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부터 한양도성까지…조선의 풍경을 설계한 건축가 '박자청'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7.01. 15:50

수정일 2026.07.01. 16:35

조회 135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연못에 반영된 화려한 경회루
연못에 반영된 화려한 경회루
  125화    조선의 건축가, 박자청

2026년 6월 10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상징물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중앙탑 준공식이 열렸다. 레오 14세 교황도 참석하여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타계 100주기 추모 미사를 집전하고, 성당 외관의 최고 높이의 중앙탑인 예수 그리스도의 탑(172.5m) 준공식에 참석했다. 가우디가 스페인과 바르셀로나를, 미켈란젤로가 이탈리아와 로마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 인물이라면, 조선시대에도 이에 빠지지 않는 건축가가 있었다. 종묘, 창덕궁, 경회루 등을 설계했던 박자청(朴子靑:1357~1423)이 그 주인공이다.

박자청은 누구인가?

박자청의 본관은 영해(寧海)로, 조선 건국 직후 궁궐, 종묘, 왕릉, 청계천 등 주요 건축과 토목 공사를 주도한 인물이다.『세종실록』 1423년(세종 5년) 11월 9일에는 박자청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정승이나 판서와 같은 요직을 지낸 관료나 명망이 있는 학자들이 사망했을 때 졸기를 기록하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졸기의 기록을 보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박자청이 졸하였다. 자청은 영해군(寧海郡) 사람이다.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수행원)이며 내시 출신으로 낭장(郞將:정6품 무관)이 되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중랑장(中郞將:정 5품 무관)으로 옮겼다.”고 하여, 고려말 내시 출신으로, 조선 건국 후에는 무관직에 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황희석은 개국공신 2등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박자청은 황희석을 수행하며 입지를 넓혀간 것으로 보인다.

박자청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 1393년 입직(入直) 군사로 궁궐 문을 지키고 있는데, 태조의 아우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가 들어오려 하였다. 이에 박자청은 왕명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화가 난 이화의 발길에 차여 박자청은 큰 상처를 입었으나, 끝내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조는 이화의 잘못을 지적하고 박자청의 행동을 크게 칭찬하고 바로 호군(護軍:정4품)에 임명하였다.

태조의 신임 속에 박자청은 승진을 거듭하였다. 1394년에는 궁궐에서 토목과 영선(營繕:수리) 등의 일을 맡은 관청인 선공감(繕工監) 소감(少監)이 되었고, 1395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박자청에 대한 신임은 더욱 커졌고,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1402년 내시 출신으로는 파격적으로 장관직에 올라, 공조전서와 예조전서를 지냈다. 전서(典書)는 조선초기까지 정3품 직책이었으나, 태종 때인 1405년(태종 5) 판서로 고쳐 그 부처의 최고 책임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청계천
청계천
태종 때 박자청은 궁궐, 종묘, 왕릉 등의 건축과 수리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면서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였다. “선공감사(繕工監事)를 겸직하면서, 항상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1407년(태종 7)에 성균관에서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와 문소전(文昭殿:태조의 왕비 신의왕후를 모신 사당)을 감독하여 지었으며, 1408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제릉(齊陵:신의왕후의 무덤)과 건원릉(健元陵:태조 이성계의 무덤)의 역사를 감독하였다.”는 졸기의 기록에서 태종 때 건축 분야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박자청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창덕궁을 건설하고 경회루를 조성하다

내시 출신으로 궁궐을 지키던 신분이었던 박자청은 태종의 눈에 띄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 역량을 발휘해 나갔다. 천민 출신 장영실을 발탁하여 최고의 과학자로 키운 세종의 모습과도 닮은 점이 있다. 1405년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종의 역점 사업은 수도 한양의 대대적인 정비였다. 이 시기 태종은 경복궁을 보완하는 궁궐 창덕궁을 조성하고, 도성의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해 청계천 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제릉의 수리와 건원릉 조성, 성균관의 문묘(文廟) 조성, 경복궁 내 경회루 건설 등과 같은 주요한 건축, 토목 공사가 태종 때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사업의 중심에는 늘 박자청이 있었다. 

창덕궁은 1405년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긴 태종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다. 이미 세워진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기능을 보완하려는 목적과 함께, 경복궁은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난 장소여서 태종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은 박자청을 비롯한 여러 실무자가 참여했으며, 처음 정전과 침전 등 주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궁궐이 완성된  뒤 태종은 이곳에 행차했고 창덕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406년 광연루, 1411년 진선문과 금천교 등이 조성되었으며, 정문인 돈화문이 완성된 것은 1412년이었다. 
 
