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 나무 조각에 고대 서울의 흔적이? 흥미로운 백제 이야기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5.10.15. 15:58

수정일 2025.10.15. 18:12

조회 6,095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서울 송파구 지역에는 백제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석촌동 고분군 유적.
서울 송파구 지역에는 백제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다. 석촌동 고분군 유적.
  41화   나이테가 알려주는 고대 서울의 역사

백제의 임금들 중에서도 초고왕은 여러 수수께끼를 많이 품고 있는 인물이다. 삼국 시대 역사의 기준이 되는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백제의 다섯 번째 임금이고, 서기 166년에 임금이 되어 48년간 임금 자리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백제 역사에서 그 초기 시대의 중심지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지역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초고왕은 백제의 유적이 여럿 남아 있는 지금의 송파구 풍납동에서 방이동 지역에 있는 궁궐에서 긴 세월 머무르면서 백제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초고왕은 그 칭호부터가 특이한 데가 있다. 백제의 첫 임금인 온조왕 이후, 백제 임금의 계보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으로 이어진다. 세 번 연속으로 항상 임금의 이름 두 번째 글자에 ‘루’가 나온다. 한자도 ‘婁’로 동일하다. 그런데 문득 다섯 번째 임금인 초고왕 때부터 이런 규칙이 깨어졌다. 임금 이름을 짓는 풍습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백제의 모든 임금들을 다 살펴보면 그 칭호가 ‘가까울 근(近)’으로 시작하는 임금이 두 명이 있다. 바로 근초고왕과 그다음 임금인 근구수왕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초고왕의 바로 다음 임금은 구수왕이다. 그렇다면 초고왕과 구수왕이라는 이름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근(近)’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어떤 뜻을 드러내는 풍습이 있었던 것일까?

결정적으로 《삼국사기》에는 서기 234년에 임금이 된 고이왕이 초고왕의 친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형과 동생이 무려 68년의 세월을 두고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더 심각한 문제는 동생인 고이왕이 약 52년간 백제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그 말은 형인 초고왕이 한 살에 임금이 되었고 동생인 고이왕이 쌍둥이 동생으로 동시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고이왕은 60대 후반에 임금이 되어 120세 무렵까지 백제를 다스렸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일이 절대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형이 극히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고 동생은 극히 장수했다는 두 가지 우연이 겹치기란 어려워 보인다.

초고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있었던 사건도 이상한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보이는 기록은 초고왕 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잦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다. 사건의 발단은 서기 165년에 신라의 길선이라는 인물이 신라 임금에 대해 반란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망명한 사건이다. 신라는 길선은 신라의 큰 범죄자이니 되돌려 달라고 백제에 편지를 보내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런데 길선이 귀한 정보나 보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백제 사람들이 보기에 길선이 반란을 일으킬 만한 사정이 있어 보여서 동정심을 샀기 때문인지, 백제는 길선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자 신라는 군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 후 초고왕 시대가 되자 두 나라 사이에는 공격, 보복, 보복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계속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울 송파구 지역의 백제 유적들. 서울백제어린이박물관 전시.
서울 송파구 지역의 백제 유적들. 서울백제어린이박물관 전시.
초기 백제 유적인 풍납동의 풍납토성이 1925년 홍수로 무너졌을 때 이곳에서 쇠뇌 부품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쇠뇌란 석궁이라고도 부르는 자동으로 화살을 발사하는 기계를 말한다. 자동 화살 발사 장치 같은 도구를 개발해서 사용했던 흔적이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백제가 제법 큰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초고왕 시대에 과연 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국경을 맞대고 서로 맞서 싸울 정도로 영토를 넓혀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학자들이 있다.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인다면 아마도 그 가운데인 지금의 충청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는 경주를 근거로 두고 있는 신라가 본격적으로 충청 지역에 요새를 건설해 두고 인근을 지배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어야 말이 된다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경주에서 가까운 편인 경상북도 의성이나 김천에 있던 조문국, 감문국 같은 작은 나라를 신라가 차지한 시점조차 길선의 반란인 165년보다 한참 후다. 그렇게 생각하면 초고왕 시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백제와 신라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다투었다는 기록은 아무래도 이상해 보인다.

그렇다 보니 일부에서는 초고왕에서 고이왕 시대 동안 백제의 궁중에서 임금의 계보나 족보가 뒤바뀌고 역사 기록에 혼란이 생기는 어떤 혼란스러운 세력 변동이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치 다툼 과정에서 크게 판이 뒤집어져서 누구는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 아예 이름을 빼버렸다든가 반대로 누가 진정한 누구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계보를 갖다 붙이면서 다툼이 벌어져 기록이 헷갈리게 변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예 그냥 기록에 착오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예전부터 나왔다.

