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 도로와 아스팔트 도로가 닮은 꼴? 길바닥에 숨은 과학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09.27. 13:40

수정일 2024.09.27. 15:20

조회 1,502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7) 모든 도로들의 어머니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모형. 백제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소서노와 비류, 온조.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모형. 백제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소서노와 비류, 온조.

삼국시대, 백제인들의 한강 신도시 개발

삼국시대 초기에 관한 기록은 워낙 오랜 옛일이기도 하거니와 전설과 역사가 섞여 있는 것이 많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가 세상을 떠난 시기는 기원전 6년이었다고 되어 있다. 소서노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부인이고 또한 한반도 남쪽으로 아들 온조와 함께 건너온 후에는 그 아들이 백제를 세웠다. 그러니 아마도 옛사람들은 소서노는 나라를 둘이나 세운 영웅호걸이라고 존경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온조는 큰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온조가 백제의 임금이었기는 했지만, 백제는 아직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국가였다. 영웅이었던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부하나 동맹 중 몇몇이 온조왕을 배신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실제로 이 해의 일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온조왕은 이 일을 “국모께서 돌아가셨다”며 나라의 큰 위기라고 스스로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백제인들이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생각해 낸 정책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신도시 개발이었다. 백제인들은 한강 남쪽의 농사 짓기 좋은 땅에 새로 도시를 하나 건설하고 그곳으로 임금과 그 부하들이 사는 곳을 옮기고 그 지역을 새로운 교통의 중심지이자 방어하기 좋은 요새로 바꾸어 나라를 더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렇게 해서 건설된 곳이 현재 서울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부근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 풍납동, 방이동 인근이 역사에 기록된 서울 최초의 개발 사업이 진행된 곳이다.
서울 풍납토성 전경
서울 풍납토성 전경

백제 시대 포장 도로의 흔적, 현대 도로와 닮았다

그 후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많은 부분이 망가졌다. 그렇기에 백제 시대에 이곳이 어떤 도시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한 흔적은 많지 않다. 그래도 현대 학자들이 꾸준히 조사해 본 결과,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난 이야기를 해 보자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역에서 도로가 건설된 흔적이 꽤 많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단순히 그냥 사람이 많이 다녀서 길이 생긴 모양이 있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널찍한 포장도로의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일부러 백제 사람들이 교통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도로를 설계하고 공사해서 만드는 작업을 했다는 증거다.

삼국시대 도로 흔적은 신라 땅에서 발견되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백제의 도로는 서울과 충청 지역 유적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는 등 색다른 연구 가치가 있어 더욱 눈길을 끌 만하다. 2006년 풍납토성에서 백제 도로 유적을 찾아냈을 때 여러 언론에서는 이것이 아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일 가능성이 있다며 기사를 낼 정도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한국의 모든 길은 서울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백제를 건설한 사람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 서울 지역으로 찾아온 사람들인 만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는 교통을 중시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9년에 노략질을 하는 무리들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 실력이 뛰어난 백 명의 기병대를 보내서 몰아냈다는 기록이 있는 등, 말 탄 병사들을 잘 활용한 기록도 여러 차례 보인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말과 마차가 빠르게 잘 달릴 수 있도록, 좋은 길, 평평하고 널찍하며 물이 잘 빠지고 움푹 패이는 일 없이 유지되는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백제 도로 유적의 구조를 보면 신기하게도 현대의 도로와 닮은 점이 많다. 현대 도시의 포장도로는 대개 자갈을 깔아 놓은 뒤 눌러서 평평한 도로 모양을 만든 뒤, 맨 윗부분을 아스팔트를 섞은 자갈로 덮는 형태다. 백제의 도로도 작은 돌들을 쌓아 도로의 기본 모양을 만든 뒤, 맨 위에는 모래나 가는 자갈을 섞어 덮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재미난 것이 아스팔트가 없었던 백제에서는 항아리 따위를 깨서 잘게 부수어 놓은 것을 도로 위에 같이 뿌려 놓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요즘 사람들은 말을 타고 다니지 않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런 재료를 사용한 것인지 이런저런 추측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에서 백제, 신라의 도로 유구 등 흔적이 발견되었다.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에서 백제, 신라의 도로 유구 등 흔적이 발견되었다.

