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아' 좋아하는 한국인, 오래전부터 얼음과 함께 해왔다?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07.24. 16:23

수정일 2024.07.2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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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3) 납량특집과 서울의 얼음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강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강

언제인가부터 ‘납량특집’이라고 하면 무서운 공포물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는데, 원래 ‘납량’이라는 말에 무섭다는 뜻은 없다. 그저 청량함을 납부해 준다는 뜻, 그러니까 ‘시원하게 해 준다’는 뜻이 있을 뿐이다. 1960년대, 1970년대 여름철 라디오 프로그램 편성표를 보면 ‘납량특집 프로그램’이라고 써놓은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이 라디오에서 공포 영화 주제곡을 편성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시원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해변 휴가에 어울리는 음악 등을 주로 틀어 주었을 뿐이다.

납량특집이 공포물이라는 의미로 완전히 굳어진 것은 의외로 최근인 1980년대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옳다. 1960년대, 1970년대 여름철 특선 영화 프로그램에 납량특집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꼭 공포물이라는 뜻으로 납량특집이라는 말을 썼다기보다는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원한 극장에서 피서를 하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 납량특집이었다. 그 시절 납량특집 영화로는 휴가 대신에 보는 영화이기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담은 예술 영화 보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짜릿한 액션, 스릴러 영화가 편성되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공포물 역시 여러 가지 납량특집의 일부로 종종 편성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컬러 텔레비전이 사람들에게 많이 보급된 상황에서 TV 방송국에서 공포 프로그램을 납량특집이라는 이름으로 편성한 것, 몇 편이 특히 강하게 인상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납량특집은 으레 공포물을 뜻하는 말로 뜻이 좁아졌던 듯하다. 납량이라는 말이 발음도 어려운 한자어이다 보니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워 그렇게 인식이 변하기도 쉬웠던 것 같다.

한문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 보면, 납량이라는 말의 어감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조선왕조실록> 1412년 음력 5월 16일 기록을 보면, 태종 임금이 경복궁의 경회루를 건설한 뒤 이름을 뭐라고 지을 지 고민하는 대목이 보이는데, 이때 경회루의 이름으로 고려했던 말 중에 ‘납량루’라는 것이 있었다. 이 역시 경회루를 무슨 귀신의 집으로 꾸미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시원한 장소라는 뜻으로 떠올린 이름일 뿐이다. 이방원이 심복으로 삼고 있던 신하 하륜이 여러 이름 중에 ‘경회루’가 가장 좋다고 해서 ‘납량루’라는 이름은 결국 탈락했는데, 만약 하륜이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어서 ‘납량루’를 추천했다고 하면 여름철 공포 특집 명소로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가 인기를 끌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경복궁의 ‘경회루’가 ‘납량루’가 될 수도 있었다.
경복궁의 ‘경회루’가 ‘납량루’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 시대 서울의 궁중에서 정말로 여름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납량특집으로 자주 사용했던 것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얼음’이었다. 얼음이 자연히 생기는 겨울철에 얼음을 많이 구해서 최대한 시원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여름이 되면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꺼내 쓰는 방식을 이용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역사에서 얼음이 중요하게 사용된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다. 고조선과 함께 한국 역사의 뿌리로 중요하게 언급되는 나라로 북방의 고대 국가인 부여가 있다. 부여에서 주몽이 탈출해 고구려를 세운 전설적인 이야기는 지금도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고, 백제 역시 스스로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하여 서기 538년에는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꾼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삼국지> 같은 역사 기록을 보면 부여에서는 여름에 얼음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주로 부유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하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고대 부여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으려고 얼음을 많이 쓴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이 얼음을 사용한 용도는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부여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일수록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는 풍속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여름철에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장례식을 크게 열기 위해, 얼음을 많이 사용해서 사람 몸을 보존했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519년 전인 서기 505년에 아예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얼음을 보관하고 사용하는 관청을 지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마침 중국 역사책 <신당서>에는 신라의 독특한 풍습으로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올려놓는다는 언급도 있다. 마치 지금의 냉장고와 같은 방식으로 얼음을 활용한 것이다. 아마도 중국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신라의 이런 풍습이 특이하고 신기해서 이런 기록을 중국 역사책에 써 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신라에서는 여름철 얼음을 활용하는 일이 다른 나라보다 상당히 발달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상일 뿐이지만, 신라 시대부터 사람들은 녹차를 마셨으니, 어쩌면 지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비슷하게 시원한 신라의 얼음 차, 말하자면 아이스 신라노 같은 것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비슷하게 시원한 신라의 얼음 차, 말하자면 아이스 신라노 같은 것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비슷하게 시원한 신라의 얼음 차, 말하자면 아이스 신라노 같은 것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얼음 사용에 대한 기록을 보다 확실하게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시대는 조선 시대다. 지금도 서울 용산구에는 서빙고동, 동빙고동 같은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빙고가 바로 얼음 창고를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겨울철 한강물이 얼어 얼음덩어리가 되면 그것을 캐다가 용산 지역 등등 한강변에 있는 지하 창고처럼 꾸며 놓은 장소에 대량으로 넣어 두는 방식으로 얼음을 확보했다.