박자청은 성균관의 문묘(대성전) 공사를 맡아 4개월 만에 완공했으며, 경복궁 경회루 건설에도 참여해 8개월 만에 완공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경회루의 시작은 경복궁 창건 당시 태조가 편전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작은 누각을 세운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누각이 좁아 실제로 활용하기 어렵게 되자, 태종은 방치된 누각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고, 1412년 4월에 마무리되었다.『태종실록』에는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가 굉장히 커서 앞이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또한 연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고 기록하고 있다.  

박자청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축물들

박자청은 조선 건국 후 공사를 주관하고 담당하는 부서인 선공감의 책임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태종 때에는 현재의 국토교통부 장관인 공조판서, 서울시장인 판한성부사까지 역임하면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나갔다. 박자청이 완성한 업적은 한양도성 축성, 청계천 정비, 종로 시전(市廛) 행랑(行廊) 뿐 아니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인 태평관(太平館), 용산의 군자감(軍資監:군량 관리 관청), 서강(西江)의 풍저창(豊儲倉:세곡 보관 창고)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왕릉 조성 과정에서도 박자청은 그 능력을 발휘해 나갔다. 1408년(태종 8) 태조가 승하한 후 최종적으로 왕릉이 결정된 곳은 양주 검암산 자락(현재의 구리시)이었는데, 박자청은 조묘도감(造墓都監:왕릉 조성을 위한 임시 관청)의 제조(提調:책임자)로 임명되었다.『태종실록』에는 “조묘도감 제조 박자청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건원릉(健元陵) 공사를 시작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건원릉 조성에 앞서 박자청은 제릉(齊陵:신의왕후의 무덤)의 석물 수리와 감독에도 공을 세워, 태종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세종 때 원경왕후와 태종이 승하한 후 이루어진 헌릉(獻陵) 공사에도 박자청이 책임을 맡았다. 그만큼 땅의 형세를 제대로 읽고 지형을 살피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1410년(태종 10)에는 문묘 완성 공사에는 이직(李稷)과 함께 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독려하고, 마음을 다해 계획하고 손수 지휘하니, 넉 달이 지나 사당이 이루어졌는데, 높고 그윽하고 단정하고 큰 것이 옛날에 비하여 더함이 있었다.”는 기록을 문묘의 비문에 새겼다. 

종로의 시전 조성 작업에도 참여했다. 1413년(태종 13) 2월의 『태종실록』에는 “행랑(行廊)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경복궁의 남쪽부터 종묘 앞까지 좌우 행랑이 모두 881간이고, 또 종묘의 남쪽 도로에 층루(層樓) 5간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박자청은 공조판서로서 공사를 주관하였다. 

세종 때에도 박자청의 활약은 이어졌다. 1419년(세종 1)에는 선공감 제조로 있으면서 군인 200명을 부려, 태평관의 어실(御室)을 짓기 시작하였다. 1420년(세종 2)에는 “상왕(태종)이 영의정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명하여 살곶이 개천에 다리를 놓는 일을 몸소 감독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차산에 사냥을 자주 하러 다니는 태종의 요청에 의해 살곶이다리의 조성과 감독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모양을 둘러싸고 태종과 대립하다

궁궐, 왕릉, 문묘, 시전 등 여러 공사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박자청은 1415년(태종 15)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판한성부사에 임명된다. 그런데 1419년(세종 1년)에 태종(상왕)이 박자청을 하옥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창덕궁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 박자청은 사다리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뒤에 있는 응봉의 형세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서였다. 태종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박자청에 대하여 측량을 게을리했다는 명목으로 하옥시켰다. 이 장면은 수레를 잘못 제작했다는 이유로 투옥을 당한 장영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태종은 상량까지 한 행각을 부숴버리라 명했고, 그곳에는 담만 쌓게 하였다. 장영실이 수레 파손 사건 이후 역사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과는 다르게 박자청은 한 달 후에 사면되었고, 이후로도 태종과 세종의 깊은 신임 속에 국가의 주요 건축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창덕궁 역시 박자청이 계획한 사다리꼴 모습 그대로 행각이 지어졌다. 박자청이 설계한 창덕궁은 응봉의 지형을 잘 활용하고, 건물들의 자연스러운 배치를 통해 궁궐의 품격을 높여 주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양의 도시 설계와 건축은 모두 박자청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에 사관(史官)들의 박자청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였다.『세종실록』의 졸기에, “박자청의 사람됨이 심히 각박하고, 은혜와 덕이 적었다. 시기하고 이기려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른 특이한 재능이 없었으나, 다만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사졸(士卒)로부터 나와 1품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때 나이 67세였다.”라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그를 억눌렀던 신분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능력과 성과라는 관점에서 보면 박자청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나 스페인의 가우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 서울다운 도시의 기초를 만든 박자청을 기억하며, 옛 건축물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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