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고 뺏기고 하마터면 사라질 뻔! '조선왕조실록' 수난사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6.25. 15:50

수정일 2025.06.27. 17:43

조회 1,820

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국가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국가기록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9) 조선왕조실록

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오는데, 문화재의 소실 또한 적지 않았다.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1592년의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 때도 실록은 큰 수난을 당하였다. 실록의 편찬과 보관, 그리고 전쟁을 겪은 시기 실록의 수난사와 이를 지켜 온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실록의 편찬과 보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太祖)로부터 25대 철종(哲宗)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1973년 국보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실록은 역대 왕의 사후에 전 왕대의 실록이 편찬되는 방식을 취하였다. 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겸직하면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시정기는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 받아 춘추관에서 그 중 중요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 『춘추관일기』, 『의정부등록』, 『승정원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매년 책으로 편집하여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보관된 시정기는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책은 편찬이 완료되면 왕에게 바쳤지만 실록은 예외였다. 편찬의 완성만을 책임자인 총재관이 왕에게 보고한 후 춘추관에서 봉안(奉安) 의식을 가진 후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왕의 열람을 허용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사실(史實)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씻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씻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관(史官)이라 칭하였다. 예문관의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으로서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8명의 한림(사관)은 왕이 주재하는 회의나 행사에 배석하여 사초를 작성하고, 실록의 봉안과 포쇄(曝曬:실록을 병충해나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람에 말리는 일) 작업을 수행하였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初草)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中草),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직접 보고들은 내용과 함께 자신이 판단한 논평까지를 기록하였다. 사초는 국왕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는 한편,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초초와 중초의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세초(洗草)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사초를 주로 씻던 장소가 세검정 일대의 개천이었다. 차일암(遮日巖)이라 불린 널찍한 바위에서는 물에 씻은 종이를 말렸으며, 말려진 종이는 조지서(造紙署)에서 새로운 종이로 재활용되었다. 세초를 마치면 축하 행사인 세초연(洗草宴)이 열렸고, 공이 있는 관리들에게는 안구마(鞍具馬:안장을 갖춘 말) 등을 상으로 내렸다.
세검정초등학교 정류장에는 고급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세검정초등학교 정류장에는 고급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행한 후, 궁궐 안에 둔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1부씩을 보관하였다.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 등 지방 중심지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 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 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후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은?

1592년 임진왜란은 실록에도 최대의 위기를 가져왔다. 전주 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제외하고, 왜적의 침입 경로가 되었던 춘추관, 성주, 충주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된 것이다. 다행히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을 태인(정읍) 지역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綠)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으로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

안의와 손홍록은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긴 후에 서로 당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는데, 『임계기사』에는 이들이 헌신한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6월 22일에는 내장산 은봉암으로, 7월 14일에는 더욱 험준한 비래암으로 옮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실록을 옮긴 1592년 6월 22일을 기념하여, 국가유산청에서는 2018년부터 매해 6월 22일을 ‘문화재 지킴이의 날’로 지정하여, 실록을 지킨 의미를 후대에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경험하면서, 실록을 험준한 산간 지역에 보관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조선전기에도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지방의 중심지는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피해가 크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후기에 들어와 실록은 산으로 가게 되었다.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까지 길이 실록을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관철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전란 이후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궁궐 안 춘추관 사고를 비롯하여, 강화의 마니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경상도 봉화 태백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사고를 두었다. 지역별 안배를 한 후에 산간 지역에 사고를 설치한 것이다. 인조 때 묘향산 사고의 실록은 후금(후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 적상산으로 옮겼다.

현재 전라북도 무주군에서는 묘향산 사고의 실록을 적상산 사고로 옮긴, 실록 이안(移安) 행렬을 역사적 고증을 거친 후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강화의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조선후기 지방의 4곳 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게 했는데 전등사(정족산 사고), 안국사(적상산 사고), 각화사(태백산 사고), 월정사(오대산 사고)가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 시기 실록의 수난

일제강점 시기에 산간에 보관되었던 사고의 실록들이 모두 조선총독부에 의해 접수되었다가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적상산사고본은 이왕직(李王職:일제 강점시기 조선총독부에서 대한제국 황족의 의전 및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 소속의 도서관인 창경궁 장서각에,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1913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

해방 이후 정족산과 태백산에 보관된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적상산본 실록은 6·25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북한에 의해 반출되었다. 오대산본은 일본 동경제대에 보관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788책의 실록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70여책이 화를 면하였고,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다. 동경대에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47책은 정부와 문화계 등의 노력으로 2006년 93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경대에서 서울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돌려받은 후, 서울대를 거쳐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산하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했다.

2017년에는 일본 경매에 등장한 ‘효종실록’ 1책을 국립고궁박물관이 추가로 사들여 오대산본 실록의 총수는 75책이 되었다. 고궁박물관에서 오대산본을 보관한 이후에도 원래 실록이 있었던 오대산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논의들이 꾸준히 진행되었고, 2023년 오대산본 실록은 월정사에 위치한 조선왕조실록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평창 오대산사고 전경
평창 오대산사고 전경

6·25 전쟁과 북한으로 간 적상산본 실록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6.25 전쟁은 실록의 보관에도 큰 위기를 가져왔다. 6월 28일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우리의 국가유산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실록은 북한으로 가져야 할 최고의 기록물로 파악되었다. 동경제대로 반출된 오대산본 이외에 당시 대한민국에는 서울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그리고 창경궁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는 적상산본 등 3건의 실록이 있었다. 북한군이 서울 점령 시 실록을 노리고 있음을 파악한 서울대학교에서는 당시 도서관에 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실록을 급하게 포장하여 임시 수도로 정해진 부산으로 이송시켰다.

현재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고에는 겉면에 ‘US ARMY’라고 쓴 군용 박스들이 남아 있는데, 전쟁 상황에서 이 박스에 실록을 담아 피난시킨 정황을 알 수 있게 한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2건의 실록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 극적으로 부산으로 옮긴 도서관 직원들의 모습은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에 있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겼던 안의와 손홍록을 연상시킨다. 한편 창경궁에 있던 적상산본 실록은 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에 의해 반출되어 평양으로 옮겨졌다.

북한에서는 6·25 때 북한으로 가져 온 적상산본을 바탕으로, 1975년 실록의 번역 사업에 착수하여, 1991년 사회과학출판사에서 400권의 『리조실록』 번역본을 발간하였다. 우리측에서는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에서 실록의 번역에 착수하여, 1994년 413책으로 완역했다.
국난에도 실록을 지켜 온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3건의 실록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은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국난에도 실록을 지켜 온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3건의 실록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은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임진왜란과 6·25 전쟁 같은 국난에도 실록을 지켜 온 사람들의 헌신으로, 현재 우리는 3건(오대산본 75책 포함)의 실록을 국내에 보유하고 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는 정족산본태백산본 2건이 있었는데, 태백산본은 1984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 지소(현재 국가기록원 부산분원)로 옮겨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던 선조들의 지혜를 계승한 것이었다.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가 고서들을 특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1990년에 세운 서울대학교 내 규장각 건물(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에 있다가, 다시 돌아온 75책의 실록은 고궁박물관을 거쳐 현재는 오대산 월정사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쟁이라는 수난의 시간들을 극복하고, 현재에 남아 있는 실록을 원형대로 보존하여, 그 의미와 가치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이제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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