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두 번 생명을 준 어머니의 사연은? 기적의 이식 수술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5.08.27. 16:55

수정일 2025.08.28. 18:56

조회 1,342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이식 수술은 여전히 첨단 의료 기술의 대표로 손꼽힌다.
이식 수술은 여전히 첨단 의료 기술의 대표로 손꼽힌다.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38) 이식 수술

이식 수술은 여전히 첨단 의료 기술의 대표로 손꼽힌다. 그러면 이식 수술을 최초로 개발하고 성공한 사람은 누구일까? 동물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이식 수술을 시도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하지만 식물에 대한 이식까지 범위를 넓혀 본다면 의외로 몸의 일부를 이식하는 것은 뿌리가 깊은 기술이다. 식물은 내부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비슷한 몇 가지의 세포로 이루어진 특징이 있기에, 서로 다른 식물이라도 서로 연결해 놓으면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현상이 좀 더 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식물의 몸 일부를 다른 식물이 빌려서 사용하기 위해 붙이는 방법을 흔히 ‘접붙인다’고 부른다. 보통 어떤 나무가 열매를 잘 맺고 열매 맛이 좋은데 뿌리가 부실해서 잘 자라나지를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열매 맛이 좋은 나무를 잘라 뿌리가 튼튼한 다른 나무에 붙여 두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심장이 약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 받아서 더 튼튼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열매가 잘 열리는 나무는 다른 나무의 뿌리를 얻어서 더 튼튼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나무를 접붙이는 일을 한자어로 ‘접목(椄木)’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나무를 길러 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일상 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이다. ‘첨단기술과 전통문화를 접목해서 더 재미난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식의 말은 누구든 한번 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맛있는 열매와 튼튼한 뿌리를 하나로…접목의 역사

고려 시대의 작가인 이규보는 <접과기>라는 글에서 어린시절 추억을 떠올리면서 동네에 과일나무 접붙이기를 잘하는 ‘전(田)씨’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써 두었던 적도 있다. 그러니 최소한 고려 시대 즈음에는 한국에 접붙이기 기술이 많이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조선 시대가 되면 한국의 접목 기술은 이미 상식적인 기술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1412년 음력 2월 18일 기록을 보면 상림원(上林園)의 나무에다가 접붙이기를 할 좋은 배나무 가지를 구하기 위해 조정에서 강원도에 신하를 보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때 상림원은 경복궁 내의 정원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 정원을 관리하는 부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서울 경복궁 어귀에서 자라나는 그 많은 나무들 중에 한 두 그루 쯤은 멀리 강원도에서 구해 온 가지를 이식 수술 받은 나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접붙이기 기술이 훌륭하게 성공해 조선 시대에 이미 좋은 성과를 거둔 사례도 있다. 경상북도 상주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2010년 국립산림과학원의 DNA 분석 결과 이 감나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유전자가 현격히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 나무는 530년 정도 된 것이었는데 결국은 열매가 잘 열리는 감나무와 튼튼한 고욤나무 뿌리를 접붙여 만든 나무로 판명 되었다. 이것은 조선 시대 접붙이기 기술이 이미 530년 전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이 나무는 현재까지 국내에 증거가 있는 가장 오래된 접붙이기 사례이기에 “하늘 아래 첫 감나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수 천 개의 감이 열리며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내 머리 위로, 신라 시대 유행한 ‘가발 문화’

식물 말고 사람은 어떨까? 사람에 대한 이식 수술이 시도되어 성공을 거둔 사례는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찾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식 수술이 아니기는 해도 범위를 넓혀 남의 몸 일부를 내 몸처럼 활용하는 일 중에 간편하게 해 볼 수 있는 일은 한국에서 크게 유행이 된 시대가 있었다. 바로 남의 머리카락을 내 머리 위에 얹어 사용하는 ‘가발 문화’가 신라 시대 때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신당서'에 따르면 신라 여성들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사서 자기 머리에 두르고 구슬과 비단으로 장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머리카락을 남에게 주는 문화가 신라에서는 크게 활성화 되어 있어서 남성들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대신 아예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그 머리카락을 누구에게 주거나 팔아 버렸다고 한다.

