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다 선명하게 남은 이름,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서해성 작가

발행일 2022.11.16. 14:50

수정일 2022.11.30. 17:58

조회 5,652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4) 이회영이 사진 한 장밖에 없는 까닭은
서해성 작가가 들려주는 ‘흐린 사진 속의 그때’
우당 이회영 (출처: 이회영기념관)

조선 첫 번째 가문, 이항복의 후손

우당 이회영 선생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정면 초상 사진은 한 장뿐이다. 가로 4.5센티, 세로 6.8센티 크기다. 제사 지낼 영정 사진 한 장 없었는데 광복 뒤 집안에서 짐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회영 형제는 건석철회시호다.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떼어 읽을 수 없어서 이렇게 썼다. 여섯 형제는 한 몸이었다. 그들은 한 몸, 한 생각, 한 행동으로 살았다. 장구한 우리 겨레붙이 역사에서 여섯이나 되는 형제가 외침에 맞서 이렇게 한 뜻, 한 길로 나아갔다는 기록은 아직 보지 못했다. 형제들뿐 아니라 아내, 자식들도 다 하나였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임란 이후 내내 최고 가문이었다. 죽은 뒤에 받는 추증까지 포함하면 정승 반열에 오른 이들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니 왕통을 이어간 전주 이씨 가문 말고는 으뜸이었다. 

땅도 넓어서 제 전답만 밟고 양주에서 한양에 이를 수 있을 정도였다. 세상은 이들을 삼한갑족이라고 불렀다. 조선 첫 번째 가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쳤다면 그들은 봉건왕조시대를 대표하는 가문과 인물에 지나지 않았을 터이다.
난중에 이항복은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를 맡아 왜적을 물리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백사공파는 이항복 후손이라는 말이다. 이항복은 왜란이 일어나자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로 몽진을 떠난 임금을 옆에서 모셨다. 임금이 난리를 맞아 궁을 나서면 몽진, 보통 사람은 피란이다. 난중에 이항복은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를 맡아 왜적을 물리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두루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올랐다. 그의 아호가 백사라서 후손들을 백사공파라고 불러 왔다.

이항복의 다른 아호는 필운(弼雲)이다. 왕궁 오른쪽에서 보필한다는 뜻이다. 왕은 용이고 신하는 구름이다. 이를 우필운(右弼雲)이라고 한다. 요새 말로 하자면 오른팔 정도가 되겠다. 그의 장인이 도원수 권율이다. 사위가 국방부장관이고 장인이 총사령관인 셈이었다. 

서울 종로 행촌동은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에서 비롯된 은행나무골에서 나왔다. 이항복은 장인이 내어준 집에서 한 동안을 살았다. 거기가 필운대로 지금 배화학교다. 학교 뒷마당 돌벽에는 필운대 세 글자를 새긴 각자가 뚜렷하다.

이항복이 거처하였던 곳은 더 있다. 남산 비탈 쌍회정 터(지금 일신교회)다. 이항복이 심었다는 회나무 두 그루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항복은 이곳에서 무릎을 겨우 방에 들여놓을 정도로 작은 집에서 궁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쌍회정은 무너지거나 이름도 바뀌곤 했는데 귤산 이유원이 이를 다시 일으켰다. 
이회영 형제들은 쌍회정에서
국권 회복과 광복을 위한 활동을 도모하였다.

이유원은 이회영의 둘째 형인 이석영을 양자로 들여 큰 재산을 상속했다. 이게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한국독립운동의 거대한 밑천이 되었다. 이회영 형제들은 쌍회정에서 국권 회복과 광복을 위한 활동을 도모하였다. 이회영은 통절하게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라 하며, 국은(國恩)과 세덕(勢德)이 이 시대의 으뜸이라고 한다…만일 뒷날에 행운이 있어 왜적을 부숴 멸망시키고 조국을 다시 찾으면,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노라.”

