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핫플' 최초의 서양식 커피숍이 있던 이 호텔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5.22. 14:30
손탁호텔이 그려진 그림엽서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1) 호텔, 근대의 꿈과 욕망을 담다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여행 장소와 더불어 항상 고려하는 것이 숙소인 호텔이다.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고, 아침에 편안한 차림으로 먹을 수 있는 호텔 조식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처음 우리나라에 호텔이 들어섰을 때, 호텔은 그야말로 근대의 상징이었다. 멋있는 외관과 더불어 모든 것이 고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부대 시설 등을 갖춘 호텔 투숙. 가격은 비쌌지만, 호텔은 근대인들이 꿈과 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점점 확산되어 나갔다.
처음 우리나라에 호텔이 들어섰을 때, 호텔은 그야말로 근대의 상징이었다. 멋있는 외관과 더불어 모든 것이 고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부대 시설 등을 갖춘 호텔 투숙. 가격은 비쌌지만, 호텔은 근대인들이 꿈과 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점점 확산되어 나갔다.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이 아닌 인천에서 탄생했다. 대불(大佛) 호텔 또는, 다이부츠 호텔(Daibutsu Hotel,大仏ホテル 다이부츠 호테루)이 그 주인공으로, 인천의 일본 조계지에 처음 세워졌다.
최초의 호텔이 인천에 세워진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인천(1883년)의 세 개 항구가 개항한 것에서 연유한다.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숙소가 필요했고, 이러한 수요를 반영하여 호텔을 세운 것이다.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와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는 호텔 영업을 처음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2층 목조 가옥이었는데, 1887년 벽돌을 사용한 서양식 3층으로 재건축하여 확장하였다.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도 대불호텔에서 숙박했던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서울로 가는 외국인들이 머물렀던 숙소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최초의 호텔이 인천에 세워진 것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인천(1883년)의 세 개 항구가 개항한 것에서 연유한다.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숙소가 필요했고, 이러한 수요를 반영하여 호텔을 세운 것이다.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와 아들 호리 리키타로(堀力太郞)는 호텔 영업을 처음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2층 목조 가옥이었는데, 1887년 벽돌을 사용한 서양식 3층으로 재건축하여 확장하였다.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도 대불호텔에서 숙박했던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서울로 가는 외국인들이 머물렀던 숙소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경인선의 개통은 호텔의 영업에 큰 타격을 가했다. 사진은 한강철교 전경
1899년 최초의 철도 경인선의 개통은 호텔의 영업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인천항에서 서울로 가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면서, 호텔을 이용할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으로 서양인들의 왕래가 급격히 줄어든 것도 대불호텔의 경영에 어려움을 더해 주었다.
결국 대불호텔은 1918년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 중국인들이 대불호텔 건물을 인수해 중화루(中華樓)라는 북경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하였다. 2층 가운데에 ‘中華樓’라는 현판을 걸었고, 1층 발코니 상단에는 ‘CHUNG HWALOO RESTAURANT AND BAR’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동안 번성하였지만, 경영난으로 1975년 무렵에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대불 호텔 건물은 임대건물로 사용되거나, 주차장 등으로 방치되었다. 2011년 5월 상가 신축공사를 하던 중 벽돌을 쌓아 만든 대불호텔 터가 발견되자 국가유산청은 보존 작업에 착수하여 완공하였다. 현재는 대불호텔 전시관이 들어섰고, 각종 세미나, 강연, 전시회 등에 대관을 하고 있다.
결국 대불호텔은 1918년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에 이르게 되었다. 1922년 중국인들이 대불호텔 건물을 인수해 중화루(中華樓)라는 북경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하였다. 2층 가운데에 ‘中華樓’라는 현판을 걸었고, 1층 발코니 상단에는 ‘CHUNG HWALOO RESTAURANT AND BAR’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동안 번성하였지만, 경영난으로 1975년 무렵에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대불 호텔 건물은 임대건물로 사용되거나, 주차장 등으로 방치되었다. 2011년 5월 상가 신축공사를 하던 중 벽돌을 쌓아 만든 대불호텔 터가 발견되자 국가유산청은 보존 작업에 착수하여 완공하였다. 현재는 대불호텔 전시관이 들어섰고, 각종 세미나, 강연, 전시회 등에 대관을 하고 있다.
