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 역사를 걷다! 근현대사의 기억을 간직한 유적지 탐방

시민기자 박칠성

발행일 2024.07.30. 10:49

수정일 2024.07.30. 16:37

조회 130

우리 근현대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정동 덕수궁 돌담길 ©박칠성
우리 근현대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정동 덕수궁 돌담길 ©박칠성

정동길에 서울시민들이 잘 아는 덕수궁 돌담길 외 서양 선교사가 세운 근대식 학교와 교회 등이 있다. 자유‧민주‧평등‧인권을 배우고,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 말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정동의 명칭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의 덕수궁 부근에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이 조성되면서 정릉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왕위 계승 문제로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정릉이 도성 밖으로 이장된 후 정동으로 개칭되었다.

정동길을 걷다 무심코 지나친 100여 년 전 한국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정동 탐방을 다음과 같은 코스로 시작했다. 먼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들른 뒤 정동제일교회 그리고 이화박물관을 지나 중명전과 덕수궁 내 산책을 했다.
배재학당 내 역사박물관은 배재학당의 연혁과 활동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박칠성
배재학당 내 역사박물관은 배재학당의 연혁과 활동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박칠성

배재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1885년 8월 3일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 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1916년 준공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이다. 1층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을 재현한 교실체험실과 배재학당의 태동과 배재의 정신을 그리고 있다. 2층은 배재학당의 설립자, 선교사 아펜젤러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아펜젤러가 전인 교육을 실천했던 공간으로 교육·종교·정치·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다. ©박칠성
정동제일교회는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설립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다. ©박칠성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정동제일교회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감리교회이며 100여 년 전 지어진 벧엘예배당이 있다.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 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오랜 동안의 미국 망명 생활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음악회·성극 등이 열려 민주주의 훈련과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남녀평등과 여권 신장 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성가대가 운영되었고, 이곳을 통해 김인식, 이흥렬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 이 교회의 장로였던 박동완과 이필주 목사 두 분이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정동제일교회는 두 사람의 민족대표를 낸 교회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야간학교 개설 등을 통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교명은 고종황제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 맺으라”라는 의미를 담은 이화학당을 1887년에 하사했다.

이화박물관은 이화학당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2006년 5월 31일 개관했다. 1층 전시관은 유관순교실, 대한민국 여성교육사 특별전시가 진행되고, 2층은 상설 전시장이며 3층은 특별전시실과 기증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은 심슨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에 건립 후 1922년에 증축되었다.
을사늑약의 비운이 서린 곳, 덕수궁 중명전 ©박칠성
을사늑약의 비운이 서린 곳, 덕수궁 중명전 ©박칠성
서소문청사의 카페 다락에서 바라본 전경이 너무 멋지다. ©박칠성
서소문청사의 카페 다락에서 바라본 전경이 너무 멋지다. ©박칠성

중명전은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궁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황궁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서재로 지어졌다. 당시 건물의 이름은 수옥헌이었다. 1905년 11월 일본의 강압 속에서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는 비운의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서울시서소문청사 1동 건물의 13층에 있는 카페 다락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수궁 전경을 보는 멋을 부려보기도 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가운데 덕수궁을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박칠성
소나기가 내리는 가운데 덕수궁을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박칠성

덕수궁을 방문하여 소낙비 속에 우산을 쓰고 궁내를 걸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은 생각하는 힘이다. 역사에서 찾을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며, 역사를 배우고 역사에 살고 역사를 만드는 삶을 사는 것이 서울 시민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민기자 박칠성

서울시의 眞善美 열심히 찾아 시민들에게 알려드리는 서울시민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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