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기고 되찾고…수도 서울의 뼈아팠던 수난사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7.03. 15:54

수정일 2024.07.08. 19:20

조회 1,575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서울로 빠르게 북상하자 선조는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나섰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서울로 빠르게 북상하자 선조는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나섰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4) 서울이 큰 수난을 당한 날들

1394년 10월 조선의 수도가 된 지금의 서울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한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외국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된 시기를 가장 큰 수난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 5월 1일 서울이 일본군의 차지가 되었다. 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때는 3일 만인 6월 28일에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는 1년여 만에 서울이 수복되었고, 6·25 전쟁 때는 3개월 만에 서울 수복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서울이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간 날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서울을 향하여 빠르게 북상했다. 탄금대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들은 국왕 선조는 피난길을 서둘렀다. 1592년 4월 30일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이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고 기록하여, 창덕궁을 나온 선조의 피난 행렬이 매우 초라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도성의 궁중에 설치된 괸청에 불이 났다. 왕의 가마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가마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궐 관청의 창고를 크게 노략질하고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 버렸다.”고 기록하여 난민들에 의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불탄 혼란한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용산에 처음 들어온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미군 주둔의 역사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용산에 처음 들어온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미군 주둔의 역사로 이어진다.

1년 만에 이루어진 서울 수복

선조는 5월 3일 파주에서 서울의 함락 소식을 들었다. 당시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의 대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였고 용산 일대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용산에 처음 들어온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임오군란 때의 청나라군, 청일전쟁 때의 일본군에 이어 6·25 전쟁 이후 이곳에 미군이 주둔하는 역사로 이어진다. 전쟁이 발발된 지 20일 만에 서울은 함락되었고,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을 서둘렀다. 6월 13일에는 평양성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평양성을 차지한 일본군은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물자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원병도 오지 못했다. 육지에서는 의병과 승병들이 활약하면서, 육지로의 보급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제 남하하는 일본군을 추격했고, 1593년 2월의 행주산성 전투의 대승으로 일본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도체찰사로 있던 류성룡(柳成龍)이 올린 보고가 『선조실록』 1593년 2월 25일의 기록에 보이는데, “경성에 있는 적의 무리가 12일의 행주 전투로 인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의 말이 모두 같습니다. 15일에 충청 수사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용산창(龍山倉) 아래에 도착하여 왜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이 거의 2만 명이나 되었습니다.”고 하여 행주대첩 때 서울 탈환을 둘러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불리함을 직감한 일본군과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는 명나라군의 입장이 명과 일본 간에 강화 협상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서울에서 병력의 철수를 결정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4월 20일 도성이 수복되었다. 명나라 구원병은 성안으로 들어오고 이제독(이여송)은 소공주댁(남별궁)에 숙소를 정하였다. 적들은 하루 전에 이미 성을 버리고 달아난 터였다. 이때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 백에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었다.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여 그날의 비참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다만 숭례문으로부터 남산 밑까지는 적들이 사처로 쓰던 집들이라, 다행히 다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 그리고 종루와 큰 거리 북쪽에 있는 관청과 관학(館學:성균관과 사부학당) 등도 모두 재가 되어 버렸다.…나는 먼저 종묘에 들어가 한바탕 통곡을 하였다.”고 하여 잿더미로 변한 서울의 모습과 종묘에서 통곡하던 자신의 모습을 기록에 담았다.

선조가 서울에 돌아온 때는 서울 수복 후 6개월이 지난 10월이었다. 『징비록』에는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환도했다.”고 기록하여, 1592년 4월 30일 서울을 비운 지 1년 6개월 만에 선조가 서울로 돌아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궁궐이 모두 불탔기에 선조는 비교적 화를 입지 않은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사저를 거처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1593년 10월 1일에는 “상이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行宮:임시로 사용하는 궁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릉동 행궁’이라 불린 이곳에서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식을 올렸다. 광해군은 이곳을 경운궁으로 승격시켰고, 인조의 즉위식 또한 경운궁에서 거행되었다.
임진왜란 때 환도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거처한 경운궁(현 덕수궁) 석어당
임진왜란 때 환도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거처한 경운궁(현 덕수궁) 석어당

6·25 전쟁, 3개월 동안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일요일 새벽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에 나섰다. 한국군의 대응은 미흡했고, 6월 28일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아픈 역사가 다시 재현된 것이다.