손탁호텔의 깃발이 인쇄된 홍보용 엽서이다.
손탁호텔
손탁호텔은 앙트와네트 손탁(Sontag:1854~1925)이 주인이었던 호텔로, 손탁빈관(孫澤賓館) 또는 한성빈관(漢城賓館)으로도 불려졌다.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로 조선에 온 베베르를 따라 서울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후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의 5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어학 능력과 서양요리와 실내장식을 담당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1895년 고종으로부터 덕수궁과 도로를 마주 보는 서쪽의 가옥을 하사받았고, 1896년 무렵부터 호텔 영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1902년 10월부터 구가옥을 헐고 양관(洋館)을 건축하여 호텔 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호텔의 위치는 현재의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근처이며, 황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에,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호텔의 시작이었다. 호텔의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비틴이 맡았다.
처음에는 궁내부에서 예약한 손님만을 받아들이는 프라이빗 호텔로 운영되었다. 개화파 관료와 서구 외교관들의 회합 모임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에서 이곳을 회합 장소로 자주 사용했는데, 손탁 호텔 커피숍은 최초의 서양식 커피숍이었다. 손탁은 커피를 매개로도 고종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일본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 체결을 위해 머물던 장소이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만큼 손탁 호텔은 지리적으로도 접근성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1909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매각하고 조선을 떠났고, 192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1909년 ‘더 서울 프레스’ 1909년 9월 18일자에 게재된 손탁 호텔 광고 문안을 통하여 당시 호텔의 모습을 일부 짐작할 수가 있다. “손탁호텔 J 보에르 승계자, 한국에서 가장 크고 편리한 호텔, 각방에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 가족 투숙자 및 여행자 고객들을 위한 모든 가정 편의 시설과 프랑스 요리, 공식연회, 결혼식, 모도회, 피로연, 베이슨식 및 각종 여흥, 통역자, 가이드, 짐꾼 즉시 대기”(이순우, 『손탁호텔』, 하늘재, 2012, 160~161쪽)라는 광고 문안을 통하여 손탁 호텔에서 프랑스식 요리가 제공되고 요즈음의 호텔처럼 결혼식장이나 연회장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고종으로부터 덕수궁과 도로를 마주 보는 서쪽의 가옥을 하사받았고, 1896년 무렵부터 호텔 영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1902년 10월부터 구가옥을 헐고 양관(洋館)을 건축하여 호텔 영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호텔의 위치는 현재의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근처이며, 황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에,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호텔의 시작이었다. 호텔의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비틴이 맡았다.
처음에는 궁내부에서 예약한 손님만을 받아들이는 프라이빗 호텔로 운영되었다. 개화파 관료와 서구 외교관들의 회합 모임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에서 이곳을 회합 장소로 자주 사용했는데, 손탁 호텔 커피숍은 최초의 서양식 커피숍이었다. 손탁은 커피를 매개로도 고종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일본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 체결을 위해 머물던 장소이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만큼 손탁 호텔은 지리적으로도 접근성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1909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매각하고 조선을 떠났고, 192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1909년 ‘더 서울 프레스’ 1909년 9월 18일자에 게재된 손탁 호텔 광고 문안을 통하여 당시 호텔의 모습을 일부 짐작할 수가 있다. “손탁호텔 J 보에르 승계자, 한국에서 가장 크고 편리한 호텔, 각방에 욕실이 딸린 25개의 객실, 가족 투숙자 및 여행자 고객들을 위한 모든 가정 편의 시설과 프랑스 요리, 공식연회, 결혼식, 모도회, 피로연, 베이슨식 및 각종 여흥, 통역자, 가이드, 짐꾼 즉시 대기”(이순우, 『손탁호텔』, 하늘재, 2012, 160~161쪽)라는 광고 문안을 통하여 손탁 호텔에서 프랑스식 요리가 제공되고 요즈음의 호텔처럼 결혼식장이나 연회장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손탁호텔 자리에 건립된 이화학당 프라이홀
이 식기에 손탁 호텔을 배경으로 지배인 보에르와 종업원들이 촬영한 엽서 사진도 남아 있다. 손탁이 떠난 이후에도 보에르에 의해 영업을 이어갔던 손탁 호텔은 1914년 소공동에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경영난에 빠졌고, 1916년부터는 사실상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1917년 건물과 부지가 이화학당으로 넘겨졌고, 이후 메인홀이 여학생 기숙사로 전환되어 사용되었다. 1922년에는 이화학당에서 프라이홀(Frey Hall) 신축 과정에서 건물이 헐리면서 손탁 호텔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손탁 호텔이 위치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비석만 남아 있다.