국치를 당한 경술년(1910) 세밑 섣달 그믐을 하루 앞둔 십이월 삼십일 이회영 일가 사십여명은 찬 바람 치는 서울을 떠나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살아서 환국한 이는 이시영뿐이었다. 다른 다섯 형제는 항일독립투쟁 전선에서 전 재산과 목숨마저 바치고 돌아오지 못했다. 여섯 형제 중 사진을 남긴 이는 이회영과 이시영 말고는 없다. 나머지 네 형제는 사진 한 장 없다.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사람 이야기

이회영기념관 안쪽 작은 방에 있는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사람 이야기’는 이회영 사진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그가 사진 한 장밖에 없는 까닭이 나와 있다.

“가로 4.5센티, 세로 6.8센티. 이회영이 남긴 초상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장소 또한 불명확하다. 사진을 어떤 경위로 왜 찍었는지 아는 벗도 후손도 없다…이회영은 요시찰이었다. 그에게는 늘 망원(감시자, 끄나풀, 밀정)이 붙어 있었다. 이회영은 그림자였다. 그는 보이되 보이지 않아야 했다. 이회영은 동지들과 나누는 중요한 대화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필담으로 써 가면서 진행하곤 했다. 대화가 끝나면 곧바로 종이를 불태웠다. 이회영과 늘 가깝게 연락을 주고받던 동지 이상설(李相卨, 1871~1917) 또한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모든 서신 등을 불살랐다. 유언하길,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했다. 유해도 책도 불로 사라졌다. 
기록은 곧 자신뿐 아니라 
동지들의 죽음을 뜻했다. 
이회영은 기록 없는 기록을 남겼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지아비의 편지 한 장 보전할 수 없었다. 편지 내용은 사라지고 봉투 하나만 달랑 유품으로 남아 있다. 광복 뒤 <서간도시종기>를 쓸 때 이은숙은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집필해야 했다. 목숨을 건 투쟁은 날짜와 시간조차 생생하게 뇌리에 남는 법이기도 하지만 기록과 흔적 자체가 없었다. 이회영은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시각 기록은 더욱 그러했다. 기록은 곧 자신뿐 아니라 동지들의 죽음을 뜻했다. 이회영은 기록 없는 기록을 남겼다. 다른 숱한 항일운동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록이 없어 이름 한 글자 남기지 못한 이들이 얼마인가. 이회영은 사진 한 장뿐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과 <서간도시종기>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과 <서간도시종기>

기억의터부터 이회영기념관까지, 남산에 가야 할 이유

서울에는 독립운동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여럿이다. 가을 산책 삼아 기꺼이 남산길을 오르기를 추천해도 좋으리라.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문서를 작성한 국치터(기억의 터)에서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서 있는 조선신궁 터까지를 잇는 국치길 허리에서 몇 걸음 내려서면 쌍회정 터에 이를 수 있다. 

회나무와 단풍나무가 물들어 있는 남산예장공원에서 벗들과 어울려 차 한 잔을 나누는 일도 좋을 터이다. 그 공원 아래에 '이회영기념관'이 있다. 우당 선생은 1932년 11월17일 고문 끝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중국 땅 뤼순옥에서 순국하였다. 17일은 을사늑약을 강제 당한 날이자 그 치욕을 잊지 않고자 독립운동가들이 정한 순국선열의 날이기도 하다. 이회영은 죽는 날마저 그날이었다.
우당 선생은 1932년 11월17일 
고문 끝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중국 땅 뤼순옥에서 순국하였다. 

지금 '이회영기념관'에서는 선생의 순국 90주기를 맞아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 선생을 기리는 전시 <나는 이은숙이다>를 하고 있다. 사진 한 장밖에 없는 이회영과 이은숙 부부는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 그 둘 사이를 이을 수 있는 건 산 자들의 기억뿐이다. 기억과 기록을 계승하여 재창조하는 게 역사다. 이 가을 끝에 남산 산책을 권하는 까닭이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