과학의 범위가 아니라 전설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신라의 전설 중에 정말 남의 신체 일부를 이식 받기를 꿈꾸는 내용으로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희명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어린 아들이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간절히 기도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관세음보살 그림 중에는 천수관음 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고 해서 관세음보살이 천 개의 손을 갖고 있고 천 개의 눈을 갖고 있다고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들이 있다. 그런데 희명이 기도할 때 본 그림도 바로 그런 그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따르면 희명은 천 개의 눈 중에 하나만 주셔서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대신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희명의 아이는 다시 눈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수술에서 신장을 아들에게 기증한 어머니 (출처 : 대한뉴스 제 720호 영상)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수술에서 신장을 아들에게 기증한 어머니 (출처 : 대한뉴스 제 720호 영상)

1969년, 한국 최초의 신장 이식 수술

전설 말고 현실에서 처음 한국인이 장기 이식 수술을 성공시킨 것은 보통 1969년 지금의 가톨릭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 명동의 병원에서 시도된 신장 이식 수술을 최초로 꼽는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는 특이하게도 한국에서 사는 인물이 아닌 미국에 살던 교포였다. 그런데 신부전증으로 신장이 너무 나빠져서 당시 기술로는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세계 최초로 장기 이식 수술이 성공을 거둔 사례는 1954년 미국의 신장 이식 사례가 자주 언급된다. 그런데 이 수술은 일란성 쌍둥이들 간에 정확히 유전자가 일치하는 같은 장기를 이식한 사례였다. 그러니 미국에서도 1960년대가 되어서야 쌍둥이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신장 이식수술이 겨우 자리 잡고 있는 형편이었다. 1969년 시점에서 미국의 소수 인종에 속하는 한국 출신 환자가 신장을 기증 받아 수술 성공에 이르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환자의 가족은 고향인 한국에서 환자가 살아날 수 있는 이식 수술의 기회를 알아 보았다고 한다. 공항을 통해 환자가 한국에 도착할 때 이미 호흡곤란 상태에 빠져 있는 등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수술에 도전한 이용각 교수 등은 그 동안 열심히 준비해 놓은 모든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이식 수술에 도전했고 놀랍게도 수술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세계의 주요 선진국 의사들을 놀라게 할 만한 소식으로 평가되어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 했는데 마침 환자에게 신장 한 쪽을 떼어 준 기증자가 환자의 노쇠한 어머니였다. 지금도 제 720호 대한뉴스에 이 소식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그 영상 마지막을 보면 “아들에게 두 번의 생명을 준 어머니에게 우리는 머리를 숙입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과학 기술의 힘으로 매일 기적을 만들다

이후 한국의 이식 수술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식 수술은 장기를 구해 와서 신선한 상태로 이식할 위치에 잘 갖다 놓는 작업도 어렵거니와 그렇게 갖다 놓은 장기가 새 몸에 잘 연결될 수 있도록 혈관 등의 작은 연결 부위를 미세하게 꿰매어 붙이는 작업도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이식 수술은 의료진들에게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갖추어져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기술이다. 

또 이식 수술에서는 그렇게 연결해 놓은 새로운 장기가 몸 속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바람에 몸이 아파오는 것이 항상 난관이 되곤 하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면역 반응을 줄일 수 있는 약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면역 반응을 너무 없애 버리면 면역이 부족한 환자가 온갖 잡다한 세균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하게 되므로 적절한 수준과 방식으로 약을 쓸 수 있는 전문가도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

그 모든 기술이 지난 56년 동안 쌓인 결과 현재 한국의 이식 수술은 세계에서도 선두에 가까운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간의 일부를 이식하는 생체 간 이식 수술의 경우 수술 성공 비율을 거의 100%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간 이식의 수술 기술 수준을 세계 정상급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의 한 병원은 2023년에 각막 이식 수술의 역대 시행 건수가 5,500건을 돌파했다는 자료를 발표한 적도 있었다. 눈에 생긴 병이나 상처 때문에 눈의 겉면 부분인 각막이 망가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다른 각막을 옮겨 와서 눈을 잘 보이게 만드는 수술이 바로 각막 이식 수술이다. 그러니 정말로 전설의 내용처럼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일부를 빌어서 앞을 보게 되는 일이 각막수술 덕분에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전국의 모든 병원을 합하면 한국에서는 매년 500건에서 1,000건에 가까운 각막 이식 수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라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나야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일이 현대에는 과학 기술의 힘으로 매일 같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만드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장기 기증자들의 이름으로 꾸며진 생명나눔나무
장기 기증자들의 이름으로 꾸며진 생명나눔나무
최근에는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기술도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미 서울대학교 박정규 교수 같은 학자는 2010년대 중반에 돼지의 췌도를 당뇨병이 걸린 다른 동물에게 이식하는 방법으로 당뇨병 치료에 도전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식으로 과학 기술이 꾸준히 발전해 나간다면 미래에는 더 많은 환자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기회를 더 가까이에서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이상으로 더 발전시켜야 할 분야가 있다면 이식 수술에 관한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과거와 비교해 보자면 비할 바 없이 한국의 장기 이식 문화도 향상되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보자면 한국에서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 주는 비율이 높지는 않은 편이다. 장기 기증 관련 단체와 기관에서 발표하는 이야기를 살펴 보면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금은 기증자에 대해 갖추어 주는 예의라든가 기증하는 쪽을 위한 배려도 여러 가지 면에서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이런 방향에서도 서울이 세계에서 앞서 나가는 도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