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딜쿠샤 1층 거실 모습. 고풍스런 식탁 및 의자와 괘종시계, 삼층장, 식탁보, 은촛대 등 당시의 생활상을 구현해 놓았다. ©강사랑
-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 과정에 대한 전시 공간 ©강사랑
3.1절 기리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찾아…달쿠샤와 이회영기념관
발행일 2025.03.05. 08:40

종로구 행촌동에 자리한 딜쿠샤(Dilkusha), 앨버트 테일러 가옥 ©강사랑
지금으로부터 106년 전 서울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날의 함성은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조선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이 남겨졌다.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애쓴 이도 있었고, 항일 투쟁을 위해 타국을 떠돌다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이름을 찾아 딜쿠샤와 이회영기념관을 찾았다.
딜쿠샤,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쓴 어느 이방인을 기억하며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자락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저택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딜쿠샤(Dilkusha),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옛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이 집은 단순히 오래된 저택이 아니다. 아름다운 이 집에 과연 누가 살았고,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1923년 경성, 한 미국인 남자가 아내와 함께 살 집을 찾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앨버트 테일러. 금광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에서 광산을 직접 운영하고 상회를 설립하며 부를 쌓아올린 사업가였다. 그의 아내 메일 테일러는 영국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예술적 감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후 개화기 조선의 경성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서대문 밖에 있는 '작은 회색 집'에 살림을 차렸다. 행복 넘치는 신혼생활을 보내던 중, 그들은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서 마음을 잡아끄는 은행나무 고목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아내의 마음과 마찬가지였던 앨버트는 그곳의 땅을 사들였고 집을 지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지어진 이층집 딜쿠샤의 탄생이다.

딜쿠샤 뒤에 사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이른바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다. 테일러 부부는 이 나무에 반해서 근처에 살고자 했다. ©강사랑
테일러 부부는 약 20년 동안 딜쿠샤에서 화목한 삶을 꾸려나갔다. 앨버트는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매김하는 한편 AP통신의 조선 공식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통해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바로 앨버트 테일러다. 또한 수원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등 급변하는 조선의 소식을 해외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인 메리 L. 테일러에 대한 안내문 ©강사랑
테일러 부부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 되어 강제 추방되었다. 주인을 잃은 딜쿠샤는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며 사람이 살지 않는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불렸다. 우여곡절 끝에 국가의 소유가 되었지만, 건물의 역사가 확실히 규명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테일러 부부의 후손들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손녀 제니퍼 L. 테일러가 조부모의 유품을 포함한 394점을 서울시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딜쿠샤는 원형 복원되어 2019년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현재 건물 내부는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으며, 테일러 부부가 사용했던 가구와 소품들을 선보이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강사랑
1층에 들어서면 남향으로 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아늑한 거실이 펼쳐진다. 이곳은 테일러 부부가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교류하던 장소다. 거실 뒤쪽에는 벽난로가 자리하고 있어, 추운 겨울날 훈훈한 온기 속에서 사람들이 나누었던 정(情)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테일러 부부가 수집한 다양한 귀중품들을 통해 이들 가족이 누렸던 풍요로운 생활을 엿볼 수 있다. 1층의 서쪽과 동쪽 방에는 부부가 조선에 정착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테일러 가족은 조선에서 거주하면서 많은 인연을 맺었는데, 가족의 집안일과 사업을 도왔던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 중 김주사(본명 김상언)는 테일러 상회의 일을 돕던 사람으로 테일러 부부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당시의 식민지 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김주사는 오늘날 숨은 애국지사로 조명되고 있을 만큼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전문가들은 그의 존재가 앨버트 테일러의 항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테일러 부부는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당시의 식민지 현실을 알게 되었다. 오른쪽 사진에서 흰 도포를 입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김주사(김상언)이다. ©강사랑
2층은 보다 사적인 공간으로 테일러 부부가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벽난로 위에는 앨버트가 직접 수집한 고려청자가 놓여 있고, 벽면 쪽에는 조선 병풍이 복원되어 서양식 공간 안에서 동서양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자아낸다. 당시 사진을 참고해 복원한 앤티크 가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딜쿠샤 복원에 쏟은 정성이 비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층 동쪽은 앨버트의 서재와 침실이 자리한 곳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풍성하다.
2층 서쪽 방에는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 활동과 관련된 전시가 선보여 눈길을 끈다. 1919년 2월, 앨버트 부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 요람 밑에서 뜻밖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바로 간호사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숨겨놓은 독립선언문이었다. 앨버트는 독립선언문을 동생의 도움을 빌려 일본에 밀반입했고, 이후 일본 도쿄 AP통신을 통해 한국의 3.1운동을 미국 등 전 세계에 알렸다.
앨버트는 같은 해에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는 등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행보를 이어나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추방령에 거부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강제 추방 이후 미국에 거주하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쟁이 끝나자 메리는 앨버트의 유해를 안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조선에 묻히고 싶다'는 앨버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선교사묘원에 잠들어 있다.