현대 도로 만드는 공법, 전 세계가 사용하게 되기까지

사실 현대의 전 세계 도로가 우연히도 백제 도로와 비슷한 구조가 된 까닭도 살펴보면 꽤 이야깃거리가 있다. 백제인의 공사 기법이 세계에 널리 퍼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로부터 천 수백년이 지난 후 19세기 스코틀랜드 출신의 맥애덤이라는 인물이 개발해 퍼뜨린 우연히도 비슷한 공법이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존 맥애덤(John L. McAdam)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현상금 사냥꾼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시대 상황으로 추측해 보자면, 맥애덤이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였다기보다는 배를 타고 다니며 영국 정부에서 공격하라는 다른 배를 공격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던 듯싶다.

미국에서 현상금 사냥꾼으로 한 몫 잡은 맥애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했다.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보니 도로를 잘 내는 것이 부동산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도로 공사에 뛰어들었는데,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도 잘게 자갈을 깐 뒤에 그 위를 무거운 물체로 꾹 눌러서 다져 주면 가장 값싸게 좋은 도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금 한국에서도 도로 공사를 할 때 무거운 쇳덩어리를 굴려 가며 길을 눌러주며 다져주는 중장비를 현장에서는 속어로 종종 ‘마카담 롤러’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마카담’이라는 말이 바로 맥애덤이라는 발음이 변형된 것이다.
도로 공사에서 상용되는 장비와 아스팔트.
도로 공사에서 상용되는 장비와 아스팔트.
도로 맨 위를 아스팔트로 덮게 된 이유 역시 알아보면 재미있다. 역시 19세기 스코틀랜드 출신의 인물인 존 던롭(John Boyd Dunlop)은 본래 수의사였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자전거를 타는데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아들의 자전거를 개조해 주는 일에 관심을 붙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에는 고무 타이어라는 것이 거의 쓰이지 않고 있었는데, 던롭은 아들 자전거 바퀴를 고무 타이어로 두르면 자전거를 타기가 훨씬 편하고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고무 타이어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널리 퍼지면서 온갖 차량이 모두 고무 타이어를 달고 달리게 되었다.

좋은 도로는 그 위를 달리는 바퀴와 마찰력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만약 바퀴가 도로에 닿았을 때 도로가 너무 미끄러우면 바퀴는 헛돌 것이고 안전하게 차가 앞으로 나갈 수도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도로가 바퀴에게 너무 끈끈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꺼끌꺼끌하면 바퀴가 움직이는데 쓸데 없이 너무 많은 힘이 들게 된다. 즉 빠르게 달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고무 타이어가 닿았을 때 마찰이 너무 심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가격도 적절한 재료가 바로 아스팔트였다. 만약 고무 타이어가 아닌 다른 특이한 재질의 바퀴가 세상에 널리 퍼졌다면, 어쩌면 백제인들이 사용했던 항아리 깨부순 조각 같은 재료가 더 잘 들어맞는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에 건설되어 있는 수많은 도로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이유가 백 수십년 전, 현상금 사냥꾼과 수의사 덕택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길바닥에도 여러 가지 과학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도전했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스며 있는 것 같아 보여 재미있다.

이것 말고도, 길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물빠짐에 신경을 썼다든가 하는 점 등등 역시 백제의 도로와 현대의 도로에 보이는 공통점도 있다. 요즘 도로를 만들 때는 도로 중앙 쪽을 약간 높게 만들고 양쪽 가장자리를 약간 낮게 만든 뒤에 도로 옆으로 빗물 흘러가는 하수도를 만드는 방식을 쓴다. 중력에 의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며 빠지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처럼 백제 도로에서도 가장자리에 물이 빠져 흐르는 도랑을 파 놓은 형태가 흔히 보인다.

비록 백제의 도로 기술이 그대로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건설업체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도로 건설을 곧잘 해내고 있다. 한국 건설업체들이 해외에 나가 공사를 맡은 거의 최초의 사례로 손꼽히는 일도 마침 19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
경부고속도로 공사현장
60년 전, 파타니-나라티왓 도로 건설 사업은 낯선 해외에서 처음 작업을 맡아 하느라 어려움이 많았고, 그곳 날씨가 비가 많고 습해서 공사에 쓰는 재료들이 너무 습기를 많이 머금어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불판을 만들어서 공사에 쓰는 자갈을 불로 말려 가며 작업을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 보니 결국 야심차게 나섰던 공사는 돈을 벌기보다는 적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사업 자체는 적자였지만 이때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 그 기술과 경험으로 한국에서 고속도로 사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기술 개발의 역사에서는 이렇게 한 사업 자체에서는 손해를 보았지만 그 과정에서 인력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업에서는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꽤 많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고속도로가 바로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들이었던 서울-인천을 연결하는 경인고속도로,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파타니, 나라티왓이라는 머나먼 태국, 열대 지방의 도시가 한국 산업 발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현상금 사냥꾼, 수의사 덕택에 도로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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