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강뷰 맛집은 어디? 흥미로운 한강변 정자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7.09. 14:48

한강은 풍광도 뛰어났던 만큼 조선초기부터 왕실과 개인의 정자들이 세워졌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0) 조선시대 정자들
지난 7월 2일 한강버스를 탑승할 기회를 가졌다. 9월로 예정된 한강버스의 본격적인 운행에 앞서, 미리 여러 상황을 준비해 보는 시간에 참여하였다. 전통시대 한강은 최고의 교통로로 자리를 잡았다. 1394년 7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로 결정된 데는 네 곳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과 함께 한강의 물길이 지나간다는 점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한강 주변에는 세금을 보관하는 용산창, 광흥창 큰 창고들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원을 마련했다. 한강은 풍광도 뛰어났던 만큼 조선초기부터 왕실과 개인의 정자들이 세워졌다.
한강의 물길, 서울을 관통하다
1394년 10월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이곳의 형세를 살펴보니 왕자(王者)의 도읍이 될 만하다. 더구나 조운(漕運)이 통하고 사방의 이수(里數)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고 말한 것은 한양의 가치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강과 서해를 활용한 세곡의 운송은 한양이 수도로 될 수 있는 데 있어서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누어진 물길은 양수리 부근에서 합쳐져, 한강이 된다. 한강은 팔당, 덕소, 하남 등 경기도 지역을 거쳐, 서울을 관통하게 된다. 한강이 서울을 관통하는 데 있어서 관문이 되는 곳은 광진구 일대이다. 현재의 광진교 아래 지역부터, 양화대교 부근의 양화나루까지의 한강 구간을 ‘경강(京江)’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알 수가 있다.
한강에는 일찍부터 북쪽과 남쪽을 배로 연결시켜 주는 나루들이 있었다. 광나루, 삼밭나루, 서빙고 나루, 동작 나루, 노들나루, 삼개(마포) 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나루가 있던 지역에 광진교, 동작대교, 한강대교, 서강대교, 양화대교 등이 설치된 것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 교통의 요지임을 짐작하게 한다.
‘서울 교통의 새로운 물결’ 한강버스는 9월부터 운행하는데, 마곡, 망원, 여의도, 압구정, 옥수, 뚝섬, 잠실의 7개 구간이다. 이들 구간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의 가장 주요한 구간들이다. 한강 곳곳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전통시대부터 왕실과 개인이 세운 정자들이 있었다. 낙천정, 화양정, 제천정, 망원정은 왕실에서 세운 정자였고, 압구정, 천일정, 추흥정, 담담정 등은 개인이 세운 대표적인 정자였다.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누어진 물길은 양수리 부근에서 합쳐져, 한강이 된다. 한강은 팔당, 덕소, 하남 등 경기도 지역을 거쳐, 서울을 관통하게 된다. 한강이 서울을 관통하는 데 있어서 관문이 되는 곳은 광진구 일대이다. 현재의 광진교 아래 지역부터, 양화대교 부근의 양화나루까지의 한강 구간을 ‘경강(京江)’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알 수가 있다.
한강에는 일찍부터 북쪽과 남쪽을 배로 연결시켜 주는 나루들이 있었다. 광나루, 삼밭나루, 서빙고 나루, 동작 나루, 노들나루, 삼개(마포) 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나루가 있던 지역에 광진교, 동작대교, 한강대교, 서강대교, 양화대교 등이 설치된 것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곳이 교통의 요지임을 짐작하게 한다.
‘서울 교통의 새로운 물결’ 한강버스는 9월부터 운행하는데, 마곡, 망원, 여의도, 압구정, 옥수, 뚝섬, 잠실의 7개 구간이다. 이들 구간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의 가장 주요한 구간들이다. 한강 곳곳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전통시대부터 왕실과 개인이 세운 정자들이 있었다. 낙천정, 화양정, 제천정, 망원정은 왕실에서 세운 정자였고, 압구정, 천일정, 추흥정, 담담정 등은 개인이 세운 대표적인 정자였다.

