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서재' 집옥재에서 한 줄의 문장을 쓰다…'오후의 필사' 체험

시민기자 김인수

발행일 2026.04.15. 14:42

수정일 2026.04.15. 16:53

조회 109

독서 관련 활동을 찾던 중 정독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오후의 필사’ 프로그램을 발견해 체험해봤다. 프로그램이 열린 4월 10일, 참여자들은 경복궁 북쪽 끝에 자리한 집옥재(集玉齋)에 가기 위해 경복궁으로 입장했다. 향원정 연못을 지나 북쪽으로 걷다 보면 집옥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시간이 달라졌다. 아직 날이 차지만 창문을 열고 130여 년 전 고종이 앉아 책을 읽었을 그 자리에서, 필자는 엽서 한 장을 앞에 두고 펜을 집어 들었다.

왕의 서재에서 독서를 - 집옥재는 어떤 곳인가

집옥재는 '옥처럼 귀한 보배, 즉 서책을 모은다'는 뜻을 가진 전각이다. 원래 1881년 창덕궁 함녕전의 북별당으로 지어졌으나,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1891년 함께 옮겨 지었다. 왼쪽으로는 전통 건물인 협길당을 두고, 오른쪽으로는 2층 팔각 누각인 팔우정을 달아 신구양식이 어울린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집옥재는 책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며 개화 정책을 구상하기 위해 건립된 왕실 도서관이었다. 당시 4만여 권에 달했던 도서 대부분은 서구 근대 문물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은 책을 읽으러 온 시민들이 채우고 있다.

정독도서관과의 협업 - '오후의 필사' 프로그램

정독도서관은 경복궁관리소와 상생 발전을 위한 협력 사업으로 '오후의 필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문학 작품 이해 및 문장력 향상을 위한 문학·비문학 필사 체험 프로그램으로, 4월부터 10월까지 총 5회에 걸쳐 운영된다. 에버러닝 누리집을 통해 선착순 사전 접수하며, 참가비는 무료다. 올해 일정은 4월 10일, 4월 17일, 4월 24일, 10월 16일, 10월 23일이며, 매회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집옥재·팔우정 내부에서 진행된다.

'필사'를 다시 배우다 - 복사가 아닌 이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 필자는 필사를 단순히 글을 베껴 쓰는 행위로 알고 있었다. 좋은 문장을 손으로 옮겨 적으면 문체가 몸에 밴다는, 그런 의미 정도로. 그런데 집옥재의 강의는 그 생각을 정정했다. 필사는 복사가 아니다. 텍스트를 눈으로 읽고,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내는 행위다. 문장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을 소화한 뒤 자기 목소리로 되 뱉는 것. 그래서 같은 구절을 필사해도 사람마다 다른 문장이 나온다. 독서와 글쓰기 사이 어딘가에 있는 행위가 필사였다.

그 차이를 알고 나자, 나눠 받은 엽서를 대하는 일이 달라졌다. 글자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읽고, 잠시 멈추고, 내가 받아들인 의미를 손 글씨로 꺼내야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이 남았다.

이날 필사의 텍스트는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가져온 구절이었다. 1998년 출간된 이 작품은 스물다섯의 안진진이 모순투성이인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의 인생 책으로 꼽히는 스테디셀러다. 엽서에 담긴 구절은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담긴 문장이었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구절을 먼저 읽고 집옥재 안 서재의 시간을 보았다. 고종이 세계를 읽으려 했던 공간에서, 양귀자 작가가 삶을 정의한 문장을 내 방식으로 다시 적었다. 단순히 글자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인생을 손끝으로 꺼내는 일이니까. 생각보다 천천히, 다 쓰고 나서 엽서를 한참 들여다봤다. 제출하고 나서야 손이 가벼워졌다.

궁궐을 걷다 - 한복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집옥재를 나와 경복궁을 걸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이 그날은 달리 보였다. 집옥재에서 한 시간 넘게 보내고 난 뒤였기 때문인지, 한복 차림으로 궁궐 마당을 걷는 사람들이 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속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화유산을 보는 것과 그 유산 안에 잠깐이라도 앉아 있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집옥재에서 필사의 의미를 다시 배운 것처럼, 경복궁을 걷는 방식도 그날은 조금 달랐다.
청나라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집옥재. 130여 년 전 고종의 서재였다. ©김인수
청나라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집옥재. 130여 년 전 고종의 서재였다. ©김인수
경복궁 내 고종의 서가인 '집옥재'에서 진행하는 필사 체험 ‘오후의 필사’가 시작했다. ©김인수
경복궁 내 고종의 서가인 '집옥재'에서 진행하는 필사 체험 ‘오후의 필사’가 시작했다. ©김인수
1998년 출간된 소설 <모순>의 한 구절이 오늘의 필사 텍스트로 낙점됐다. ©김인수
1998년 출간된 소설 <모순>의 한 구절이 오늘의 필사 텍스트로 낙점됐다. ©김인수
‘오후의 필사’를 체험하는 필자. "필사는 베끼는 게 아닙니다"를 배웠다. ©김인수
‘오후의 필사’를 체험하는 필자. "필사는 베끼는 게 아닙니다"를 배웠다. ©김인수
집옥재 오른편의 팔우정에서 오후의 필사에 참여 중이다. ©김인수
집옥재 오른편의 팔우정에서 오후의 필사에 참여 중이다. ©김인수
팔우정에서 필사 체험 중인 참가자. 엽서와 노트에 글이 가득하다. ©김인수
팔우정에서 필사 체험 중인 참가자. 엽서와 노트에 글이 가득하다. ©김인수
글을 읽고 이해한 뒤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내고 있는 필사 체험인들 ©김인수
글을 읽고 이해한 뒤 자신의 언어로 다시 써내고 있는 필사 체험인들 ©김인수
문화유산 안에 잠깐 앉아서 하는 필사는 느낌과 시선을 달리 하는 일이다. ©김인수
문화유산 안에 잠깐 앉아서 하는 필사는 느낌과 시선을 달리 하는 일이다. ©김인수
읽고, 멈추고, 손을 움직인다. 글자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의미를 꺼내는 일 ©김인수
읽고, 멈추고, 손을 움직인다. 글자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의미를 꺼내는 일 ©김인수
팔각형 누각 '팔우정' 안에서 필사하는 모습 ©김인수
팔각형 누각 '팔우정' 안에서 필사하는 모습 ©김인수
1,700여 권의 책이 왕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집옥재 내부 ©김인수
1,700여 권의 책이 왕의 서재를 채우고 있는 집옥재 내부 ©김인수
엽서에 한 글자씩 손으로 받아 쓴 글은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다. ©김인수
엽서에 한 글자씩 손으로 받아 쓴 글은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다. ©김인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다시 문지방을 넘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문이었지만, 나가는 발걸음은 조금 달랐다. ©김인수
프로그램을 마치고 다시 문지방을 넘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문이었지만, 나가는 발걸음은 조금 달랐다. ©김인수

'오후의 필사' 프로그램

○ 장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집옥재·팔우정 내부
○ 일정 : 4월~10월 총 5회(4월 10일, 4월 17일, 4월 24일, 10월 16일, 10월 23일)
○ 시간 : 매회 14:00~16:00
○ 신청 : 에버러닝 누리집, 선착순 사전 접수
○ 참가비 : 무료

시민기자 김인수

그 순간, 그 현장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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