이런 생각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전설을 그대로 써 놓은 부분이 많고 내용에 오류도 많아서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다는 의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의심은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한국의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책이기에 이 책의 내용을 어디까지 얼마나 믿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고대의 역사를 보는 시선을 뒤바꿀 수 있는 문제다.
2018년 서울 풍납동 토성 발굴조사에서 서쪽 외벽이 확인됐다.
2018년 서울 풍납동 토성 발굴조사에서 서쪽 외벽이 확인됐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송지애 선생 등이 인상적인 연구 결과 하나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학자들은 풍납동의 고대 유적의 집터에서 나온 불탄 나무 조각을 살펴보았다. 나무나 동물 가죽 같은 물체는 탄소 연대 측정이라고 해서 아주 미세한 방사능 물질이 얼마나 있는지 따져 보는 방법으로 그 물체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방법은 고고학 연구에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이런 실험은 물체의 종류, 상태에 따라 오차가 상당히 클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땅에서 파낸 나무 장식품이 백 년 전의 물건인지, 천 년 전의 물건인지 정도는 비교적 수월하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세밀하게 연대를 알아 내기는 어려울 때도 흔하다.

그래서 송지애 선생의 연구팀은 나무로 된 물체에 나이테 무늬가 남아 있다는 생물학 지식을 같이 활용하는 더 정교한 측정 기법을 적용했다. 그러니까 연대 측정 실험을 나무로 된 물체의 한 부분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군데, 세 군데에서 동시에 측정해 보고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이다. 만약 그 두 군데 사이에 나이테 무늬가 10개가 끼어 있다면 두 군데의 연대 측정 결과는 정확히 10년 차이가 나야 한다. 나무가 자라나면서 열 개의 나이테가 생기기 위해서는 10년의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 조각 유적의 나이테 무늬를 활용해 연대 측정 실험의 오차를 따져 볼 수 있다.
나무 조각 유적의 나이테 무늬를 활용해 연대 측정 실험의 오차를 따져 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연대 측정 실험을 해보면 그렇게 정확하게 10년 차이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느 정도의 오차는 날 것이다. 그렇다면 10년이라는 우리가 아는 숫자와 측정된 실험 결과를 비교해 연대 측정 실험의 오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오차에 대해 따져 보면서 계산을 거듭하면 훨씬 더 정확하게 연대를 알아낼 수 있게 되는데 이 방법을 위글 매치(wiggle match)라고 부른다.

송지애 선생은 총 여섯 군데의 측정 결과를 같이 분석해서 불탄 나무 조각이 95.4% 신뢰도에서 서기 190년에서 280년 사이에 자라난 나무 조각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것은 적어도 풍납토성이라는 지역에 그 무렵의 시대에 번듯한 집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말은 초고왕의 시대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풍납토성이 어느 정도 사람이 모여 사는 곳으로 발전한 장소였다는 뜻으로도 해석해 볼만 하다.

그렇다면 초고왕 시대의 백제가 단지 송파구 풍납동에 사람 사는 도시를 건설했던 것 뿐만 아니라 신라와 전투를 벌일 정도로 넓은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국력을 갖고 있었을까? 아니면 초고왕이 신라와 가까운 충청도 지역을 다스리던 어떤 다른 지배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세력을 키웠을까?
풍납동 토성 산책로의 야간 전경
풍납동 토성 산책로의 야간 전경
그것은 다시 더 연구해 볼 만한 고민거리다.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발표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 동쪽 성벽을 연구해 보니 이 성벽의 건설이 시작된 것은 3세기 중후반 그러니까 250년 이후 무렵이라고 밝히고 있다. 완성된 것은 그보다도 세월이 흐른 후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이라는 커다란 요새가 건설될 정도의 강한 국력을 백제가 갖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는 시점도 그 무렵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초고왕은 그보다는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이래서야 초고왕 시대에 백제의 국력이 충분히 강력했다는 주장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 반대를 지지하는 증거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지난 20년 동안 풍납토성의 건설과 발전, 백제의 초기 역사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더욱 발전해 나가는 과학과 함께 이러한 논쟁이 언제인가는 좀 더 명확한 결실을 얻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런 날이 온다면 1800년 전 서울 송파구에 살던 백제 사람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 지에 대해서 드디어 환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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