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 이렇게 다리가 많다고? 22개 다리마다 숨은 역사문화 이야기
발행일 2025.09.12. 09:44

청계천 꿈 새김판에 설치된 글 '청계천 새 물맞이에 부쳐' ©최용수
"서울이여/ 600년 역사와 문화를 면면히 이어온 / 자랑스런 땅이여 / 다가올 날의 번영을 누리라 / 시민의 가슴으로 열어가는 / 감동과 희망을 온 세계에 전하라 / 서울이여 영원하라."
2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맑은 물과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갯버들과 창포 철새들이 다시 돌아올 수변을 그리며 청계천 ‘소망의 벽’에 새겨 놓은 '청계천 새 물맞이에 부쳐'라는 글의 일부이다. 청계천에 맑은 물이 다시 흐른 것은 47년 만의 일이다.
2년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맑은 물과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갯버들과 창포 철새들이 다시 돌아올 수변을 그리며 청계천 ‘소망의 벽’에 새겨 놓은 '청계천 새 물맞이에 부쳐'라는 글의 일부이다. 청계천에 맑은 물이 다시 흐른 것은 47년 만의 일이다.
“서울을 떠올리면 당신의 기억 속에는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2024년 서울시민들이 서울의 랜드 마크를 묻는 질문에 대답한 ‘서울 대표 명소 2024'(출처 Graph n Chart, 서울의 랜드마크)는 한강, 고궁, 청계천, 광화문광장, 롯테월드타워, N서울타워, 시청앞광장, 남대문, DDP 등이다. 이 중 서울의 유구한 역사와 현대를 아우르는 랜드 마크 하나를 추천하라면 단연 '청계천'이다.

서울의 랜드마크 청계천 상류 시작점 청계광장과 종탑 일대 모습 ©최용수
청계천은 조선의 한양 도읍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연 하천이었지만 한양의 배수 시스템 역할을 맡았고, 생활하수와 빗물을 처리했다. 그러나 잦은 범람으로 태종과 영조 때 준설 및 정비가 지속되었고, 세종은 홍수 방지를 위해 수표(수위측정기)를 설치했다. 해방 후에는 도시 위생과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1958~1977까지 복개 공사를 하고 그 위에 도로와 고가도로를 건설했다.
하지만 복개도로와 청계천고가도로의 노후화와 안전문제가 대두되어 2003년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 10월 지금의 청계천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하지만 복개도로와 청계천고가도로의 노후화와 안전문제가 대두되어 2003년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 10월 지금의 청계천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1천만 시민들의 소망을 담은 청계천 소망의 벽 ©최용수
역사와 문화를 품은 청계천 다리 이야기
복원된 청계천은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부까지 총 5.84km의 수변 산책길이 조성되었다. 또한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남북을 연결해 주고 있다. 이 중 광통교 등 7개는 조선 시대 건설된 다리이고, 나머지 15개는 해방 이후 다리들이다. 옛 다리는 다리마다 고유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반면, 현대의 다리들은 미래를 향한 서울의 변화와 희망을 보여준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은 청계천의 다리, 그 숨은 이야기를 찾아 산책을 나선다.

조선 초 궁궐의 권력 다툼과 왕가의 비정한 가족사를 말해주고 있는 광통교 ©최용수
① 조선 초 권력 다툼과 비극적인 가족사 엿볼 수 있는 '광통교(廣通橋)'
청계광장에서 두 번째 다리가 광통교이다. 한양의 최대 번화가에 세워진 다리로서 정월 대보름에는 답교놀이가 펼쳐졌다. 태조 때 최초로 흙다리로 만들어졌으나 홍수로 무너지자 태종이 돌다리(석교(石橋)로 다시 세웠다. 이때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에서 병풍석, 난간석 등 묘석을 가져와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 훗날 사람들이 신덕왕후 무덤의 돌을 밟으며 오가도록 함으로써 계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표현했다.
청계천을 산책한다면 광통교 아래에서 잠시 멈춰 태종이 거꾸로 박은 신장석(神將石)을 찾아보며 당시 조선 왕실의 권력 다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산책의 재미를 더해 줄 것 같다.
청계천을 산책한다면 광통교 아래에서 잠시 멈춰 태종이 거꾸로 박은 신장석(神將石)을 찾아보며 당시 조선 왕실의 권력 다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산책의 재미를 더해 줄 것 같다.

태종은 신덕왕후 정릉의 석물로 광통교를 복원하여 뭇사람들이 밟도록 했다(동그랗게 표시된 부분은 거꾸로 박힌 신장석 모습). ©최용수

청계천은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이자 도심 걷기의 최고의 명소이다. ©최용수
② 조선의 물 관리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수표교(水標橋)'
수표교는 청계광장에서부터 여섯 번째 다리이다. 원래는 마전교라 불렸으나 세종 때 다리 옆에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를 세운 이후부터 수표교(水標橋)라 불리게 되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른다. 청계천 다리 중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화강암을 짜맞춰 놓은 것으로 연꽃봉오리, 연잎 등을 주제로 한 난간 조각은 매우 아름답다.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했다. 조선의 물 관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다리이다.

