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파트! 근현대 서울 아파트 역사 속으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11.20. 16:16

수정일 2024.11.20. 16:16

조회 2,088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제2시범아파트는 당시로서는 고층인 10층 건물로 지어졌다.
제2시범아파트는 당시로서는 고층인 10층 건물로 지어졌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4) 근현대 서울 아파트

가수 블랙핑크 로제가 브루노 마스와 함께한 곡 ‘아파트’가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1980년대에 가수 윤수일이 부른 노래 ‘아파트’가 다시 소환되는가 하면, 이제는 주거지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됐다. 

일제 강점시기인 1930년대에 처음 그 모습을 보인 이후, 아파트는 한국 도시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지표로 자리를 잡았다. 한강변을 따라 형성된 고층 아파트의 끝없는 행렬은 외국인들에게도 강한 이미지를 주는 한국의 대표경관이 됐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 윤수일 ‘아파트’ 중

근대 시기의 아파트

1982년 첫 선을 보인 윤수일 작사, 작곡의 ‘아파트’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대학가의 축제나 운동 경기 때의 응원가로 크게 유행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로 시작하는 가사는 당시 윤수일이 자주 거닐었던 잠실대교와 인근 잠실 지역의 아파트 모습을 담았다고 한다.

1980년대 잠실 지역은 반포동, 압구정동 등과 더불어 서울에서도 가장 많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지역이었다. 대학가에서 운동권 가요가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도 ‘아파트’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가요로 기억된다. 아파트 입구에서 기약 없이 연인을 기다리던 경험들도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 다시 또 찾아왔지만 /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 쓸쓸한 너의 아파트”라는 노래 가사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이제는 대한민국 가구 수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아파트의 역사는 일제 강점 시기 미쿠니(三國)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경성 미쿠니 상사는 1930년 3층의 공동주택을 세웠는데, 이것을 아파트의 시작으로 본다.
1930년대 세워진 아파트로 녹색의 외관 건물이 인상적인 충정아파트.
1930년대 세워진 아파트로 녹색의 외관 건물이 인상적인 충정아파트.
1937년에는 토요다 타네오(豊田種雄)가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5층의 60세대 규모의 충정아파트(풍전 또는 토요타 아파트)를 준공했다. 주로 일본인들이 임대해 사용했다. 1953년 휴전 이후엔 유엔 전용의 트래머 호텔로 활용되다가, 1962년 코리아관광호텔로 잠시 영업을 했다. 1970년대에는 ‘유림아파트’라 불렸고 이후에도 소유권이 여러 차례 이전되는 변화를 거쳤는데, 1978년에서 1979년의 도로 확장으로 입주 52가구 중 19가구만 남게 됐다.

1930년대 세워진 아파트라는 역사성과 시그니처가 된 녹색의 외관 건물이라는 상징성으로 2013년 서울시에서는 충정아파트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노후한 건물로 안전성 등의 문제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28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힘으로 지은 최초의 아파트들

일본인이 아닌 우리 힘으로 지은 최초의 민간 아파트는 성북구 종암동(鍾岩洞)에 자리를 잡은 종암아파트이다. 1958년에 4, 5층짜리 아파트 3개 동이 세워졌는데, 준공식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참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먼트 하우스’라는 명칭이 처음 소개됐고, 이후 ‘아파트’라는 말이 일반화됐다.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한 아파트이기도 했다. 입주 당시에는 정치인, 교수, 예술인 등 상류이 입주한 고급아파트였으며, 1993년 철거됐다.

단지형으로 처음 세워진 아파트는 대한주택공사(현재의 LH,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주도해 1964년 마포구 도화동에 세운 마포아파트였다. 1961년 10월에 착공해 1964년 11월 30일 1, 2차 공사가 완성됐다. 10층 11개 동, 총 1,158호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주변 기관의 반대로 6층으로 낮아졌다.

이후 대한주택공사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단지형 아파트를 조성했고, 주공아파트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주택 개발을 주도할 기관으로 기존의 대한주택영단을 대한주택공사로 전환시켰다. 1941년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이, 1948년 8월 대한주택영단이 됐고, 1962년에는 대한주택공사(大韓住宅公社)가 됐다.

1965년에 대한주택공사에서 완공한 동대문아파트는 7층 건물로, 중앙정원형(또는 중정형)의 아파트였다. 초기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아 ‘연예인아파트’라는 별명도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대한주택공사에서는 정동(貞洞)에도 중앙정원형 아파트를 지었다.

