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물난리 대처…영조, 청계천 사업에 착수하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8.31. 15:46

수정일 2022.09.0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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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청계천 전경
청계천 전경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1) 태종, 영조가 추진한 청계천 공사

도심을 흐르는 하천의 주변에는 산책로와 체육공원 등이 조성되어 도시인에게 좋은 환경과 더불어 여유와 정서를 안겨다 준다. 서울에서는 2005년에 복원된 청계천이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의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청계천은 조선 태종 때 처음 조성되었고, 영조 때는 대규모 준천 공사가 이루어졌다. 영조 때의 청계천 준천 사업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준천사실(濬川事實)』과 『준천계첩(濬川契帖)』의 기록으로 당시의 현장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태종이 청계천 공사를 시작한 까닭은?

옛날 도시를 흐르는 하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물류 교통과 하수 배출이었다. 1394년 10월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된 것도,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등 네 곳의 산이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한강을 끼고 있어서 사방의 물산이 통하는 도시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네 곳 산의 물이 지대가 낮은 도심으로 흐르고, 물길은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지지 못하였다. 특히 홍수가 심한 시기에는 도성 안 전체가 물에 잠기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태종은 도심을 관통하는 ‘개천(開川)’의 준설 사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청계천 공사에 처음 착수하였다. 태종 시대의 공사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406년(태종 6) 1월 16일 충청도와 강원도 정부(丁夫) 3,000명이 도성에 이르자, 덕수궁과 창덕궁에 각각 1,000명씩을 부역하게 하고, 한성부에 소속된 600명으로 하여금, 개천을 파는 일을 맡게 했다. 태종은 “해마다 장마 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며 개천 공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412년에는 공사 주관 본부인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였고, 삼남 지방의 역군(役軍)까지 동원하여 1개월 여 만에 공사를 완공하였다. 1412년 2월 15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장의동(藏義洞) 부터 종묘동(宗廟洞) 까지 문소전과 창덕궁의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을 만들고, 대·소 광통교와 혜정교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와 신화방(神化坊) 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고 하여, 주요 다리는 돌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대의 준천 공사와 관련 기록들

태종의 뒤를 이어 청계천 준천(濬川)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가 준천에 관심을 보인 데는 사회적인 변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점차 하수 배출의 기능을 잃어갔다. 인구의 증가로 성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토사(土沙)가 청계천을 메워 홍수 피해의 우려는 한층 심각해졌다. 

영조는 준천 공사를 통하여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한편 도시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영조는 공사의 시작 과정에서부터 신하들은 물론이고, 재야의 선비와 백성들까지 만나면서 의견을 구하였다. 1752년에는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직접 물었고, 1758년 5월 2일에는 준천의 찬반 여부를 물은 후 구체적인 방안들을 계획해 나갔다. 

본격적인 준천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 간의 공사 기간에 21만 5,000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시전(市廛)의 상인,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000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에 3만 5,000냥의 돈과 쌀 2,300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영조는 청계천 공사 완료 후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도록 청계천에 토사가 쌓이지 않도록 점검하는 한편, 한 글자라도 흙에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이 준천을 실시할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청계천 모전교 다리 밑 그늘에서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청계천 모전교 다리 밑 그늘에서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청계천 공사의 현장 모습들

영조는 준천한 후에 청계천이 몇 년간을 지탱할 수 있는가를 묻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백 년은 갈 것이라는 대답하였다.  『영조실록』에도 이 내용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지만,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싣고 있다. 

우선 영조와 면담한 인물들의 관직과 성명이 기록되고 영조와 신하들의 대화 내용이 모두 실려 있다. 영조가 직접 준천한 경계를 묻고 호조판서 홍봉한이 송전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답한 내용, 수표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지역은 넓어서 공사가 힘들었다는 것, 영조가 직접 『준천사실』이라는 책명을 정한 사실 등은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만 접할 수가 있다. 특히 대화체로 영조와 신하들의 의견을 적고 있어 현장의 생생함이 살아난다. 

『승정원일기』 1758년(영조 34) 5월 2일에는 영조가 미시(未時:오후2시경)에 숭문당에 나갔을 때 어영대장 홍봉한, 승지, 기사관, 기주관 등과 준천 문제를 깊이 논의한 사실이 나타난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주요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영조: 저번에 광충교(廣衝橋)를 보니 전 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영조: 경들은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가?
홍봉한: 신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한 즉 어찌 진력하여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영조: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비록 하천을 준설해도 사토(沙土:모래흙)를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 혹은 배로 운반하고, 혹은 수레에 싣고, 말에 짐을 얹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영조(웃으며): 성중(城中)에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릴 때 가능한 방법입니다.
영조: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말해보라.
사관: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지만, 만약 민간의 노동력을 동원하려 한다면 초기에는 민원이 많을 것이다.
영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말해보라.
기사관 이해진: 시골의 사람들은 준천의 이해난이(利害難易)에 대해 정견(定見)이 없습니다. 도성 내의 여론을 수집해 보았는데, 준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기주관 서병덕: 준천의 계측은 일찍이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북악이 잘 붕괴가 되고 동쪽 도랑이 잘 막히니, 먼저 북악의 수목(樹木)을 기르고, 동쪽 도랑의 막힌 부분을 깊이 판 연후에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영조: 옳은 의견이다.

1760년(영조 36) 2월 23일에는 호조판서 홍봉한이 성 밖의 물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자 이를 윤허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오전 8시경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濬川)에 있다. ... 오간수문의 역사는 매우 힘들다고 했는데 6일 내에 일을 마치니 신기하다.”고 하였고, 홍봉한은 “수문의 칸에 흙을 파기가 힘들었으나 한번 구멍을 뚫으니 점차 팔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여러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고 하자 영조는 동의를 표하였다. 

이어서, 홍봉한이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고 하자 영조는 “그들이 흙과 물을 볼 수 있는가?”라 물었다. 홍봉한이 “반드시 그들이 가동(家僮)과 노비의 일을 하고자 한 것인즉 부역을 할 수 없다는 뜻의 분부를 내렸습니다.”고 하자 영조는 “그 마음은 가상하다.”고 하였다. 국가적 사업에 맹인들까지 적극 나서는 모습에 영조가 큰 감동을 받았음이 나타나 있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영조실록』에는 청계천 준천 사업의 결과에 해당하는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왕과 신하의 대화 형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특히 준천 공사가 추진된 시간, 장소, 어려운 공사 구간, 배석 인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여 왕의 동선을 추적할 수 있고, 일을 추진한 과정에서 찬반 의견을 알 수 있다. ‘경진지평’ 표석은 현재의 광통교 다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역사의 현장 모습이 그대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청계천의 시원한 물소리와 하천 주변의 녹음은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청량감을 안겨다 준다. 태종의 의지로 첫 삽을 뜨고, 영조가 백성들과 소통하며 대규모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청계천 공사의 기억을 떠올리며, 도심 속 휴식 공간 청계천 나들이에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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