1914년 원구단(圜丘壇) 자리에 들어선 조선호텔의 전경이다.
조선 철도호텔에서 웨스틴 조선호텔로
조선 철도호텔은 1910년 한일강제 병합 후 세계만방에 선전을 목적으로 ‘시정(始政) 5년 기념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1915년에 예정된 행사에 참여할 내외국인을 숙박시킬 호텔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주관이 되어 1913년 9월 30일 기공하여 1914년 10월 10일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철도국 직영으로 운영되었으며, 일제 강점 시기 최고급 호텔 겸 다방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호텔이 위치한 곳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圜丘壇)이 있던 곳이었다. 일제가 환구단을 헐고 이곳에 호텔을 조성한 것은 조선총독부와 경성역의 중간 지점이었고, 맞은 편에는 경성부청사가 있어서 지리적으로 최상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공사의 설계는 일본에 거주하던 독일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맡았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 시설까지 갖추었다.
건축 공사는 일본의 건축회사 시미즈구미가 시행하여, 대지 6750평, 건평 583평, 69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을 완성하였다. 1924년 로즈가든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며, 1926년에는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영업 방침에서 벗어나 중산층 고객의 흡수에도 나섰다. 1932년 5월호 『삼천리』 잡지에는 “지금도 조선호텔 안에는 땐스 홀이 있어서 서양인과 일부 인사가가 춤을 추는데, 다른 곳에도 땐스 홀이 생기면 춤을 추러 가겠느냐?”는 조사를 하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1930년대 조선호텔 땐스 홀이 번성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해방 후 조선호텔의 운영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미군정 시기에 이곳에 군정청 사령부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로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 일본어 ‘조센호테루’에서 ‘조선호텔’ 변경하였는데, 국호는 대한민국이었지만, ‘대한호텔’이라는 이름 대신에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철도국 직영으로 운영되었으며, 일제 강점 시기 최고급 호텔 겸 다방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호텔이 위치한 곳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圜丘壇)이 있던 곳이었다. 일제가 환구단을 헐고 이곳에 호텔을 조성한 것은 조선총독부와 경성역의 중간 지점이었고, 맞은 편에는 경성부청사가 있어서 지리적으로 최상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공사의 설계는 일본에 거주하던 독일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맡았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 시설까지 갖추었다.
건축 공사는 일본의 건축회사 시미즈구미가 시행하여, 대지 6750평, 건평 583평, 69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을 완성하였다. 1924년 로즈가든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며, 1926년에는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영업 방침에서 벗어나 중산층 고객의 흡수에도 나섰다. 1932년 5월호 『삼천리』 잡지에는 “지금도 조선호텔 안에는 땐스 홀이 있어서 서양인과 일부 인사가가 춤을 추는데, 다른 곳에도 땐스 홀이 생기면 춤을 추러 가겠느냐?”는 조사를 하는 내용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1930년대 조선호텔 땐스 홀이 번성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해방 후 조선호텔의 운영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미군정 시기에 이곳에 군정청 사령부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호텔로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 일본어 ‘조센호테루’에서 ‘조선호텔’ 변경하였는데, 국호는 대한민국이었지만, ‘대한호텔’이라는 이름 대신에 ‘조선’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였다.
2002년에 촬영된 원구단과 조선호텔
6. 25전쟁 때는 장병의 휴양소와 미8군 장교 숙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1961년 호텔의 소유권은 한국정부가 가지게 되었다. 1970년에 조선호텔은 일제강점 시기 때 지은 건물을 헐고 20층 규모의 호텔을 새로 지었다. 1981년에는 미국의 웨스틴 호텔즈와 제휴하면서 ‘웨스틴 조선호텔’로 개칭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웨스틴 조선 호텔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인 환구단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호텔 앞에는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신위판을 모신 건물)마가 원형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호텔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웨스틴 조선 호텔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인 환구단 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호텔 앞에는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신위판을 모신 건물)마가 원형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호텔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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