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없어도 시원하다! 조상들이 즐겨찾던 피서지는 어디?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7.17. 16:30

수정일 2024.07.17. 23:41

조회 3,276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수성동 계곡은 더위를 피해 발을 담그고 잠시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수성동 계곡은 더위를 피해 발을 담그고 잠시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5) 옛사람들의 피서법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다 뿐이지 옛사람들의 여름나기는 기본적으로는 지금과도 비슷했다. 시원한 재질의 옷감 입기, 여름 음식 먹기, 부채질하기, 명산대천 찾아가기, 등목과 족욕(足浴)을 했고, 왕실이나 고위 관리, 심지어 죄수들까지 얼음을 맛보면서 무더운 여름을 이겨 나갔다. 옛사람들의 여름나기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휴식처들

‘한 선비가 마루의 끝자락에 비스듬히 앉아서 부채를 연신 부치고 있다. 엷은 모시옷을 입고 애써 더위를 피해 가려 하지만 선비의 체면상 관을 벗을 수는 없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1740년(영조 16) 자화상처럼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의 한 장면이다. 정선은 인왕산 자락에 거주했는데, 인왕산 일대의 수성동(水聲洞) 계곡은 대표적인 여름 피서처임이 19세기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나타난다. 여름철 문이 다 열린 초당에서 서화를 곁에 두고 거문고를 타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나, 산과 계곡을 배경으로 초막을 짓고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담은 정선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에도 더위를 피하는 옛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적 별장 중 하나인 석파정(石坡亭)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적 별장 중 하나인 석파정(石坡亭)

18세기 정선이 한양의 모습을 담은 그림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피서 공간들이 나타난다. 청송당(聽松堂), 청풍계(淸風溪),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은 울창한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림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는 예외 없이 산과 물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삼청동이나 북악산, 인왕산, 남산의 계곡들이 대표적인 피서지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적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부암정(傅巖亭), 성북동 별서(別墅) 등을 찾아보면 무더위를 쉽게 피할 수 있는 공간임을 직감할 수가 있다. 삼청동의 탕춘대, 인왕산과 정릉의 계곡에도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남산과 북악산의 맑은 계곡을 찾은 사람들은 발을 씻고 목욕을 하며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혔다. 중인(中人)들은 인왕산의 필운대(弼雲臺)나 송석원(松石園), 옥계(玉溪) 근처에 모여 시사(詩社) 활동을 하며 더위를 이겨 나갔다.
창덕궁 후원 관람지와 관람정 등은 연못과 정자가 있어 왕이 휴식하기에 적합했다.
창덕궁 후원 관람지와 관람정 등은 연못과 정자가 있어 왕이 휴식하기에 적합했다.

왕실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궁궐의 후원이었다. 특히 조선후기 정궁으로 기능을 하였던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과 주합루 일대, 존덕정과 옥류천, 소요정, 관람정 등은 울창한 숲과 연못, 각종 정자가 있어서 왕이 휴식하기에 적합했다.

옥류천은 인조가 널따란 큰 바위에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에서 유래한 곳인데, 바닥 돌을 조금 깎아 계곡물이 흘러오게 하고 물이 암반을 휘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시원함을 더했다. 정원에서 휴식하는 동안 왕들이 시를 남기기도 했다. 옥류천 절벽 위에는 숙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소요정에는 숙종, 정조, 순조의 시가 남아 있다. 조선의 왕들은 여름날 후원 일대를 찾아 더위도 식히면서 선왕들의 자취도 기억했을 것이다.

『한경지략』에 기록된 서울의 피서처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名勝)’에는 대표적인 여름 피서처가 기록되어 있다. 인왕산 자락의 수성동(水聲洞) 계곡은 정선(鄭敾)의 그림에도 나오는데,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이란 뜻이다. 원래 이곳은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의 별장인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던 곳이다.