9월부터 한강버스가 정식 운항을 시작한다.
태종이 즐겨 찾은 정자 낙천정
낙천정(樂天亭)은 태종의 지시로 한강 북쪽 현재의 잠실대교 서쪽에 대산(臺山)이라고 불리던 44미터 정도의 야산에 세웠던 정자이다. 지금은 평지로 변했지만, 살짝 솟은 지역에 위치하여 한강을 조망하기 좋았다.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을 때인 1419년 광진 주변에 정자를 짓고 ‘낙천(樂天)’이라 이름하였다.
낙천정의 유래에 관한 내용들은 변계량(卞季良)이 쓴 「낙천정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변계량은 먼저 태종이 낙천정을 짓게 하고 자신에게 기문을 쓰게 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기문은 “낙천정은 우리 상왕(태종) 전하께서 때때로 유람하시는 곳이다. 전하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세종)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시고, 이에 농한기에 동교(東郊)에 거둥하시어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고 둥그스레한 모양이 가마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름이 대산(臺山)이다. 거기에 올라서 사방을 돌아보니 큰 강과 둘러싼 연못이 얽힌 채 넘실대며 흐르는데, 연이은 봉우리와 겹쳐진 멧부리가 차례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 언덕을 고리처럼 둘러 조회(朝會)하는 듯하고 뭇 별이 북쪽을 둘러싼 듯하여, 과연 하늘이 만든 훌륭한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19년(세종1) 4월 2일 『세종실록』에는 “상왕(태종)이 노상왕(정종)과 더불어 동교(東郊)에 나가 매사냥을 구경하는데, 임금(세종)도 시종하여 낙천정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여름 잔치에 쓰는 익은 고기로 찬을 장만하여 호종한 종척과 대신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태종과 세종이 낙천정에서 함께 잔치를 베풀며 부자의 정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낙천정은 대마도 정벌이 결정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추진한 대마도 정벌은 세종이 왕으로 있던 시기, 상왕 태종이 주도한 사업이었다. 태종과 세종은 낙천정에 머물면서 왜구 토벌을 논의했고, 1419년 5월 13일 한강 상류에서 누선(樓船)을 띄워 화포의 시험 발사를 했다. 5월 18일에는 두뭇개 백사정(白沙亭)까지 나가, 도체찰사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원정군을 환송했다.
낙천정의 유래에 관한 내용들은 변계량(卞季良)이 쓴 「낙천정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변계량은 먼저 태종이 낙천정을 짓게 하고 자신에게 기문을 쓰게 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기문은 “낙천정은 우리 상왕(태종) 전하께서 때때로 유람하시는 곳이다. 전하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세종)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 주시고, 이에 농한기에 동교(東郊)에 거둥하시어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고 둥그스레한 모양이 가마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름이 대산(臺山)이다. 거기에 올라서 사방을 돌아보니 큰 강과 둘러싼 연못이 얽힌 채 넘실대며 흐르는데, 연이은 봉우리와 겹쳐진 멧부리가 차례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 언덕을 고리처럼 둘러 조회(朝會)하는 듯하고 뭇 별이 북쪽을 둘러싼 듯하여, 과연 하늘이 만든 훌륭한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19년(세종1) 4월 2일 『세종실록』에는 “상왕(태종)이 노상왕(정종)과 더불어 동교(東郊)에 나가 매사냥을 구경하는데, 임금(세종)도 시종하여 낙천정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여름 잔치에 쓰는 익은 고기로 찬을 장만하여 호종한 종척과 대신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는 내용이 보인다. 태종과 세종이 낙천정에서 함께 잔치를 베풀며 부자의 정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낙천정은 대마도 정벌이 결정된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추진한 대마도 정벌은 세종이 왕으로 있던 시기, 상왕 태종이 주도한 사업이었다. 태종과 세종은 낙천정에 머물면서 왜구 토벌을 논의했고, 1419년 5월 13일 한강 상류에서 누선(樓船)을 띄워 화포의 시험 발사를 했다. 5월 18일에는 두뭇개 백사정(白沙亭)까지 나가, 도체찰사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원정군을 환송했다.

희우정은 월산대군의 소유가 된 후에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망원정과 제천정
현재의 서강대교 쪽에는 망원정이 있었다. 1425년(세종 7) 5월 13일의 『세종실록』에는, “왕(세종)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였을 때에 밀과 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기쁜 빛을 띠고 정자 위에 올라 막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큰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사방 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고 하고 있다. 희우정은 세종, 세조, 성종 등 역대 왕들이 방문하여 전함을 살펴보고 화포 쏘기와 수전(水戰)을 관람하는 등 왕이 군사력을 점검하는 주요한 장소가 되기도 했다.
희우정은 처음에 효령대군의 별장이었으나, 뒤에 월산대군(月山大君:성종의 형)의 소유가 된 후에는 이름이 ‘망원정(望遠亭)’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마포구 망원동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월산대군은 한강을 따라 망원정을 오가며 도처에서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서거정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으로 이들 시에는 양화나루, 제천정, 마포, 남산 등 한강 주변의 명승지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희우정은 처음에 효령대군의 별장이었으나, 뒤에 월산대군(月山大君:성종의 형)의 소유가 된 후에는 이름이 ‘망원정(望遠亭)’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마포구 망원동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월산대군은 한강을 따라 망원정을 오가며 도처에서 시를 지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서거정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으로 이들 시에는 양화나루, 제천정, 마포, 남산 등 한강 주변의 명승지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자에서 바라본 한강
현재의 한남대교 근처에는 세조 때 지은 정자인 제천정(濟川亭)이 있었다. 제천정은 세조 때부터 명종 때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의 정자들 중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제천정을 특히 즐겨 찾은 왕은 성종이다. 성종은 ‘제천완월(濟川翫月;제천정에서의 달구경)’이라 하여, 한성십영(漢城十詠: 성종 때 한성을 대표하던 열 가지 볼거리)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제천정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였다. 1459년(세종 5) 4월 10일 『세조실록』의 “왕이 제천정에 올라서 현판에 쓴 시들을 두루 살펴보고는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다례(茶禮)를 행하고 배를 타고 물 위에 띄웠다. 도감(都監)에서 잔치를 베풀고 사옹방(司饔房)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올리니 명나라 사신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강물을 따라 내려와서 용산강(龍山江)에 이르니 윤자운 등이 특별히 준비한 찐 양고기, 돼지, 기러기, 오리를 제공하였다.”는 기록에서는 제천정에서 명나라 사신들과 어울렸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인다.

