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는 굴토끼(rabbit)가 없었다? 우리가 몰랐던 토끼 이야기

서해성 작가

발행일 2023.01.06. 15:45

수정일 2023.01.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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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6) 토끼해에 읽는 어떤 토끼 이야기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서대문구 신흥동 토끼 사육장, 1963년 1월 16일 (출처 : 한국정책방송원 정부기록사진집)

1963년 1월 16일 서대문구 신흥동에서 찍힌 사진 한 장

토끼를 앞에 두고 세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 정확하게 60년 전이다. 간지가 올해와 같아 계묘년이다. 토끼해다. 육십갑자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를 회갑이라고 한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맞은 두 번째 겨울이었다. 1963년이다. 그해 초 일본 후지 티브이에서 ‘무쇠팔 아톰’(우주소년 아톰)이 연속 만화극(애니메이션)으로 방영을 시작했다. 늦가을에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암살되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딸로 보인다. 사진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찍은 이가 누구인지 찍힌 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1963년 1월 16일 서대문 신흥동이라고만 나와 있다. 신흥동은 서울이라고는 믿기 어렵게도 시골이었다.

홍지문 바깥 마을 수마동에는 사격장이 있었다. 이를 사람들은 포방터라고 불렀다. 포를 놓던 터라는 뜻이다. 지금 홍은동 포방터시장이다. 사격을 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땅을 고르게 닦아 놓았던 자리에 이윽고 장이 섰던 것이다. 신흥동은 그 아래 생긴 동네였다. 수마동이나 신흥동은 행정동명이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다만 포방터라는 이름이 남았다. 토끼 사육장은 그 신흥동에 있었다. 새해를 맞아 사진 기자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토끼 사진을 찍으려고 했을 게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토끼들은 제법 큰 아파트형 공간에서 살고 있다. 

토끼를 기르고 있는 세 사람이 사진기 앞에 모여 있다. 집단사육하고 있는 토끼들에게 먹이를 가장 부지런히 가져다주었을 여인, 곧 어머니는 보이질 않는다. 그 시절 안주인들은 좀처럼 사진기 앞에 서질 않았다. 안사람은 바깥에 모습을 뵈질 않는 게 마땅한 도리로 여기던 세상이었다. 세 사람은 단단히 겨울 옷차림을 하고 있다. 

예순 해 전 토끼해 사람들은 어떻게 추위를 이겨냈을까

우선 모자 셋이 있다. 사내는 닳은 털모자를 쓰고 있다. 챙이 없는 이 모자는 양털이나 앙고라 토끼털 따위로 짠 것이다. 소년은 가죽이 붙은 개털모자를 썼다. 개털이란 말 그대로 개털로 만들었던 데서 붙은 이름이다. 모자는 귀를 덮도록 되어 있다. 흔히 군고구마장수 모자라고들 부른다. 군고구마를 서울 길거리에서 처음 판 것도 일제였고, 모자를 개발한 것도 일제 군부였다. 소녀는 머리와 목을 긴 목도리로 휘휘 둘러 감았다.

사내가 입고 있는 목에 털이 붙어 있는 잠바(점퍼)는 지퍼로 앞을 여미도록 되어 있는 최신식이다. 가슴께에 비스듬히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역시 지퍼가 달려 있다. 아직 국내에서는 이런 옷을 만들지 못했을 터이므로 수입품일 게다. 이 수준의 소비재는 거의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것이거나 밀수품이었다. 

소년도 털 달린 점퍼를 입었다. 구김으로 봐서 새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고 꺼내 입은 듯하다. 어깨를 약간 움츠리고 있는 소녀는 스웨터를 걸쳤다. 기본적으로 사내의 모자를 짠 것과 같거나 비슷한 털 제품이다. 소매 끝이 손등으로 내려오고 있는 건 이 소녀가 더 자랄 때까지 입도록 큰 옷을 사 입힌 까닭이다.

오른쪽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사내의 바지는 물이 빠지거나 한 걸로 봐서 필시 ‘해작’이다. 해작이란 해군 작업복이라는 뜻이다. 청바지라는 말보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널리 퍼졌던 유행어다. 해군들이 푸른 바지를 입은 데서 나왔다. 소년도 두껍게 직조한 바지를 입었고 소녀는 털바지다. 이는 손으로 뜬 게 아니라 기계로 직조한 것이다. 아버지가 분명한 사내는 방한화를 신었고 소년은 검정 운동화, 소녀의 발은 토끼에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한반도에 유럽 토끼를 들여온 건 일제였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멧토끼는 
집에서 기를 수 없었고 길들일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토끼를 기른 건 세 식구의 몸을 감싼 것에서 볼 수 있듯 가죽과 털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고기도 뺄 수 없었다. 한반도에 유럽 토끼를 들여온 건 일제였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멧토끼는 집에서 기를 수 없었고 길들일 수도 없었다. 일제는 먼저 중간 크기 식용 설치류를 가축화할 것을 한국인에게 권장했다. 나중에 토끼는 쥐들과 달리 이빨이 겹쳐서 자라는 중치류(重齒類) 토끼목으로 독립하여 분류되었다. 소나 돼지처럼 따로 사료를 주지 않고 풀을 뜯어서 주면 되는 토끼는 빠르게 거의 모든 한반도 농가로 퍼져나갔다. 그걸 기르는 건 대개 여자들이나 아이들 몫이었다. 이를 집토끼라고 한다.