주상복합형 아파트의 등장

1968년 세운상가(世運商街)가 완공됐다. 세운상가는 세계의 기운을 가진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공습을 대비해 소개(疏開)된 지역에 광복 이후 불법 판자촌이 조성된 곳에 지어졌다. 김현옥 시장이 주도하고, 김수근(金壽根:1931~1986) 건축가가 설계했다. 종로3가와 퇴계로3가에 세워졌으며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볼 수 있다. 처음엔 재력가나 정부 고위인사 등이 거주했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전자제품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세운상가는 강남 개발 및 1987년 용산전자상가의 설립으로 점차 그 기능을 잃고 슬럼화가 진행됐다. 서울시는 이곳을 공원화하는 계획을 세워 진행하고 있다.
종로3가와 퇴계로3가 사이에 위치한 세운상가는 1968년 완공됐다.
종로3가와 퇴계로3가 사이에 위치한 세운상가는 1968년 완공됐다.
낙원상가는 아파트와 상가가 있는 주상복합 건물 아래에 도로가 있는 형식으로 1968년에 완공됐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는 악기사들이 이곳 상가에 모여들면서, 최대의 악기 전문 상가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상가에 허리우드극장이 개관했다. 서울 중심에 있는 대부분의 영화관이 폐관됐지만, 허리우드극장은 인근의 파고다 공원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는 실버세대들을 위한 추억의 영화 상영관으로 지금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김현옥(金玄玉:1926~1997) 서울시장은 누구보다 아파트 건설에 매진했다. 1966년 제14대 서울시장에 발탁돼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개발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속도전을 전개하던 상황에서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시는 1969년 판자촌 등 불량주택 제거 사업의 일환으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와우시민아파트 건립을 추진했다. 1969년 6월에 착공해 6개월이라는 짧은 공사 기간에 완공한 아파트는 화를 불러일으켰다. 1970년 4월 8일 총 16개 동 중 제15동이 붕괴된 것이다.

경향신문 4월 8일의 기사에는 “와우(臥牛) 시민(市民) 아파트 붕괴참사(崩壞參事)”를 가장 큰 기사 제목으로 뽑고 “기초(基礎) 공사 허술해” 등의 기사도 썼다. 70여 명이 매몰돼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김현옥 시장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났고, 그를 이어 1970년 4월 16일 양택식(梁鐸植:1924~2012) 시장이 15대 시장으로 취임했다.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이후 와우아파트는 시민아파트의 정리사업으로 철거됐다.

산자락에 들어선 아파트들

조선시대에 한양(지금의 서울)이 수도로 결정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지리였다. 낙산(126m), 인왕산(338m), 남산(262m), 북악산(342m)의 네 곳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국방과 도성민들을 관리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1982년 인왕산에서 세종로 방향으로 내려다본 도심의 모습. 사진 중앙의 옥인시범아파트는 2010년 철거됐다. 그 후 이 자리에는 수성동계곡이 복원됐다.
1982년 인왕산에서 세종로 방향으로 내려다본 도심의 모습. 사진 중앙의 옥인시범아파트는 2010년 철거됐다. 그 후 이 자리에는 수성동계곡이 복원됐다.
아파트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이들 산자락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종로구 옥인동, 인왕산의 물줄기가 흐르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에 1969년 아파트 조성 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1970년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사건의 여파로 연기됐다가 1971년에 9개 동 308세대로 완공된 아파트가 옥인아파트였다. 정부에서 시범적으로 조성한 아파트라는 뜻에서 ‘옥인시범아파트’라고도 불렀다.

개발 우선주의 분위기에서 인왕산의 경관을 헤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아파트가 노후화되고, 이 지역 경관을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 속에 아파트 철거가 시작돼, 2011년 완전한 철거가 이뤄졌다. 특히 이곳은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水聲洞: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의 배경이 된 곳으로, 원래는 세종의 세 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 아파트 철거 후 수성동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정선의 그림 속에 있는 기린교(麒麟橋)가 발견돼 큰 이목을 끌었다.
제2시범아파트는 남산의 지형을 활용해 6층과 7층에 구름다리를 설치한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제2시범아파트는 남산의 지형을 활용해 6층과 7층에 구름다리를 설치한 것으로 눈길을 끌었다.
남산 자락에는 회현시민아파트가 들어섰다. 1차분은 1968년 10월 완공됐는데, 6층짜리 1개 동으로 구성됐다. 2003년에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중구회현체육센터가 건립됐다. 2차분은 1970년 5월 완공됐는데, 직전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의 영향으로 부실시공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를 담아 ‘회현 제2시범아파트’라 했다. 당시로서는 고층인 10층 건물로 구성됐으며, 남산의 지형을 활용해 6층과 7층에 구름다리를 설치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철거민을 위한 아파트로 지어졌으나, 남산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연예인들이 거주해 동대문아파트와 함께 ‘연예인아파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2009년에는 인기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촬영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가장 최근까지 원형의 건물을 유지했던 아파트로, 2024년 철거가 확정됐다.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아파트 모습.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아파트 모습.
낙산(洛山) 자락 동숭동에는 1960년대 말에 동숭시민아파트 18개 동, 낙산시민아파트 5개 동, 동숭시범아파트 5개 동, 기자아파트 2개 동 등 총 30개 동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낙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동쪽에 위치하며,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 낙타산(駱駝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낙산 자락의 아파트들도 2000년을 전후로 모두 철거되고, 현재 이 자리에는 2002년에 조성된 낙산공원이 있다. 공원 안에 있는 낙산전시관에서는 낙산아파트의 역사도 살펴볼 수가 있다.
낙산전시관에서는 낙산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수 있다.
낙산전시관에서는 낙산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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