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엄마와 함께 떠나는 '3.1절 가볼 만한 곳'

권다현 작가

발행일 2024.02.28. 15:00

수정일 2024.03.27. 17:13

조회 27,164

여행작가 권다현의 ‘Fun하게 편하게 아이랑 서울여행’ (2) 그곳에, 대한제국이 있었다! 정동길
여행작가 권다현의 ‘Fun하게 편하게 아이랑 서울여행’ (2) 그곳에, 대한제국이 있었다! 정동길
덕수궁 앞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석조전의 베란다
덕수궁 앞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석조전의 베란다

아이들의 세계는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나뉜다. 착한 영웅이 있고, 그를 괴롭히는 건 반드시 못된 악당이다. 일제강점기를 이야기할 때면, 그래서 조심스럽다. 이분법의 단순명료한 세상을 살던 아이에게 당시의 복잡미묘한 정세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우리 중에 악당이 있었고, 그들 중에 영웅도 있었다는 걸 아이는 이해할 수 있을까. 3·1절을 앞두고 정동길을 찾은 건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시간을 거슬러 그 시절의 정동길을 따라 걷다보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선의 우월함이 아니라 악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석조전
석조전

잊힌 대한제국의 궁궐, 석조전

덕수궁을 처음 찾은 아이는 조선의 다른 궁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에 심드렁한 얼굴이다. 하지만 웅장한 중화전 지붕에 가려졌던 석조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자,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우리나라에 이런 궁궐이 있었어요?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이란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되었던 2014년, 나도 아이와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내부는 더욱 놀랍다. 황제의 침실과 와인 잔이 가득한 대식당, 소파로 채워진 접견실 등 마치 이국의 황실을 보는 것처럼 이채롭다. 특히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는 베란다에서는 전통적인 우리 궁궐에 서양식 건축물이 곳곳에 끼어들어 낯선 조화를 이룬 덕수궁 앞마당이 차라락 펼쳐진다. 
덕수궁 석조전 내 접견실
덕수궁 석조전 내 접견실
석조전의 대식당과 황제의 침실
석조전의 대식당과 황제의 침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던 고종은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황궁을 건립하고자 했다. 영국인 건축가가 설계를 맡았고, 영국 유명 가구회사 제품들로 내부를 채웠다. 그렇게 ‘돌로 만든 궁궐’ 석조전이 완성된 것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된 3개월 후다. 고종이 생전에 잠시 머물렀으나 황궁으로 사용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던 셈이다.
영친왕이 석조전을 임시숙소로 사용했던 당시 모습 (권다현 제공)
영친왕이 석조전을 임시숙소로 사용했던 당시 모습 (권다현 제공)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고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을 임시숙소로 사용했는데, 빛바랜 사진 속 그는 일본식 제복을 입고 일본 관료들에 둘러싸인 무력한 모습이다. 1930년대 이후엔 이왕가미술관과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등 여러 번 그 용도가 바뀌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덕수궁 내 여러 건물 중 고종의 운명과 가장 닮은 건축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을사늑약의 현장을 재현해 놓은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을 재현해 놓은 중명전

을사늑약의 처참한 현장, 중명전

이제 덕수궁을 빠져나와 중명전으로 향한다. 본래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던 이 건물은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사용된다. 수옥헌이란 이름도 중명전으로 바뀌는데, 뜻을 풀자면 광명이 그치지 않는 전각이란 의미다. 하지만 그 뜻이 무색하게 중명전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공간이다. 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는 모욕적인 순간, 고종은 끝내 이토 히로부미의 알현을 거절했지만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 박제순 등이 이곳에서 늑약에 동의하는 사인을 했다. 

다름 아닌 우리나라 대신들이 일본에 외교권을 내줬다는 사실이 아이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이 사람들이 제일 나빠요! 다 감옥에 갔겠죠?” 

안타깝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옥은커녕 태연히 천수를 누리고 대대손손 부를 축적했다. 악은 이렇게 우리 속에서 피어나고 선을 곪게 만든다. 독립운동가의 희생만큼 이들의 악행이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다. 아이도 맞다는 듯 머리를 힘껏 주억거렸다.
중명전 전시실에는 고종이 계획했던 헤이그특사에 관한 내용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중명전 전시실에는 고종이 계획했던 헤이그특사에 관한 내용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중명전은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특사를 계획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을 은밀히 불러 이 위태로운 나라에 세계 여론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중명전은 그가 황제로서 머물렀던 마지막 편전이 되었다. 이 같은 내용 또한 전시실에 이해하기 쉽게 정리돼 있어 아이는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조금은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화학당의 학생들. 맨 오른쪽 상단이 유관순 열사 (권다현 제공)
이화학당의 학생들. 맨 오른쪽 상단이 유관순 열사 (권다현 제공)

소년소녀는 용감했다, 배재학당·이화학당

중명전 건너편 언덕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자리한다. 선교사가 세운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고종이 직접 이름을 짓고 학교 간판을 내려줄 만큼 관심을 쏟았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동관으로, 붉은 벽돌을 쌓은 외장과 장식적인 현관 구조 등이 지금껏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내부에는 당시 배재학당 모습을 재현해뒀다. 일제의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우리 한글로 교육하기를 고집했던 곳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건물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건물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관순의 모교 이화학당도 근처다.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효시로 평가되는 이화학당 역시 고종이 이름을 내렸다는 점에서 그가 여성교육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교내에 마련된 이화박물관에서는 이 같은 역사와 함께 다양한 교육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미처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유관순의 이름이 적힌 명예졸업장 앞에서는 아이도 한참 걸음을 멈췄다.
유관순의 모교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내 이화박물관에 전시된 유관순의 명예졸업장
유관순의 모교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내 이화박물관에 전시된 유관순의 명예졸업장

또 이화박물관 건너에는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공사관도 있다. 현재 복원공사 중이라 관람은 어렵지만, 그 위치만으로도 당시 러시아의 위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후 일제의 위협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고종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 엄마 여행작가의 꿀팁!  
-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 해설관람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요. 방문할 날짜를 미리 정해서 누리집을 통해 예약해야만 입장 가능해요.
- 덕수궁과 중명전은 매주 월요일,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이화박물관은 매주 일·월요일 휴관해요.
-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수문장 교대의식이 이뤄져요.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거예요.
- 매주 토·일요일에는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13층에 자리한 정동전망대 관람이 가능해요. 덕수궁과 정동길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뷰맛집이니 놓치지 마세요!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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