개성에 이어 의정부가 무너지고 북한군이 창동과 우이동을 거쳐 미아리 고개로 접근하고 있던 중에도 대한민국 중앙방송은 “적을 격퇴하고 있으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는 오보를 전하고 있었다.

6월 27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열차로 서울역을 떠났고 대한민국 정부는 일시 대전으로 옮겨졌다. 28일 오전 2시 15분에는 한강 인도교철도교가 폭파되었고, 북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도 않고 28일 새벽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150만을 약간 넘었는데, 영등포 지역에 거주하던 15만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강 이북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간 사람은 약 40만 명 정도였다.
1950년 피난민들이 폭파된 한강 인도교 대신 놓인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너는 모습
1950년 피난민들이 폭파된 한강 인도교 대신 놓인 부교를 통해 강을 건너는 모습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바로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 서울은 중심부와 변두리 할 것 없이 ‘인민 해방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와 같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붉은 벽보로 넘치게 되었다. 

공산주의에 협조하지 않은 다수 사람들의 희생도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공보처 통계국의 집계에 의하면 서울에서 사망, 학살, 납치,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의 숫자가 9만 5,000여 명에 달하였다.(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한울, 2019, 49~51쪽)
1950년 9월 중순에서 하순에 납북이 많이 이뤄졌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주요 길목이 미아리 고개였다.
1950년 9월 중순에서 하순에 납북이 많이 이뤄졌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주요 길목이 미아리 고개였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시기에 북한으로 납치된 인사들도 다수 있었다. 김규식과 같은 정치인을 비롯하여, 서울대 총장 최규동, 고려대 총장 현상윤 등 교육계 인사, 역사학자 정인보, 이광수, 김진섭 등 문인 이외에 언론인, 변호인들이 북송길에 올랐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유엔군이 서울 수복에 나선 9월 중순에서 하순에 이르는 시기에 납북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으로 이송되는 주요 길목은 돈암동에서 미아리 고개를 거쳐 우이동과 의정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납북의 아픔을 표현한 대표적인 가요가 가수 이혜연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 고개’ 였다. 단장(斷腸)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란 뜻이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화약 연기 앞을 가려/눈 못 뜨고 헤매일 때/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한 많은 미아리 고개’ 가사에도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서울수복 후 태극기 게양을 재현하는 모습(1954년)
서울수복 후 태극기 게양을 재현하는 모습(1954년)

한군에 점령되었던 서울을 다시 수복한 날은 1950년 9월 28일로 인천상륙 작전 성공 후 2주일 만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은 1년간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지만, 6·25 전쟁 시기 서울은 정확히 3개월 만에 수복을 이루었다.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중앙청에 있던 국회의사당에서 환도식이 거행된 때는 9월 29일 정오였다.

서울대 교수로 있었던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쓴 『역사 앞에서』는 일기 형식으로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 시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1950년 9월 28일에는 “새벽부터 인민군이 버리고 간 군수물자 약탈극이 벌어졌다. 인민군은 물러나고 아직 국군과 유엔군은 들어오지 않았다. …낮때를 지나 골목길이 술렁술렁하고 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나기에 또 무슨 변란인가 하였더니, 이제야 비로소 미군이 들어와 소탕전을 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탕전이 끝나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왔다. 나도 오랜만에 마음 놓고 대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한동안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만 같다.” 김성칠의 이 기록은 개인이 서울 수복을 직접 맞이한 현장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지금처럼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1950년의 7월에서 9월. 이날은 역사 속에서 서울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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