자칫 한국 원산이라고 여길 수 있는 집토끼 대부분은 눈이 빨갛고 털이 흰지라 통상 ‘루비 아이드 화이트(ruby eyed white)’라고 부르는 수입 토끼다. 영어로 ‘rabbit’이라고 부르는 토끼들은 굴토끼다. 이들 먼 조상은 이베리아 지역 굴속에서 살았다. 이베리인들이 살던 땅이다. 지금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자리 잡고 있다. 시골 어른들은 새끼를 낳을 무렵 토끼장을 컴컴하게 덮어주지 않으면 어미가 새끼를 물어 죽인다고들 했다. 굴에 살던 습성 탓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들이 열흘 가까이 눈을 뜨지 못하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일본에서 집토끼가 널리 퍼진 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기간이었다. 단백질원과 전투용 방한 모피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육이 본격화되었다. 군국주의로 치달아가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 권력은 일반 농가에 이를 강하게 요구했다. 일본 백색종에 서양 외래종을 교잡한 집토끼는 전투식량이자 국민 식량이었고, 털이 붙은 가죽은 대륙 침략에 나선 일제 군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 강추위로부터 보호해주었다. 

동네를 활개 치면서 돌아다니고 있던 개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른바 ‘야견(野犬)박살령’이다. 야견이란 들개, 요샛말로 유기견이다. 등록하지 않은 개는 때려 죽여도 된다는 거였다. 광견병 문제도 있었지만, 고기와 가죽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컸다. 합성섬유나 모직 의류는 연합국이 주생산국이었다. 일제는 모피로 방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군고구마 모자, 군밤장수의 모자가 나온 게 이 무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고양이, 족제비, 하물며 쥐까지 군용으로 잡아들여야 하는 궁지에 몰린 일제 군부였다. 집토끼를 기르는 건 그에 비하면 수월한 일이었다. 
집토끼들이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제 군인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는 걸 알았다면, 
식민지 한국 성장세대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집토끼 사육이 농가 부업으로 일반화한 건 다이쇼(大正) 시대였다. 식민지 한반도에도 이는 곧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사육 토끼로 흰색이 많은 건 염색할 때 흰털이 쉬웠기 때문이다. 흰 토끼는 멜라닌 결핍으로 생기는 백색증, 곧 알비노 탓이다. 토끼가 겪고 있는 돌연변이를 인간은 정교하게 갈취해온 셈이다.

일제는 어린이들이 토끼를 기르는 건 동심과 유대관계를 형성케 하는 등 정서 교육에 좋다고 널리 장려하였다. 이 집토끼들이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제 군인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는 걸 알았다면, 식민지 한국 성장세대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어쨌든 일제는 패전 뒤, 한국은 광복 뒤에도 이 교육 방향은 지속되었다.

충남 논산 은진초등학교에 설치된 토끼 사육장, 1962년 7월 23일 (출처 : 한국정책방송원 정부기록사진집)

전통사회 한반도 토끼는 멧토끼가 주류였다. 산토끼라고 부르는 멧토끼 말고도 만주토끼, 우는토끼가 있다. 북쪽 높은 지대에 사는 두 토끼는 거의 볼 수가 없고 멧토끼가 금수강산 야산 군데군데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 세 토끼들은 굴을 파지 않는다. 영어로는 ‘Hare’라고 따로 부른다. 한반도에는 ‘rabbit’, 곧 굴토끼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 땅이 제 땅인 까닭에 숨어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멧토끼는 금수강산 야산 군데군데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 토끼들은 굴을 파지 않는다. 
한반도에는 굴토끼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 땅이 제 땅인 까닭에 
숨어 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토끼해 계묘년에 알지 못하는 그 집 식구들 안부를 묻는다

해가 바뀔 무렵이면 늘상 십이지를 이루는 열두 동물 이야기가 항간에 낭자하다. 갑골문에 벌써 십이지가 나오고 있으니 실로 오래된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토끼도 마찬가지로 겨레붙이 설화나 전설, ‘토끼전’, ‘수궁가’ 같은 문학, 그에 따른 문양과 그림, 길흉화복 따위를 주로 언급하곤 한다. 이 토끼는 20세기 토끼가 겪은 운명과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토끼 또한 전통사회 토끼가 아니다. 토끼해를 맞아 집토끼 내력을 되짚어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토끼 한 마리도 역사를 피해 가지는 못한다. 

신흥동에서 토끼를 대량 사육하던 식구들은 어찌 되었을까. 토끼를 길러서 상급학교에 올라가고, 새로 집을 장만하거나 했을까. 토끼처럼 다복하게 딸, 아들 낳아 살았을까. 어쩌다 물난리라도 겪지는 않았을까. 털이 촘촘한지라 물에 젖은 토끼는 볼썽사나울 뿐 아니라 체온이 떨어져 숨이 끊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미 아흔 살이 넘었을 것이고, 아들은 적어도 일흔, 딸은 일흔 살에 가까운 나이일 게다. 이름도 알 수 없어서 찾아볼 방도 같은 게 없다. 예순 해가 지나 다시 토끼해 계묘년에 알지 못하는 그 집 식구들 오손도손한 안부를 묻는다.  

신흥동 토끼 사육장 사진 속에 등장하는 가족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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