세종대왕 측우기와 함께 대표적 조선의 물 관리 기술 징표인 청계천 수표교 ©최용수

청둥오리와 잉어떼가 더불어 노닐고 있는 복원된 청계천의 자연생태계 모습 ©최용수
③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간직한 '영도교(永渡橋)'
청계천 상류에서 열일곱 번째 다리이다. 1457년 조선 6대 왕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왕비인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와 단종과 슬픈 이별을 했다하여 ‘영영 이별한 다리’ ‘영영 건넌 다리’라 불리다가 영도교(永渡橋)가 되었다. 현재의 영도교는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새롭게 건설된 다리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해서일까, 영도교를 보노라면 이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헤어진 장소인 영도교 ©최용수

동서남북 인도 진입부에 큰 적벽돌 기둥과 철제 전통문살 구조물을 설치한 마전교 ©최용수
④ 다섯 개의 수문이 있어 붙여진 '오간수교(五間水橋)'
한양도성의 수문이었던 ‘오간수문’의 자리에 세워진 다리이다. 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잇는 성벽 아래 다섯 개의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있어서 '오간수문'으로 불렸다. 도성 안 청계천 물길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사라졌다가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 발견된 유적을 토대로 2004년 현재의 위치에 재현했다. 다리 옆 벽면에는 옛 오간수문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조선시대 물 관리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시설이 바로 오간수문과 수표교이다.

오간수문 인근 청계천에서 만난 조선시대 오간수문의 형태와 유사한 수문 ©최용수
이 외에도 청계천에는 조선 시대에 건설되었던 모전교, 장통교, 마전교가 있다. 청계천 산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다리들이다.

청계천 22개 다리 중 첫 번째 다리인 모전교 ©최용수
현대의 의미를 더해 새롭게 태어난 15개의 청계천 다리
청계천 복원사업은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때 건설된 청계천의 다리는 옛 이름과 역사, 지역의 의미를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다. 복원 공사로 새롭게 태어난 15개의 청계천 다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청계천 복원이라는 중요한 도시변화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복원한 청계천 판잣집 ©최용수
⑤ 전태일 열사의 헌신을 기리는 '버들다리'(일명 전태일다리)
종로구와 중구를 잇는 청계천의 열세 번째 다리이다.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아 ‘버들다리’란 이름이 붙여졌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평화시장 근처에 있다. 2010년, 다리 중앙에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 흉상이 세워지면서 서울시는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로 다리 명칭을 병기하기로 결정했다. 주변 도로 바닥에는 열사를 기리는 시민들의 메시지가 담긴 동판이 있고, 인근에는 전태일 기념관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며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청계천 나들이를 간다면 버들다리(전태일다리) 인근에 있는 전태일 기념관 관람도 추천한다. ©최용수
⑥ 조선 시대 무학대사 설화에서 유래한 '무학교(無學橋)'
건국 초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던 중 왕십리까지 왔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도로인 ‘무학로’가 인근에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 때 이곳에 다리를 놓고 무학로에서 이름을 따와서 '무학교'라 이름 지었다. 다리 하단에 수위조절용 아치형(한옥대문) 수문이 있다. 청계천 가운데 물길에는 청계고가도로 존치교각 3개가 남아 있다. 존치교각은 청계천 복원이라는 중요한 도시변화의 역사를 기념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상징물로 가치를 지닌다.

청계천 복원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남겨 둔 3개의 존치교각,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다. ©최용수
⑦ 청계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만나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두물다리’
‘두물다리’는 용두2동과 마장동을 연결하는 청계천의 스물한 번째 다리이다. 청계천 복원공사 때 건설한 다리로, 청계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이곳에서 만난다. 다리 상판은 회오리 같은 2개의 곡선 모양으로 두 물줄기의 만남을 형상화했다. 청계천 다리 중 유일한 사장교로서 두 물이 만나듯 커플들의 프로포즈 장소로 입소문 난 곳이다. ‘청혼의 벽’이 있고, 동남쪽에는 청계천박물관, 재현된 청계천 판잣집이 있다.

청계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만나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두물다리 ©최용수
⑧ 청계천의 마지막 다리 '고산자교(古山子橋)'
용두동과 마장동을 연결하는 스물두 번째 다리이자 청계천 마지막 다리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 ‘고산자’에서 이름을 따온 고산자로가 다리 위로 지나간다. 내부순환도로 밑에 있으며 2004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건설되었다. 하천에는 버들습지가 있어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청계천 22개 다리 중 마지막 다리인 고산자교, 내부순환도로 아래 있다. ©최용수
이외에도 복원공사 때 건설된 다리는 11개나 더 있다. 삼일운동 정신을 담은 ‘삼일교’, 세운상가에서 이름을 빌린 ‘세운교’, 일제 때 건설한 ‘관수교’,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의 새벽시장 활기를 기원하는 ‘새벽다리’, 동대문 의류시장의 비상을 염원하는 ‘나래교’, 광교, 배오개다리, 맑은내다리, 다산교, 황학교, 비우당교가 그들이다.

광장시장의 천막을 형상화한 형태의 새벽다리 ©최용수
청계천 다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로서 서울 시민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청계천에 가게 된다면 청계천 22개 다리 하나하나가 간직한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챙기며 산책한다면 또 다른 별미가 될 것이다. 도심 속 열섬현상 완화와 하천의 자연성 회복, 도심 속 휴식처 제공은 물론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청계천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청계천 시작점인 청계광장 종탑 모습, 가을이 와서 청계천 걷기 좋다. ©최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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