. 백락은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 목공(穆公)의 신하로 상마가(相馬家:말의 관상을 보는 사람)로, 당나라 때의 한유(韓愈)는 ‘세상에 백락이 있은 그런 뒤에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말은 그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관건이 됨을 강조하였다. ‘백락지고(伯樂之顧:백락의 돌아봄)’라는 사자성어도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북한에서는 1956년부터 시작한 근대화, 산업화 운동을 ‘천리마운동’이라, 하였는데, 천리마의 부지런함과 빠른 속도 등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말과 관련한 고사성어들은 주마간산(走馬看山:말을 타고 가면서 산을 봄, 사물의 겉만을 보고 내용을 보지 않음), 마이동풍(馬耳東風:말귀에 동쪽 바람, 남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냄),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뜻으로, 잘하는 사람을 더욱 격려하여 힘쓰게 함), 견마지로(犬馬之勞:개와 말의 노고,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와 말의 노력으로 자신의 노력을 낮추어 일컫는 표현), 새옹지마(塞翁之馬: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단정하기가 힘듦),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 진나라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휘두른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름), 죽마고우(竹馬故友:대나무 말을 같이 타던 친구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등과 같이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그만큼 말이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룻밤에 천리를 달린다는 말, 천리마에 대한 일화는, 사실 말의 능력을 알아본 백락(伯樂)에 대한 이야기가 더 중심을 이룬다. 백락은 중국 춘추시대 진나라 목공(穆公)의 신하로 상마가(相馬家:말의 관상을 보는 사람)로, 당나라 때의 한유(韓愈)는 ‘세상에 백락이 있은 그런 뒤에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말은 그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관건이 됨을 강조하였다. ‘백락지고(伯樂之顧:백락의 돌아봄)’라는 사자성어도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북한에서는 1956년부터 시작한 근대화, 산업화 운동을 ‘천리마운동’이라, 하였는데, 천리마의 부지런함과 빠른 속도 등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말과 관련한 고사성어들은 주마간산(走馬看山:말을 타고 가면서 산을 봄, 사물의 겉만을 보고 내용을 보지 않음), 마이동풍(馬耳東風:말귀에 동쪽 바람, 남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냄), 주마가편(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뜻으로, 잘하는 사람을 더욱 격려하여 힘쓰게 함), 견마지로(犬馬之勞:개와 말의 노고,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개와 말의 노력으로 자신의 노력을 낮추어 일컫는 표현), 새옹지마(塞翁之馬: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단정하기가 힘듦),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 진나라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휘두른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휘두름), 죽마고우(竹馬故友:대나무 말을 같이 타던 친구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등과 같이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그만큼 말이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과 관련된 다양한 고사성어들은 말이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준다.
말을 기억하는 서울의 공간들
서울에도 말과 관련된 공간들이 있다. 아차산과 함께 동쪽의 관문이 되는 용마산(龍馬山)은 일출의 명소이다. 아차산과 뚝섬 일대에는 말을 기르는 목장들이 많았는데, 자양동(紫陽洞), 마장동(馬場洞) 등의 동명이 이를 증언해 준다. 자양동(紫陽洞)은 자마장(雌馬場)리, 즉 ‘암말을 키우는 목장’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한강을 통해 비옥한 퇴적물이 흘러들어와 쌓인 지역이었기에 자연 벌판이 많았고, 말을 방목하기에 유리하여 실제 암말을 많이 길렀다. 암말을 뜻하는 한자 자마(雌馬)의 ‘자(雌)’에서 한자가 변해 ‘자(紫)’로 바뀌었다. 자양동 인근의 화양동의 ‘화양은 주서(周書)에 나오는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화산 양지바른 곳에 말을 돌린다)’에서 나온 용어로 말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마장동은 조선 초부터 이곳에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어서, 마장리(馬場里)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198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많은 말을 볼 수 있었던 곳은 뚝섬경마장이었다. 경마장이 이곳에 생긴 것은 뚝섬 일대에 조선시대에도 말을 먹이는 목장이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깊다. 1954년 제주도 조랑말을 들여와 경마장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뚝섬경마장은 1980년대까지 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다. 1989년 경기도 과천시에 새롭게 경마장이 조성되면서, 뚝섬경마장 시대는 막을 내리고 2005년 서울숲으로 재탄생되었다. 서울숲에는 기수와 말이 경마를 펼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을 조성하여, 이곳이 한동안 경마장으로 활용되었음을 기억시켜 준다.
198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많은 말을 볼 수 있었던 곳은 뚝섬경마장이었다. 경마장이 이곳에 생긴 것은 뚝섬 일대에 조선시대에도 말을 먹이는 목장이 있었던 것과도 관련이 깊다. 1954년 제주도 조랑말을 들여와 경마장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뚝섬경마장은 1980년대까지 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다. 1989년 경기도 과천시에 새롭게 경마장이 조성되면서, 뚝섬경마장 시대는 막을 내리고 2005년 서울숲으로 재탄생되었다. 서울숲에는 기수와 말이 경마를 펼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을 조성하여, 이곳이 한동안 경마장으로 활용되었음을 기억시켜 준다.
조선시대 말을 먹이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는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위치했는데, 사복시가 이곳에 설치된 데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이곳에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의 집이 있었는데, 1398년 이방원(후의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처형하였다. 정도전에 대한 이방원의 반감은 그의 집을 몰수하여 말을 기르는 사복시로 만든 것으로 이어졌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는 뜻의 ‘피맛골’은 조선시대 양반관 관리들이 말을 타고 지나는 종로의 대로변을 피해서 다닌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피맛골은 1990년대까지 서민들이 밥과 술을 즐기는 대표적 장소였지만, 지금은 그 공간이 많이 축소되었다. 종로 1가 르미에르 빌딩 안쪽,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 주변에 옛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양재역 사거리를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을 공급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말을 먹이기 위한 죽을 공급하는 마을이 형성되어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을 갈 때 말 위에서 급하게 팥죽을 먹어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고지도에도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가 있으며, 조선후기의 사료에도 ‘광주(廣州) 말죽거리(馬粥巨里) 역점(驛店)에 도착하였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말죽거리 일대는 2004년에 개봉하여 크게 흥행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병오년 말의 해를 맞이하여, 말에 관한 역사도 알아보고, 말을 기억하는 장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양재역 사거리를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을 공급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말을 먹이기 위한 죽을 공급하는 마을이 형성되어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을 갈 때 말 위에서 급하게 팥죽을 먹어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고지도에도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가 있으며, 조선후기의 사료에도 ‘광주(廣州) 말죽거리(馬粥巨里) 역점(驛店)에 도착하였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말죽거리 일대는 2004년에 개봉하여 크게 흥행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병오년 말의 해를 맞이하여, 말에 관한 역사도 알아보고, 말을 기억하는 장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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