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어린이날은 5월 1일...어쩌다 그날로 정해졌을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5.01. 16:40

수정일 2024.05.01. 18:38

조회 3,357

어린이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소파 방정환이다.
어린이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소파 방정환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0) 어린이날 떠올리는 인물과 공간

5월은 가장 기념일이 많은 달이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올해 15일은 부처님 오신날이자, 스승의 날이다. 5월의 셋째 월요일인 20일은 성년의 날이고, 21일 부부의 날도 있다. 필자로서는 2일 딸 생일, 6일 내 생일, 30일 결혼기념일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하루 걸러 기념일이 이어지는 형국이다.

5월의 기념일 중 가장 5월다운 기념일은 어린이날이 아닐까 한다. 밝고 활기찬 5월의 모습과 어린이의 이미지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방정환 선생에 의해 처음 어린이날이 지정된 이후, 서울 곳곳에도 어린이날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과 공간들이 있다.

소파 방정환과 어린이날 제정

어린이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이날을 제정한 방정환(方定煥:1899~1931)이다.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이며,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현재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났다.

‘야주현’은 야주고개, 야주현(夜晝峴) · 야주현(夜珠峴)이라고도 불렀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가 빛이 나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비추므로 야주현 또는 야주개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망우역사공원에 조성된 소파 방정환의 묘소
망우역사공원에 조성된 소파 방정환의 묘소

광화문역 1번 출구를 나오면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세워진 ‘소파방정환선생 나신곳’이라는 표지석을 찾을 수가 있다. 방정환은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룡의 아들인 방경수와 손성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9년 사직동의 매동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미동보통학교는 1896년 5월 한성부공립소학교 개교한 후, 1946년 4월 서울미동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 서울미동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거의 130년의 역사를 담은 학교로, 1973년에 창설된 이 학교 태권도 시범단은 국내외적으로 명성이 높다.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선린상업학교 입학 후에는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새별』 등을 탐독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익혀 나갔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가 천도교(天道敎)이다.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을 계승한 것으로,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1861~1922)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1917년 방정환은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더욱 천도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장인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방정환은 「조선독립신문」을 등사판으로 박아 배부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천도교청년회에서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는데, 방정환은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1921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도요대학(東洋大學)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에도 천도교 활동을 이어 갔다.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천도교 청년단체의 각종 강연회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방정환과 천도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은 종로구 인사동에 자리를 잡은 천도교 본부 수운회관(水雲會館) 입구에 세워진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표지석이다. 수운회관 안으로 들어가면 천도교에서 어린이 운동을 최초로 시작했다는 것, 천도교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것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방정환은 천도교 포교 이외에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존중 사업을 추진해 나갔었다. 1920년 개벽 잡지에 「어린이 노래」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어린이에 대한 존중의 뜻을 담고 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대략 10세 정도로, 10세 이상의 어린이는 소년이라 구분하였다. 방정환은 귀국 후에도 강연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는데,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가 많았다.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에 있는 방정환어록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에 있는 방정환어록

어린이날의 제정

1922년 5월 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이 선창되었고, 1923년 5월 1일 색동회 발대식과 함께 어린이날 기념식이 최초로 열렸다. 어린이 존중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방정환 등의 활동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방정환은 1923년 3월 16일 동경 하숙집에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 창립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개벽사에서 3월 20일 창간하였다. 색동회는 3월 30일 창립되었고,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어린이날’ 행사가 처음 천도교당에서 치러졌다. 기념식 후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 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었기 때문이다.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의 날짜가 변경된 것은 1928년이다. 5월 1일이 노동절이어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이를 피해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일제 강점 시기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에 행사가 금지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만든 아동잡지 ‘어린이’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만든 아동잡지 ‘어린이’

1925년 3월에는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 등지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고 대중들은 크게 호응하였다. 소년운동의 확산은 1923년 3월 20일 『어린이』 잡지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독자들은 급증하였고, 1925년 신년호는 발간 7일 만에 매진될 정도였다. 방정환은 1925년 8월의 『어린이』 31호부터 사망을 앞둔 1931년 2월의 82호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할 정도로 이 잡지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어린이날은 해방 이후인 1946년 5월 5일이 공식 제정되면서 부활하였다. 5월 첫 일요일을 5월 5일로 변경한 것은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린이날 노래 /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

모두에게 익숙한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尹石重) 작사, 윤극영(尹克榮) 작곡으로, 1948년 5월부터 어린이날이면 애창되고 있다. 1975년 어린이날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될 때까지는 방정환이 만든 색동회를 중심으로 어린이날 행사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975년은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다음해부터는 중학생이 되어 어린이날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아쉬움이 컸던 기억도 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린이날 행사는 청와대에서 진행되었다. 청와대 녹지원 등에서 행해진 어린이날 행사는 TV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프로야구에서는 1996년부터 매년 벌어지고 있는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어린이날 잠실라이벌 경기도 야구팬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어린이날과 관련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공간은 1973년 5월 5일에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이다.
어린이날과 관련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공간은 1973년 5월 5일에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이다.

어린이대공원의 개장

어린이날과 관련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공간은 1973년 5월 5일에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순종이 세자 시절인 1882년에 혼인한 순명왕후(純明王后:1872~1904)의 무덤인 유강원(裕康園)이 있었다. 태자비 신분으로 1904년에 승하하자, 이곳에 무덤을 조성한 것이다. 이후 유강원은 남양주에 있는 순종의 무덤 유릉 자리로 옮겼고, 그 터가 남게 되었다.

어린이대공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유강원에 조성되었던 석물을 볼 수가 있다.현재에도 이곳을 ‘능동’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 시기인 1930년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가 완공되었고,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이승만 지시로 ‘서울컨트리구락부 골프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박정희 집권 시기 골프장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으로 이전한 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어린이 놀이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대공원 최고의 놀이기구는 청룡열차였다.
어린이대공원 최고의 놀이기구는 청룡열차였다.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맞추어 동양 최대 규모의 종합 어린이 놀이 시설로서 개원하였다. 동물원, 식물원, 분수대, 수영장, 야외 음악당, 관망대, 식당 등을 갖추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이들의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놀이동산이었다. 

필자는 1974년 방학 때 서울의 친척댁을 찾았다가 어린이대공원에 꼭 데려가 줄 것을 청했고 직접 방문했다. 당시 지방의 초등학생 눈에 들어온 어린이대공원은 그야말로 꿈의 세계였다. 놀이동산에는 풍차놀이(대관람차), 회전컵 등의 시설이 있었는데, 최고의 놀이기구는 청룡열차였다. 청룡열차는 최초로 도입되었던 롤러코스터로, 1983년 11월까지 어린이대공원을 지켰다. 청룡열차의 빈자리는 88열차로 대체되었다. 

1975년 어린이대공원 옆 3만 평에 육영재단이 세운 어린이회관이 들어서면서, 이곳이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공간임을 입증시켰다. 필자는 농으로 건국대학교는 어린이대공원을 후원으로 삼은 학교라고 하는데, 정말 가까이 위치해 있다. 5월을 맞아 이곳을 찾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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