『한경지략』에서는, 수성동에 대하여 “인왕선 기슭에 있다. 골짜기가 깊고 그윽해서 물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제일 좋다. 혹은 이 동리는 옛날 비해당 안평대군이 살던 터라 한다. 개울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麒麟橋)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성동 계곡은 이곳에 있던 아파트를 철거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2010년 기린교가 발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는 서울시 기념물 제31호로 정선의 그림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는 서울시 기념물 제31호로 정선의 그림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돈의문 밖 서지(西池) 가에 있었던 천연정(天然亭)도 대표적인 피서지였다. “이 정자는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별장이던 것인데, 지금은 경기감영의 중영(中營)이 되었다. 연꽃이 무성해서 여름철이면 성안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것이 여기가 제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산 밑의 천우각(泉雨閣)도 여름철의 명소였다. “남별영에 소속된 관청이다. 개울을 걸쳐서 집을 지어 여름철 피서하기에 좋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세검정(洗劍亭)’에 대해서는 “창의문 밖 탕춘대 옆에 있다. 바위 위에 정자가 있어서 폭포가 앞에 있다. 매년 장마철 물 부를 때 성안 사람들이 나사서 구경한다.”고 기록하여, 세검정 일대는 여름 장마철에 찾는 명소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여름 장마철인 1792년에 이곳을 찾았고, 그 감흥을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세검정에서 노닌 기록)로 남겼다.
조상들이 여름에 즐겨찾는 명소였던 세검정
조상들이 여름에 즐겨찾는 명소였던 세검정

“신해년(1792) 어느 여름날 나와 한치응(韓致應:1760~1824) 등 여러 사람이 명례방(오늘의 명동)에서 자그마한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이 돌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까맣게 변하더니 천둥과 번개가 우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 ‘폭우가 쏟아질 징조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거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주로 술 열 병을 주지’라고 했다. … 말을 달려 세검정 아래 이르니 수문 좌우 계곡에서는 암고래, 수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고 옷소매 역시 빗방울로 얼룩덜룩해졌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으니, 난간 앞의 나무들은 이미 미친 듯 나부끼고 뿌려대는 빗방울로 한기가 뼈에 스몄다. … 잠시 있으니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혀 산골 계곡도 잔잔해졌다. 저녁해가 나무 사이에 걸려, 울긋불긋 온갖 광경을 연출했다. 우리들은 서로 누워서 시도 읊조리고 농담도 나누었다.”

한여름 폭우가 내리는 날 세검정에서 벗들과 술잔을 주고받는 정약용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정약용은 1824년 여름에 '소서팔사'(消暑八事)라 하여 '더위를 씻어버리는 8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다산시문집'에 전하는 8가지 더위를 피하는 법은 소나무 단에서 활쏘기,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네 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 던지기, 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한시 짓기, 달 밝은 밤 발 씻기 등 여덟 가지였다. 

얼음과 부채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부터 얼음을 이용해왔음은 문헌 기록에도 나타난다. 『삼국유사』에는 28년(신라 유리왕 5)에 장빙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505년(신라 지증왕 6) 11월에 처음으로 소사(所司)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케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주도하여 얼음을 저장하였다. 겨울에 얼음을 저장한 다음, 입하절(立夏) 무렵 얼음을 꺼내 왕실이나 관청, 또는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다 체계적으로 얼음을 채취, 저장하고 공급하였다. 『경국대전』의 예전(禮典)에는 ‘반빙(頒氷)’이라 하여, 얼음을 나누어주는 규정을 정하였다. “매년 여름철 마지막 달에 각 관청과 임금의 집안사람, 문무 당상관, 내시부 당상관, 맡은 직무는 없으나 70살 이상이 된 당상관들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준다.”고 하였는데,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내렸다는 기록이 흥미롭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서빙고에 보관하였는데,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서빙고의 얼음은 관리들이나 활인서의 병자,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월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하여 10월 상강(霜降) 때 그해의 공급을 마감하였다.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국가에서 부채를 선물할 만큼 부채는 더위를 쫓는 대표적인 물건이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공조(工曹)에서는 단오 부채를 만들어 진상한다. 왕은 그 부채를 각 궁가(宮家)와 재상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다. … 부채를 받은 사람은 부채에다가 금강산 일만 이천봉 그림을 가장 많이 그린다. 기생이나 무녀들이 갖는 부채에는 복사꽃, 연꽃, 나비, 은어, 백로 등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의 학자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쓴『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황해도 재령, 신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풀잎으로 엮어 만든 부채인 ‘팔덕선(八德扇)’에서 부채의 효용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여덟 가지 덕이란 바람 맑은 덕, 습기를 제거하는 덕, 깔고 자는 덕, 값이 산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는 덕, 햇볕을 가리는 덕, 독을 덮는 덕 등 8가지이다.

부채가 당시에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속담에도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있는데, 단오는 여름이 시작됨을 의미하고 더위에 대비하여 부채를 준비하라는 뜻을 담았다. 조선시대 풍속화에도 부채로 더위를 쫓는 모습은 자주 등장한다.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품위 있게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쫓았을 선조들의 풍류를 떠올려 보는 것도 여름을 나는 또 하나의 피서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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