공기는 온도에 따라 밀도 차이, 즉 무게 차이가 생기므로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하실에 가까운 형태로 얼음 창고를 만들면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고이므로 공간이 시원해져서 얼음을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된다. 햇볕이 들지 않는 창고이니 햇빛 때문에 따뜻해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창고 천장에 적절히 환기 구멍을 뚫어 놓으면 따뜻한 공기가 생겼을 때 그 공기가 위로 올라가 빠져나가므로 이 역시 창고를 시원하게 하는 데 유리하다.

이런 방식으로 저장해 둔 얼음을 여름철에는 귀중품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이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할 때 얼음을 나눠 주었다는 기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이한 사례로는 1504년 음력 6월 25일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임금의 어머니 생일 잔치에 대한 기록을 짚어볼 만하다. 이때 임금의 친척을 중심으로 남녀 총 274명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고 하는데, 계절이 여름철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냉방 장치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 장치는 커다란 금속 쟁반을 만들어 그 위에 얼음을 올려놓은 형태였다. 재질은 동유(銅鍮)라고 되어 있으니 아마 구리를 주로 이용해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규모는 ‘천 근’이라고 되어 있는데 굳이 딱 천 근이라는 무게에 맞춰서 만든 물건이지는 않을 것이므로 아마도 사람보다도 더 큰 아주 커다란 장치라는 뜻으로 쓴 말인 것 같다.

실록에는 5일 가량 앞서서 ‘얼음을 넣어 두는 기계’를 만들 때 물이 흐르는 구멍을 뚫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기록도 있으므로, 아마 이 얼음 냉방 장치에도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을 시원하게 하면서 자연스레 물이 빠지는 구조도 만들어져 있었을 듯하다.

실제로 얼음은 녹아내리는 동안 녹는점의 온도인 섭씨 0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러므로 많은 얼음이 있으면 그 자체로 주변을 식힐 수 있는 물체를 가져다 놓은 셈이 된다. 게다가 얼음이 녹아 물로 변화할 때에는 1kg당 79.9kcal의 열을 주위에서 더 빼앗아 간다. 이 열의 크기를 융해열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 융해열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는 양이다. 이렇게 물체가 녹거나 마르는 현상을 화학에서는 상변태라고 하고, 상변태를 이용해서 열을 빼앗아 시원하게 하는 장치의 대표가 냉장고와 에어컨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1504년 조선의 궁중에서 사용하던 얼음 냉방 장치는 현대의 에어컨과 기본 원리가 같다. 물론 조선 시대 에어컨은 얼음이 다 녹아버리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지만, 현대의 에어컨은 실외기가 상변태 이전으로 상태를 되돌리는 역할을 해 주기에 전기만 있으면 계속 쓸 수 있다는 차이는 있다.
1957년 한강 채빙
1957년 한강 채빙

이후에도 서울의 얼음 산업은 한동안은 세계 어느 지역 못지 않게 활발히 운영된 편이다. 서울의 명문 양반 집안인 강씨 가문은 지금의 합정 근처에서 얼음 사업을 크게 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기기도 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빙계(氷契)’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종의 얼음 회사 내지는 얼음 조합을 만들어 얼음 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하기도 했다. 때문에 신선한 고기와 생선을 얼음으로 저장하여 먼 곳까지 판매하는 등, 얼음의 사용 용도도 다양하게 발전했고 얼음을 채취하고 판매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생기는 등, 경제적으로도 서울의 얼음 산업은 의미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서울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겨울철에는 얼음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에 비해 사람이 여름철 더위를 견디기는 힘들기 때문에 얼음을 쓸 곳이 많은 도시다. 그러면서도 한강이라는 큰 강이 근처에 있으니, 기술만 있으면 얼음을 구해서 저장하고 판매하고 활용하는 산업이 발달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실제로 고동환 선생의 연구 논문을 보면, 조선 후기 서울에서는 대략 20kg 무게의 얼음덩어리를 백만 개 정도 생산하여 유통할 정도로 얼음 산업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조선 시대에는 상업 발달의 속도가 늦었고 과학 기술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부족했기에 이러한 얼음에 대한 관심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잘 연결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물체를 차갑게 만들기 위한 장치는 열을 빨아들이는 다양한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와 관계가 깊으며, 얼음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기술은 열역학과 열전달 현상에 대한 물리학의 핵심과 직결되어 있다.

만약 조선의 얼음 산업이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시원한 빙수를 만들어 먹기 위한 사업을 하는 가운데, 조선인들이 과학 기술 문명의 세계를 더욱 넓게 창조해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대한민국 시대인 지금, 뛰어난 기술을 앞세운 한국의 냉장고들은 세계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다. 2020년 미국의 한 시장조사업체의 조사 결과를 보도했던 내용을 보면, 미국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 냉장고의 점유율은 44%에 육박한다고 한다. 더운 여름 땀흘리며 얼음을 운반하면서 고달픈 생계를 이어 가던 조선 시대 서울의 얼음 업자들이 듣는다면, 후손들을 자랑스러워할 만한 숫자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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