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했을까? 한성판윤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6.06.02. 14:15

조선시대 한성부 최고 책임자는 한성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123화 조선시대 서울시장 ‘한성판윤’
조선시대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는 한성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성석린(成石璘:1338∼1423)부터 대한제국 시기 박의병(1905년, 광무 9)까지 1,100여명이 한성판윤을 거쳤다. 대표적 인물로 세종 시대의 명재상 황희,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 행주대첩의 권율, 영조 때의 어사 박문수,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도 많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최고 책임자는 한성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성석린(成石璘:1338∼1423)부터 대한제국 시기 박의병(1905년, 광무 9)까지 1,100여명이 한성판윤을 거쳤다. 대표적 인물로 세종 시대의 명재상 황희,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 행주대첩의 권율, 영조 때의 어사 박문수,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도 많다.
초대 판한성부사 성석린
1394년(태조 3) 6월 6일 한성부가 출범했고, 6월 13일에 최고 책임자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성석린(成石璘)이 임명되었다. 성석린은 고려 말 공민왕부터 조선 초 세종까지 8명의 국왕을 섬기며 66년간 관료 생활을 이어간 인물이다. 그는 여말선초의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이 시기 가장 중점 사업은 개성에 있던 수도를 한양, 즉 한성부로 옮기는 것이었다.
1394년 10월 25일 『태조실록』은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松京:개성)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0월 28일에는 “새 도읍지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고 기록하여, 한성부가 새로운 도읍지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한성부가 도읍이 된 후, 태조의 최고 신임을 받은 정도전(鄭道傳)이 경복궁 등 궁궐 조성, 종묘와 사직 정비, 관아 설치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갔고, 성석린은 판한성부사로 이러한 사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석린을 배출한 창녕 성씨는 조선전기(태조~선조) 성발도, 성엄, 성년조, 성현, 성몽정, 성운, 성세장 등 8명 11차례의 서울시장을 배출하였다. 조선전기에 서울시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성씨는 청주 한씨와 안동 권씨로 총 14차례에 이른다.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 서울역사편찬원, 2017 참조)
1394년 10월 25일 『태조실록』은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松京:개성)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0월 28일에는 “새 도읍지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고 기록하여, 한성부가 새로운 도읍지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한성부가 도읍이 된 후, 태조의 최고 신임을 받은 정도전(鄭道傳)이 경복궁 등 궁궐 조성, 종묘와 사직 정비, 관아 설치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갔고, 성석린은 판한성부사로 이러한 사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석린을 배출한 창녕 성씨는 조선전기(태조~선조) 성발도, 성엄, 성년조, 성현, 성몽정, 성운, 성세장 등 8명 11차례의 서울시장을 배출하였다. 조선전기에 서울시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성씨는 청주 한씨와 안동 권씨로 총 14차례에 이른다.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 서울역사편찬원, 2017 참조)

북한산과 남산 사이의 도성 모습을 묘사한 <한양도(漢陽圖)>
성석린의 뒤를 이어 판한성부사가 된 정희계(鄭熙啟)는 한양 도성(都城) 사업에 관여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데는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이 둘러싸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도 크게 고려되었다. 천도 후 태조는 네 곳의 산을 연결하는 도성 건설을 추진하였고, 1396년 18.6Km의 도성이 완성되었다.
1396년 2월 28일 『태조실록』은 “성 쌓는 역부(役夫)를 돌려보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이나 되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경상도 안동(安東)과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맡은 공사는 다 마치지 못했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했고, 이에 맞서 판한성부사 정희계는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며,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 태조에게 청했다. 태조는 이를 옳게 여기고 안동과 성산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태조 때 축성한 한양 도성은 세종 때 개축 작업을 거쳐, 숙종 때와 순조 때 대규모의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각 시기 쌓은 돌이 달라진 모습은 현재의 한양도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 암문(暗門)을 나서면, 시기별 돌의 형태를 설명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1396년 2월 28일 『태조실록』은 “성 쌓는 역부(役夫)를 돌려보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5척이나 되었으며, 길이가 1만 9천 2백 척이었다. 평탄한 산에는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아래의 넓이는 24척, 위의 넓이는 18척, 높이가 25척이며, 길이가 4만 3백 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경상도 안동(安東)과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맡은 공사는 다 마치지 못했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 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했고, 이에 맞서 판한성부사 정희계는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면서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은 지세가 그런 까닭이며,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 태조에게 청했다. 태조는 이를 옳게 여기고 안동과 성산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태조 때 축성한 한양 도성은 세종 때 개축 작업을 거쳐, 숙종 때와 순조 때 대규모의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각 시기 쌓은 돌이 달라진 모습은 현재의 한양도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 암문(暗門)을 나서면, 시기별 돌의 형태를 설명한 안내판을 볼 수 있다.

