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낙엽을 타고…가을밤 서울에서 만난 '유럽영화제'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25.11.13. 16:03

수정일 2025.11.13. 16:03

조회 3,483

‘제11회 유럽영화제’가 막을 열었다. ©이선미
‘제11회 유럽영화제’가 막을 열었다. ©이선미
11월 7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제11회 유럽영화제’가 막을 열었다. 2015년 EU회원국 다섯 나라의 협력으로 시작된 이 영화제는 올해 22개국이 참여해 11월 한 달 동안 풍성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개막일이다 보니 서울역박물관이 북적였다. 참가국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조촐한 개막식도 이어졌다. ☞ [관련 기사] 영화로 만나는 유럽! 역대 최대 '유럽영화제' 무료 상영
‘위태로운 시대, 그리고 우리 이야기’라는 주제로 마련된 올해 영화제의 태그를 보면 ‘가족, 생태, 로맨스, 우정’ 같은 요소도 있지만 한결 많은 작품이 ‘정치, 전쟁, 역사, 공동체, 실화, 난민’ 등을 담고 있다. 개막작인 핀란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태그는 ‘도시의 우울, 외로움, 사랑’ 등이었다.
올해 유럽영화제 상영작은 정치, 전쟁, 역사, 공동체, 실화, 난민 등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 ©이선미
올해 유럽영화제 상영작은 정치, 전쟁, 역사, 공동체, 실화, 난민 등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 ©이선미
상영 시간인 7시가 가까워지자 야주개홀의 문이 열리고 관람객들이 줄이어 입장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야주개홀에도 처음 들어가 봤다. 수많은 내외국인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많은 시민들이 유럽영화제를 찾았다. ©이선미
많은 시민들이 유럽영화제를 찾았다. ©이선미
영화 상영 전, 스크린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 대한 소개와 현재 전시가 안내되었다. ©이선미
영화 상영 전, 스크린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 대한 소개와 현재 전시가 안내되었다. ©이선미
객석의 불이 꺼지고 주한 핀란드 대사가 무대에 올라 상영작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모든 영화의 상영 전에 약 10분 정도 이렇게 안내와 인사가 있을 거라고 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디지털 연결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이 영화는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인간적인 것과 사람들 사이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며 기술로는 대체할 수 없는 것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함께 나누는 고독 등에 대해서요.”

그는 ‘시수’라는 단어를 소개했다. “핀란드에는 시수(sisu)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힘을 뜻하지요. 주인공 안사와 홀라파는 그런 시수를 가진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인내와 끈기는 핀란드적인 정서를 보여줍니다.”
핀란드 대사가 무대에 올라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대해 짧은 소개를 해주었다. ©이선미
핀란드 대사가 무대에 올라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대해 짧은 소개를 해주었다. ©이선미
감독이 자신의 초기작인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연장선에서 찍은 작품이라고 밝혔듯이 시작부터 소음과 분진으로 번잡한 공사장을 비추고 마트가 배경이 된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지만, 주인공들은 하루 세 끼도 챙겨 먹기 어려울 만큼 빈곤하다. 복지국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인데 그처럼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구형 전화기를 쓰고,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고, 커다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여러 차례 등장하는 라디오신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련 뉴스가 나왔다. 분명히 2020년 이후인데 영화는 내내 <응답하라> 시리즈 같았다.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주인공들의 외로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적나라하게 토로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백마 탄 왕자는커녕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만큼 답답한 홀라파지만, 안사는 그에게 마음이 끌린다. “당신은 좋지만 술꾼은 싫어요”라고 했던 안사는 마침내 그가 죽을 힘으로 새롭게 일어나려고 하자 마음으로부터 아주 사랑스러운 윙크를 던진다. 
가진 게 너무나 없는 고단한 삶에서도 사랑은 언제나 가능하고 언제나 필요하다. ©유럽영화제 팸플릿
가진 게 너무나 없는 고단한 삶에서도 사랑은 언제나 가능하고 언제나 필요하다. ©유럽영화제 팸플릿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를 다루지만 객석에서는 가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결말도 괜찮았다. 그들은 뚜벅뚜벅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갔다. 유기견이었던 채플린과 함께! 주인공들이 ‘시수’를 가진 인물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어쩌면 ‘위태로운 시대, 그리고 우리 이야기’ 속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의 어려움에도 개인의 어려움에도 ‘시수’가 필요하다.
야주개홀 입구에 상영작 국가의 국기와 유럽연합기, 우리 태극기가 놓여 있다. ©이선미
야주개홀 입구에 상영작 국가의 국기와 유럽연합기, 우리 태극기가 놓여 있다. ©이선미
‘제11회 유럽영화제’는 11월 내내 진행된다. ©이선미
‘제11회 유럽영화제’는 11월 내내 진행된다. ©이선미
영화의 제목이 '사랑은 신록을 타고'가 아니고 ‘사랑은 낙엽을 타고’다. 일반적으로 봄날의 신록이 희망으로 가득하다면, 가을의 낙엽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마지막, 뒷모습, 끝, 이별을 말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기서 ‘낙엽’에 또 다른 해석을 덧붙여주는 것 같다. 낙엽이 져야만 봄날 새 잎이 돋는다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어도 애써 딱지를 떼려고 하지 말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그러니 가을에도, 낙엽을 타고 오는 사랑에도 불안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보는 게 어떻냐고. 그렇게 알아듣고 싶어졌다. 관객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은 걸 보니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밝았다. ©이선미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밝았다. ©이선미
‘제11회 유럽영화제’는 11월 내내 이어진다. 핀란드를 시작으로 스페인, 에스토니아, 폴란드 등 서유럽과 발칸유럽,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온 22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영화가 낙엽을 타고’ 지금 우리에게 왔다. 우리 시대의 위태로운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미래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감하며 어떤 답을, 궁리를 해볼 수도 있는 시간, 깊어가는 가을날 유럽영화제를 추천한다.

제11회 유럽영화제

○ 주제 : 위태로운 시대, 그리고 우리 이야기
○ 기간 : 11월 7일~30일
○ 장소: 서울역사박물관(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야주개홀
○ 일정 : 서울역사박물관 공지사항 참조

시민기자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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