제천정은 한강변 정자들 중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단종이 마지막 머물렀던 정자, 화양정
조선시대의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의 한성부 누정(樓亭) 항목에는 “화양정이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다. 원래 태복시(太僕寺)의 목장인데, 세종 14년(1432년)에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사눌(柳思訥)의 「화양정기」에는 화양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산(華山:북한산)의 동쪽이요, 한수(漢水:한강) 북쪽에 들이 있으니 땅이 펑퍼짐하고 넓어서 그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나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연못이 드리웠다.’고 하여 화양정의 위치에 대해 먼저 소개하고 있다.
이어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당초에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는데, 임자년(1432년)에 주상전하(세종)께서 사복시 제조 판중추부사 최윤덕(崔潤德)과 이조판서 정연(鄭淵)에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다.’고 하여, 원래 목장이 있던 곳에 세종의 지시로 화양정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화양정이라고 이름을 지은 유래에 대해서는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라고 한 글귀의 뜻을 따서 정자 이름을 ‘화양’이라고 했음을 밝히고 있다.
화양정은 단종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1455년 세조에 의해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1457년 6월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단종은 부인 정순왕후와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에서, 이별을 하고 화양정 쪽으로 왔다. ‘영도교’라는 다리 이름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을 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화양정은 회행정(回行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단종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화양정은 말 떼들이 넓은 들을 누비며 풀을 뜯는 평화로운 정경을 지닌 곳이었지만, 단종이 유배를 떠난 서울의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였다. 화양정이 있었던 곳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일대로, 현재 이곳에는 화양동 주민센터와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이어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당초에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는데, 임자년(1432년)에 주상전하(세종)께서 사복시 제조 판중추부사 최윤덕(崔潤德)과 이조판서 정연(鄭淵)에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다.’고 하여, 원래 목장이 있던 곳에 세종의 지시로 화양정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화양정이라고 이름을 지은 유래에 대해서는 『주서(周書)』 가운데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라고 한 글귀의 뜻을 따서 정자 이름을 ‘화양’이라고 했음을 밝히고 있다.
화양정은 단종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1455년 세조에 의해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1457년 6월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단종은 부인 정순왕후와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에서, 이별을 하고 화양정 쪽으로 왔다. ‘영도교’라는 다리 이름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을 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화양정은 회행정(回行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단종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화양정은 말 떼들이 넓은 들을 누비며 풀을 뜯는 평화로운 정경을 지닌 곳이었지만, 단종이 유배를 떠난 서울의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였다. 화양정이 있었던 곳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일대로, 현재 이곳에는 화양동 주민센터와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가 있다.

압구정이 있던 곳에는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압구정, 한명회의 영예와 추락의 공간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성종의 장인 한명회(韓明澮)의 권세는 더욱 커졌다. 1476년(성종 7년) 한명회는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란 이름은 명나라 사신인 예겸이 지어준 것으로서, ‘갈매기를 가까이 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당시 한강 주변에는 왕실 소유의 희우정이나 제천정 등만 있었음을 고려하면, 최고의 조망을 가진 곳에 정자를 세웠던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이 어떠했던 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1481년(성종 12) 6월의 일이었다. 압구정의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성종을 통해 압구정 관람을 청하였다. 성종의 지시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거절의 뜻을 보였고, 왕의 뜻을 거역하는 장인 한명회의 태도에 성종은 분노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보내주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결국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압구정은 한때 한명회 권력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왕도 무시한 정치적 행태는 그의 몰락을 가져온 공간이 되어 버렸다. 압구정의 모습은 정선이 양천현령 시절에 그린 「압구정(狎鷗亭)」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데, 현재는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1481년(성종 12) 6월의 일이었다. 압구정의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성종을 통해 압구정 관람을 청하였다. 성종의 지시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거절의 뜻을 보였고, 왕의 뜻을 거역하는 장인 한명회의 태도에 성종은 분노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보내주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결국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압구정은 한때 한명회 권력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왕도 무시한 정치적 행태는 그의 몰락을 가져온 공간이 되어 버렸다. 압구정의 모습은 정선이 양천현령 시절에 그린 「압구정(狎鷗亭)」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데, 현재는 강남을 대표하는 아파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강버스가 망원정, 제천정, 낙천정, 압구정을 지날 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2025년 9월, 한강버스가 망원정, 제천정, 낙천정, 압구정을 지날 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정선이 그린 「압구정」, 「송파진」, 「양화진」, 「목멱조돈(남산의 일출)」 등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제3한강교’, ‘비 내리는 영동교’ 등 한강 다리를 묘사한 노래들도 퍼지면 한강버스를 타는 기분도 더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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