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말라리아가? 세종대왕의 '학을 떼는' 퇴치법!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08.21. 15:31

수정일 2024.08.21. 17:34

조회 1,730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5) 말라리아를 격퇴하라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지난 7일 전국에 말라리아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모기 매개 감염병 예방을 위한 방역 활동이 한창이다.
지난 7일 전국에 말라리아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모기 매개 감염병 예방을 위한 방역 활동이 한창이다.

조선시대의 임금 중에서 둔갑술에 간절히 매달려 본 사람이 있을까? 바로 세종 임금이 그런 사람이었다. 세종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많기로 유명한 임금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과학 분야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그가 둔갑술에 뛰어난 사람을 모아서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의외로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연을 잘 살펴보면 당시로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둔갑술이 세종 어머니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어머니였던 원경왕후는 어떤 기준으로 말해 보든 간에 영웅호걸이라는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자 태조 이성계의 며느리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던 시대에 이성계와 이방원의 무리가 나라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꼽아 보자면 원경왕후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나중에는 임금의 어머니가 되기도 했으니 한동안 온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병에 걸리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1420년 원경왕후는 말라리아에 걸렸다. 말라리아라고 하면 열대 지역인 외국에서 피해가 큰 병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하기에, 무심코 한국에는 말라리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과거 ‘학질’이라고 불렀던 병이 현재의 말라리아와 대체로 일치하므로 학질이 곧 말라리아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다.

한국어 관용 표현 중에 ‘학을 뗀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학’이 바로 학질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학을 뗀다’라는 말은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낫는 정도의 경험만큼 고통스럽고 싫은 경험이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말라리아는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에게 큰 피해를 입힌 병이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침이 나란히 놓인 헌릉. 1420년 원경왕후는 말라리아에 걸렸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침이 나란히 놓인 헌릉. 1420년 원경왕후는 말라리아에 걸렸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지만 말라리아는 모기가 옮기는 전염병이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모기 몸속에 들어 있던 열원충이라는 아주 작은 크기의 기생충이 모기가 사람을 물 때 사람 몸으로 건너오면서 생기는 병이다. 그리고 말라리아 열원충이 몸에 퍼져 있는 사람을 모기가 물면 열원충은 그 모기의 몸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기가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가서 다른 사람을 물면 그 열원충을 옮겨 놓게 되므로, 병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퍼져 나간다.

옛사람들은 모기와 열원충이 말라리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것은 조선보다 과학이 일찍 발달했다고 하는 유럽에서도 한동안 마찬가지였다. 유럽 사람들은 공기 중에 사악한 기운, 나쁜 기운이 퍼져 있을 때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오페라에서는 분위기를 잡는 데 좋은 노래를 아리아라고 하는데, 여기에 ‘말(mal)’이라는 말이 달라붙은 말라리아는 얼추 ‘분위기가 나쁜 공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20세기가 거의 다 된 1897년이 되어서야 인도에서 활동하던 의사 로널드 로스가 모기가 말라리아를 퍼뜨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사실이 알려진 1897년 8월 20일을 기념해서 지금도 매년 8월 20일을 세계 모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원경왕후가 말라리아에 걸린 1420년이면, 이 사실을 인류가 밝혀내기보다 거의 5백년 앞선 시대다. 그러니 그 시절 모기, 열원충, 말라리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 시대의 조선 사람들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는 일이 생기면, 사악한 귀신이 붙어서 아프게 된다고들 생각했다.

특히 전염병이 도는데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병에 걸리지 않으면, 누구는 귀신이 싫어해서 더 아프게 하고 누구는 귀신이 관심이 없어서 지나친다는 식의 이야기가 유행할 만도 했다.

학질 역시 학귀, 즉 학질 귀신이 사람에게 붙어서 해코지를 하면 생기는 병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했다. <어우야담>을 보면, 전림이라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고통을 받다가 학질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허공에 칼질을 하며 싸우려고 들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다.

그러니 세종 임금이 자신의 어머니인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려 고통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 갖가지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도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학질을 잘 다룬다는 사람들이라며 소문난 사람들을 여기저기에서 선발해 왔더니, 그중에서는 둔갑술에 뛰어난 사람들이 꽤 많았기에 세종 임금은 그 방법에 따라 원경왕후를 치료하고자 했다.