한성부 판윤 임명 관련 문서
내시출신 등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들
정종과 태종 시기 초반에 판한성부사로 재임한 이거이(李居易), 조박(趙璞), 정탁(鄭擢), 정요(鄭曜), 최유경(崔有慶) 등은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 1392년 건국 후의 개국공신과 원종공신, 1398년 왕자의 난 진압 후에 이루어진 정사공신,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이 책봉된 것은 정치적 격동의 시기임을 의미하는데, 충성심이 강한 공신 출신으로 판한성부사를 임명한 것이 주목된다. 1411년(태종 11) 판한성부사 이귀령(李貴齡)은 “남산 기슭의 궁궐이 내려다 보이는 집들을 모두 철거하고, 또 경성(京城)은 땅이 좁으니, 마땅히 채마전(菜麻田)을 금하는 것이 좋겠다.”는 태종의 지시를 받았다. 현대사의 청와대 주변 고도 제한을 떠올리게 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내시 출신으로 판한성부사가 된 인물도 있었다. 『태종실록』 1414년 4월에는 “판한성부사로 치사(致仕)한 정요(鄭曜)가 졸(卒)하였다. 정요는 초계(草溪) 사람으로 원래 내시였다. 무진년에 회군(回軍) 2등 공신이 되어 숭정대부에 이르렀고, 판한성(判漢城)으로서 2대에 치사하였는데, 나이가 84세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요는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기에, 내시 출신이었지만 이례적으로 판한성부사가 될 수 있었다.
1415년(태종 15) 12월 판한성부사에 임명된 박자청(朴子靑)도 특별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급 무관 출신으로, 서울시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건축 분야에서 치고의 능력을 보였다. 태종에게 발탁되어 제릉(齊陵)과 건원릉 공사 감독, 도성 수축, 청계천 정비,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경복궁 경회루 건설을 완수했다.
1416년 11월에는 태종의 사돈이자, 충녕대군(후의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이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심온은 시장 재임 시절 양녕대군이 기생 집에 드나드는 것을 알고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도 잠시 서울시장을 지냈다. 황희는 1418년 1월 11일 황희가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었으나, 4개월만인 5월 11일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돌아갔다. 세자인 양녕대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낙향한 황희는 임진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별장으로 활용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내시 출신으로 판한성부사가 된 인물도 있었다. 『태종실록』 1414년 4월에는 “판한성부사로 치사(致仕)한 정요(鄭曜)가 졸(卒)하였다. 정요는 초계(草溪) 사람으로 원래 내시였다. 무진년에 회군(回軍) 2등 공신이 되어 숭정대부에 이르렀고, 판한성(判漢城)으로서 2대에 치사하였는데, 나이가 84세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요는 위화도 회군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기에, 내시 출신이었지만 이례적으로 판한성부사가 될 수 있었다.
1415년(태종 15) 12월 판한성부사에 임명된 박자청(朴子靑)도 특별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급 무관 출신으로, 서울시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건축 분야에서 치고의 능력을 보였다. 태종에게 발탁되어 제릉(齊陵)과 건원릉 공사 감독, 도성 수축, 청계천 정비, 창덕궁 건설, 성균관 문묘 건설, 경복궁 경회루 건설을 완수했다.
1416년 11월에는 태종의 사돈이자, 충녕대군(후의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이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심온은 시장 재임 시절 양녕대군이 기생 집에 드나드는 것을 알고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도 잠시 서울시장을 지냈다. 황희는 1418년 1월 11일 황희가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었으나, 4개월만인 5월 11일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돌아갔다. 세자인 양녕대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낙향한 황희는 임진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별장으로 활용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치수 사업과 청계천 관리도 한성부의 주요 업무였다.