딜쿠샤의 현재와 과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 ©강사랑
3.1 운동의 숨은 주역 앨버트 테일러. 그는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단순히 부유한 이방인으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공감하며 몸소 행동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조선은 제2의 고향이었고, 조선인은 친밀한 이웃이며 동료였다. 앨버트의 조선에 대한 애정을 생각하노라면, 딜쿠샤를 바라보는 관점도 새로워진다. 딜쿠샤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방인들의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다.
이회영기념관, 조선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
딜쿠샤에서 사직터널을 건너 골목을 따라 5분 정도 언덕길을 오르면, 흔히 볼법한 주택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낯선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햇살이 반짝이는 넓은 마당, 300살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 그리고 화강암으로 지어진 서양식 주택 너머에 100년 전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이곳은 ‘이회영기념관’ 혹은 ‘벗집’라고 불린다. 본래 개화기 선교사들이 살던 집으로 ‘사직동 묵은집’이라는 별칭도 있다. 1층 거실에 들어서면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초상화 속 여섯 형제의 얼굴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이름 아래에는 짧은 약력이 적혀 있다. 공통적인 글귀는 ‘건국훈장 수여 혹은 추서’이다. 이회영과 그의 다섯 형제들은 대부분 일제에 맞서 항일 운동을 펼치다가 타국에서 외롭게 순국했다. 한때 명동 일대의 대부분을 소유했던 조선 최고의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제의 강압으로 나라를 잃자 가문과 일신의 안녕 대신 조국 독립 투쟁의 길을 택했다.
1910년 12월의 추운 겨울, 이회영 선생과 다섯 형제들은 전재산을 처분하여 일가를 이끌로 만주로 망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칼과 총을 손에 쥔 3,500명의 독립군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은 1920년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주역이 되었다. 기념관 복도와 계단 곳곳에는 서울, 서간도, 베이징, 상하이, 다롄 등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회영 선생의 육필 편지를 최초 공개하는 특별전도 선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전시하는 유품은 육필편지 20장 13통과 아버지 이회영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딸 규숙의 전보 등이다. “배삯을 구해 건너오라.(이회영이 아내 이은숙에게 쓴 편지 中에서)” 조선에 남아 뒷바라지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이회영의 그리움을 엿볼 수 있는 구절도 있다. 하지만 아내 이은숙은 남편이 있는 만주로 가지 못했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고, 하숙을 치며 돈을 모았지만 배삯은 늘 모자랐다. 결국 그녀가 전해 들은 마지막 소식은 뤼순 감옥에서 남편이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 한 장이었다. 이 밖에 여러 편지글을 살펴보노라면, 당시 이회영 선생의 망명지 일상과 고단한 심경이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이회영 선생의 육필 편지를 최초 공개하는 특별전 <등불 아래 몇자 적소> ©강사랑
2층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와 이회영 선생의 아내 이은숙 선생의 회상기 <서간도 시종기>를 만나게 된다. 이회영 선생과 같은 망명지 독집운동가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가난과 배고픔이었다. 일상의 괴로움을 물론이거니와 독립투쟁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회영 선생이 궁리 끝에 자신의 재능을 팔아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사군자 중 으뜸이라는 묵란을 잘 쳤다. 이회영 선생은 정성껏 그린 묵란을 내다 팔아 독립투쟁 자금으로 쓰곤 했다. 그의 묵란 그림에는 난잎을 칼로 바꿔낸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더욱 빛이 난다.
지하에 마련된 전시관에서는 몰입형 체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 노선이다>는 이회영 선생과 벗들이 어두운 시대를 헤쳐나갔듯 참여자가 손전등을 들고 경로를 추적하는 전시다. 서울에서 서간도로, 다시 베이징으로, 텐진 등으로 향하는 길을 잇는 건 내가 비추는 불빛이다. ‘서간도로 가는 길’이라는 영상은 1910년 추운 겨울 압록강을 건너던 여섯 형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거친 바람이 불지만, 그들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다. 어두운 전시관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면, 마치 그 길을 함께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됐을 때 이회영 여섯 형제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굶어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이들의 헌신과 발자취를 기리는 일은 시대적 요구였고,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2021년 6월 남산예장자락에 기념관이 들어섰다. 지난해에는 지금의 자리(사직동 묵은집)로 터전을 옮겨 또 다른 벗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향후 규모 등을 확대해 남산 인근에 다시 자리할 예정이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이회영 선생의 흉상 ©강사랑
기념관을 나서기 전,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이회영 선생의 흉상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의 결연한 얼굴에서 조국의 독립을 향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 느껴진다.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은 망명길에서도 끝까지 싸웠고, 독립군을 양성했고, 끝내 조국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꿈꾸던 자유로운 조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얻고자 했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도록, 이제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차례이다.
달쿠샤
○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 교통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514m
○ 운영일시 : 화~일요일 09:00~18:00,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서울역사박물관 누리집
○ 문의 : 070-4126-8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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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기념관
○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6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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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 02-75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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