그 당시 원경왕후와 그 남편 이방원은 궁궐에서 나와 ‘낙천정’‘풍양궁’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그중 풍양궁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흔적이 남아 있고, 낙천정은 서울 광진구 잠실대교 인근에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 근처가 한 때는 한국 최고의 둔갑술사들이 임금님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실력을 겨루었던 곳이다.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기에 나는 광진구 낙천정 근처에서 말라리아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 예방에 관한 행사를 개최하거나 학술 대회를 열어도 의미가 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둔갑술사라고 해도 말라리아를 치료할 수는 없다. 본격적인 세계 최초의 말라리아 치료제는 한참 세월이 흘러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약 속에서 퀴닌을 발견해 내면서 처음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이후 퀴닌을 개조한 구조로 만들어낸 인공 물질, 클로로퀸이 1930년대 이후 현대 화학의 힘으로 제조되면서 효과적인 치료 작업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둔갑술에 희망을 품고 있던 원경왕후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한 가지 공교로운 기록이 있다면, 원경왕후가 목숨을 잃기 두 달쯤 전인 1420년 음력 6월 20일 한 둔갑술사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 좋다’고 해서 원경왕후 주변에는 아무도 없도록 조치했다는 이야기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옮기는 감염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그 시절에도, 그 둔갑술사는 오랜 경험으로 우연히 말라리아가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1968년 방역 소독시범하는 모습
1968년 방역 소독시범하는 모습

클로로퀸 같은 치료제가 도입된 후 그 피해가 줄기는 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말라리아 피해는 한국에 끈질기게 이어졌다. 다행히 말라리아의 원인이 되는 모기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고, 모기 중에서도 말라리아를 옮기는 얼룩날개모기를 빠르게 퇴치하는 사업이 성공하면서 말라리아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도시 곳곳에서 흰 연기를 내뿜으며 ‘소독을 한다’면서 방역을 하는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풍경이 굉장히 흔했는데, 이들 중 다수가 주로 해충을 없애는 살충 효과가 있는 약품을 뿜어내고 다녔던 차량이었다. 그와 같은 다양한 노력의 결과, 1980년대 전후로 몇 년 동안은 이제 한국에서 말라리아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4년 한국에서 말라리아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다시 나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비무장지대에 있는 모기가 살아 남아서 계속해서 날아 온다는 추정이 자주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말라리아가 가장 자주 발생하는 곳도 인천, 경기도, 강원도 북부 지역이다. 아마 전방에서 군복무를 했던 사람이라면 부대에서 나눠주는 말라리아 약을 먹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대부분의 다른 선진국에서는 말라리아 퇴치와 모기 제거로 말라리아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매년 수백 명 수준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한다. 2023년 국내 말라리아 발생 건수는 747명이나 된다.

그래서 한국의 말라리아 발생 건수는 세계의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압도적으로 말라리아가 많은 나라에 속한다. OECD 국가 중 말라리아 발생 통계가 나오는 곳들을 살펴보면, 열대지방에 있는 멕시코보다 한국의 말라리아 환자 숫자가 더 많을 때도 흔하다.

말라리아를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기후변화로 말라리아의 위험이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가능성을 예전부터 과학자들이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는 여름철에 활발히 활동하면서 새끼를 치고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퍼져 나가는데, 한국의 기후변화는 여름철이 더 길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자연히 그에 따라 말라리아의 위험성은 더 커질 수 있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말라리아 발생 건수가 많은 나라에 속한다. 국내에서 채집된 말라리아 모기 모습
OECD 국가 중 한국은 말라리아 발생 건수가 많은 나라에 속한다. 국내에서 채집된 말라리아 모기 모습

아닌 게 아니라, 지난 7월부터는 서울의 양천구와 강서구에서도 말라리아 환자의 집단 발생이 관찰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 있었고 질병관리청에서 8월 7일 전국에 말라리아 경보를 발효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급격히 바뀌면 말라리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다른 감염병들이 예상 밖으로 갑작스레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서울이 겪고 있는 말라리아의 위기는 앞으로 보다 더 넓게 서울 주변의 생태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보다 조직적으로 과학 연구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기후변화 시대에 그 피해를 줄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면 성능이 뛰어난 말라리아의 백신이 영국 회사에 의해 개발되어 금년 초부터 아프리카의 카메룬에서는 최초로 어린이 대상 백신 접종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백신이야말로 그 어떤 조선시대의 둔갑술보다 강한 현대의 귀신 퇴치법인 셈이다.

또한 이것은 말라리아와 같은 감염병과 사람의 싸움에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대응 방법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선진국 중에 말라리아 피해를 가장 심하게 입는 나라로서, 한국이 이런 연구에 투자하는 것도 무척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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