치수 사업과 청계천 관리
세종 즉위 후에 이루어진 첫 인사에서 판한성부사가 된 인물은 노귀산(盧龜山)이었고, 두 달 후에는 권홍(權弘)이 그 자리를 이었다. 황희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 정승으로 평가받는 맹사성(孟思誠)은 1419년(세종 1) 판한성부사가 되었는데, 태상왕으로 있던 정종이 승하하자 국장을 책임지는 국장도감 제조를 겸직하였다.
치수 관리도 한성부의 주요 업무였다. 1421년(세종 3) 판한성부사 정진(鄭津) 등은 “두 곳의 수문은 좌우의 옹성(壅城)이 좁아서, 도성(都城) 안의 여러 곳의 물이 합쳐 흘러서 막히게 됩니다. … 원컨대 담당 관리로 하여금 적당한 곳을 가려서 별도로 수문 하나를 더 만들어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면, 물이 넘치는 것이 감해질 것입니다.”와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고, 세종은 공조에 명하여 농한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444년(세종 26)에는 태종 때 처음 조성한 개천(開川:청계천) 관리를 위한 대책 회의가 있었는데, 영의정 황희 등이 참여하였다. “개천물을 서울의 각 부(部)와 한성부 낭청과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성을 수축하고 화재를 담당하는 임시 관청) 낭청으로 하여금 성내의 각 집을 나누어 맡아,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개천에 버리지 못하게 하여 깨끗하게 하도록 힘쓰게 하고, 한성부의 당상과 금화도감 책임자가 항상 고찰을 행하게 하십시오.”라는 건의가 채택되었다.
이 기록에서 한성부가 중심이 되어 청계천 관리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는데, 단종 시기 판한성부사를 역임한 인물은 권맹손(權孟孫), 조혜(趙惠), 김세민(金世敏), 이사임(李思任), 강맹경(姜孟卿), 정척(鄭陟) 등 6명이었다.
치수 관리도 한성부의 주요 업무였다. 1421년(세종 3) 판한성부사 정진(鄭津) 등은 “두 곳의 수문은 좌우의 옹성(壅城)이 좁아서, 도성(都城) 안의 여러 곳의 물이 합쳐 흘러서 막히게 됩니다. … 원컨대 담당 관리로 하여금 적당한 곳을 가려서 별도로 수문 하나를 더 만들어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면, 물이 넘치는 것이 감해질 것입니다.”와 같은 대책을 제시하였고, 세종은 공조에 명하여 농한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444년(세종 26)에는 태종 때 처음 조성한 개천(開川:청계천) 관리를 위한 대책 회의가 있었는데, 영의정 황희 등이 참여하였다. “개천물을 서울의 각 부(部)와 한성부 낭청과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성을 수축하고 화재를 담당하는 임시 관청) 낭청으로 하여금 성내의 각 집을 나누어 맡아,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개천에 버리지 못하게 하여 깨끗하게 하도록 힘쓰게 하고, 한성부의 당상과 금화도감 책임자가 항상 고찰을 행하게 하십시오.”라는 건의가 채택되었다.
이 기록에서 한성부가 중심이 되어 청계천 관리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는데, 단종 시기 판한성부사를 역임한 인물은 권맹손(權孟孫), 조혜(趙惠), 김세민(金世敏), 이사임(李思任), 강맹경(姜孟卿), 정척(鄭陟) 등 6명이었다.
인가 철거, 소송 업무 처리까지
조선전기의 판한성부사라는 직함은 1466년(세조 12)에 이루어진 관제 개편으로 한성부 윤(尹)으로 바뀌었다. 예종 때인 1469년(예종 1) 6월 29일에는 다시 한성부윤을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개칭하였다. 한성부 판윤, 한성판윤과 함께 경조윤(京兆尹)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경(京)은 서울, 조(兆)는 많은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수도(首都)를 의미한다.
한성부판윤으로 처음 기록된 인물은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를 받는 서거정(徐居正)으로, 명칭 개편 4일 후인 1469년 7월 3일에 임명되었다. 서거정은 20여 일 동안 판윤 직책을 수행하였고, 7월 26일에 어세공(魚世恭)이 후임으로 왔다. 1474년(성종 5) 윤6월의 실록에는 한성부 판윤 권감(權瑊)이 “경성(京城) 안의 4면 산기슭에는 인가를 많이 지어, 풍수(風水)의 금기(禁忌)를 범하고 또 궁궐을 가깝게 위압하고 있으니, 청컨대 풍수학 책임자와 더불어 살피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른 기록이 보이는데, 당시에도 산기슭에 무분별하게 집을 짓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 당시 한성부의 주요 업무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판윤의 직책을 거친 후 사망한 인물 중, 사후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도 있었다. 성종 때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연산군 때 사망한 어세겸(魚世謙)이 졸기에는 “공무에는 부지런하지 못하여 일찍이 한성판윤으로 있을 적에 해가 한낮이 되어서 출근하므로 오고당상(午鼓堂上:정오 무렵 치던 북)이란 조롱이 있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서울시장 늦은 시간에 출근한 그의 행적은 두고두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명종 때 한성판윤을 지냈던 신희복(愼希復)의 졸기에는 “일찍이 한성판윤으로 있을 적에 아전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올리면 가부를 결정하는 바가 없고 머리만 끄덕일 뿐이니, 당시 사람들이 ‘눈금 없는 저울(無星之稱)’에 비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성부는 조선 전기부터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로 불리며, 행정 업무와 함께 사법 업무도 수행하였다. 도성 안팎에서 발견된 시신의 검시(檢屍)도 한성부의 몫이었다. 한성판윤에게 가장 힘든 업무는 송사의 처리였다. 중종 때 한성판윤의 사직을 청하면서 올린 서지(徐祉)의 계(啓)는 조선시대 서울시장의 고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한성부판윤으로 처음 기록된 인물은 조선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를 받는 서거정(徐居正)으로, 명칭 개편 4일 후인 1469년 7월 3일에 임명되었다. 서거정은 20여 일 동안 판윤 직책을 수행하였고, 7월 26일에 어세공(魚世恭)이 후임으로 왔다. 1474년(성종 5) 윤6월의 실록에는 한성부 판윤 권감(權瑊)이 “경성(京城) 안의 4면 산기슭에는 인가를 많이 지어, 풍수(風水)의 금기(禁忌)를 범하고 또 궁궐을 가깝게 위압하고 있으니, 청컨대 풍수학 책임자와 더불어 살피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른 기록이 보이는데, 당시에도 산기슭에 무분별하게 집을 짓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 당시 한성부의 주요 업무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판윤의 직책을 거친 후 사망한 인물 중, 사후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도 있었다. 성종 때 여러 요직을 지내다가 연산군 때 사망한 어세겸(魚世謙)이 졸기에는 “공무에는 부지런하지 못하여 일찍이 한성판윤으로 있을 적에 해가 한낮이 되어서 출근하므로 오고당상(午鼓堂上:정오 무렵 치던 북)이란 조롱이 있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서울시장 늦은 시간에 출근한 그의 행적은 두고두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명종 때 한성판윤을 지냈던 신희복(愼希復)의 졸기에는 “일찍이 한성판윤으로 있을 적에 아전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올리면 가부를 결정하는 바가 없고 머리만 끄덕일 뿐이니, 당시 사람들이 ‘눈금 없는 저울(無星之稱)’에 비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성부는 조선 전기부터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로 불리며, 행정 업무와 함께 사법 업무도 수행하였다. 도성 안팎에서 발견된 시신의 검시(檢屍)도 한성부의 몫이었다. 한성판윤에게 가장 힘든 업무는 송사의 처리였다. 중종 때 한성판윤의 사직을 청하면서 올린 서지(徐祉)의 계(啓)는 조선시대 서울시장의 고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한양도성
“한성부에 송사하는 사람은 다른 관서에 송사하는 사람과는 달라서 한 치의 땅을 다투어 송사를 일으킵니다. 사대부라 하더라도 이기지 못하면 말이 없지 아니한데 무지한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시비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오만한 말이 많습니다. … 송사를 판결함에 있어서는 인정이나 법으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잘못이 없을 수가 없는데, 소송하는 사람이 억울할 경우 반드시 담당 관리가 바뀐 다음에야 다시 소송하여 뜻을 펴게 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니 신을 체직시켜 주십시오.”
소송 때문에 사직을 스스로 원하는 사례까지 보면, 조선시대 한성판윤의 직책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송 때문에 사직을 스스로 원하는 사례까지 보면, 조선시대 한성판윤의 직책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